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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고린도후서 1장 환난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위로와 확신 2023-4-10, 월

작성자축제|작성시간23.04.09|조회수131 목록 댓글 0

고린도후서 1

환난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위로와 확신

(찬송가 15장)

2023-4-10,

맥락과 의미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일을 배경으로 썼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 사역을 하면서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주후 54,55). 고린도후서는 고린도로 향해 가던 마케도니아에서 썼습니다(주후 56,57).

고린도후서는 크게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1. 사도의 직분: 그동안에 일어난 일을 설명, 사도의 직분과 복음을 가르침(1-7)

2. 성도의 헌금하는 직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의 의미(8-9)

3. 사도의 직분: 바울은 정당한 사도임. 고린도 교인이 자신을 점검하며 회개해야 (10-13)

우리도 편지 성경을 읽으며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을 다짐하기 바랍니다.

 

1. 환난 중의 위로(1-11)

2. 성도를 향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한 사도(12-14)

3. 계획 변경 가운데 나타난 바울의 신실, 삼위 하나님의 신실(15-22)

4. 사도의 사명: 성도의 믿음의 주관자가 아니라 돕는 (23,24)

 

1. 환난 중의 위로(1-11절)

사도가 받은 환난은 유익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도가 환난을 당하게 하셨지만, 환난 중에서 넘치는 위로를 주셨습니다(3).

둘째, 사도의 환난은 개인적인 고통이 아니라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5). 그래서그리스도로 말미암아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닮아갔습니다. 환난이 얼마나 컸던지 사형 선고를 받은 같았습니다. 환난을 받은 이유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9).

셋째, 환난 가운데 위로를 받을 주위 사람에게 위로를 줍니다. 그래서 환난은 은사입니다. 가운데 위로를 받는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 가운데 받은 위로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오늘도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어떻게 위로해 주실지 기대합시다.

넷째, 환난은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고 믿음을 성장시킵니다(6). 우리는 고난을 받아도 자신을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분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고난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10).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크게 만듭니다. 우리의 재산이나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 때문에 위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성도는 환난 받는 성도를 하나님이 도우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기도 응답으로 위로해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11).

우리의 삶에서도 고난이 극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위로를 주실까?” 어떤 날은 부담이 크고 두렵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풀어주실까를 기대하며 나갑시다. 거의 죽을 듯한 그런 환난을 주실 때에는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 의지합시다.

교회와 성도의 환난 가운데 공동체로서 기도합시다. 주신 위로에 대해 공동체적으로 감사합시다.

 

2. 성도를 향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한 사도(12-14절)

1) 바울의 여행 계획의 변경과 고린도 교인들의 비난

바울이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을 변경했기 때문에 믿을 없는 사람이라고 고린도 교인들이 비난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계획은 변경했지만 신실하게 행했다고 변호합니다.

바울은 원래 에베소, 마케도니아, 고린도, 예루살렘 순서로 여행 일정을 잡았습니다(A, 고전 16:1-6).

에베소에서 바울은 급히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근심, 고통의 방문) 변경된 계획을 말해준 듯합니다. 에베소, 고린도, 마케도니아, 고린도, 예루살렘 순서로 일정을 변경했다고 말합니다(B, 고후 1:15-16).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계획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의 방문으로 인해 너무 갈등과 고통을 겪었기에, 그는 다시 고린도 교회를 번만 방문하는 것으로 다시 변경했습니다(A, 고후1:23). 아마 눈물로 편지에서 변경된 계획을 말한 듯합니다.

이것을 두고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믿을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는 자신의 여행 계획 변경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성도를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변호합니다.

 

2) 성도를 향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한 사도(12-14)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순수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거하는 바니”(12). 은혜는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편지를 쓰고 가르칠 육체의 지혜,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말씀으로 행했습니다. 말씀을 따라 책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것을 비난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인간의 지혜로 하지 말고 말씀으로 합시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여행 계획 변경을 두고서 신실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주고 신뢰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도는 자신이 신실하게 행했음을 양심적으로 말합니다(12).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의 진정성이 나타날 것을 확신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14, “우리 예수의 ”, 재림의 날에 모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날 것을 확신합니다. 때에는 오해도 풀리고 성도들과 사도가 서로를 진실한 모습으로 알게 것입니다. 확신에서 평화를 누렸습니다.

우리도 인간 관계에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양심에서 올바르다면 분명하게 변호하는 용기를 가집시다. 땅에서 당하는 억울한 오해가 풀리지 않아도 평화를 누립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풀어주실 것을 소망하며 안정된 삶을 살아갑시다.

 

3. 계획 변경 가운데 나타난 바울의 신실, 삼위 하나님의 신실(15-22절)

15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던 것을 방문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해 17절에서 변호합니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육체는육체의 지혜”(12) 말합니다. “ 신실함을 말합니다. “했다가아니오라고 왔다 갔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방문 계획을 바꾼 때문에 신실하지 않다고 비난받아서는 됩니다. 모든 계획을 인간적인 지혜로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속한 것을 그리스도안에서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을 따라 바울도 신실하게 행했습니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하나님이 구약 성도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언약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사도가 신실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신실함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쓰러질 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신실할 있습니다(22).

하나님께서는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님 때문에 우리가 신실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함 때문에 신실하지 못할 때에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신실하게 나갑시다.

 

4. 사도의 사명: 성도의 믿음의 주관자가 아니라 돕는 자(23,24절)

23,24절은 방문계획을 번으로 줄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자신의 편리 때문에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까지 사도의 반복적인 권면(방문과 편지를 통해)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에 대한 불신을 깊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방문하여 강하게 책망하면 고린도 교인의 변화는 없으면서 서로의 관계만 악화될 있습니다.

혹은 그들을 강제적으로 협박하여 변화를 일으키려 하는 무리수를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는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됩니다. 양심을 주관하는 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는 그들이 양심의 평화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사도의 권면에 따라 믿음을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믿음과 기쁨을 돕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변화할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조용히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번째 방문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말씀 사역자는 성도를 지배하는 자가 되어서는 됩니다. 목사가 겸손하고 지혜롭게 성도를 영적으로 섬기며 돕도록 기도합시다.

 

믿고 복종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살아갈 ,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환난을 주십니다. 환난으로 인해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인내 가운데 연단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게 합니다.

모든 것을 참을 있도록 순간순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로서 다른 성도를 위로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시다.

사람들로부터 오해받을 우리는 바르게 변호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밝혀 주실 것을 믿으면서 평화를 누립시다. 흔들리지 말고 우리의 직분에 집중합시다.

목사와 다른 성도들의 삶에 대해 쉽게 비난하기보다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행하고 있을 것이다 후한 마음으로 줍시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나는 신실한 자다하면서 자신을 의지하지 맙시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 가운데 주님께서 나를 연단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고난 가운데 인내할 믿음과 위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조금 생각하기

<참고>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차례 방문과 개의 편지

 방문편지
50-521. 고린도 교회 개척 
54 이전 1.  음행을 경고하는 편지
(고전 5:9-11, 없어짐)
55 2. 고린도전서
552.  “근심(고통)” 방문
(2:1,12:21,13:2)
 
56 3. 눈물의 편지 (고후 2:3-4:9,
7:8-12, 남아 있지 않음)
56 혹은57 4. 고린도후서
56 혹은 573. 3개월 방문 

바울은 3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고 4개의 편지를 썼습니다. 2개만 성경으로 남아 있고 2개는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50-52년에 개척하여 목회한 떠났습니다. 떠나 있을 고린도 교회의 음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망하는 편지를 썼습니다(고전 5:9-11). 편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침실 생활 문제(고전 7:1), 은사에 대한 문제(고전 12:1) 등에 관해 질문하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스데바나 등이 편지를 가져옴, 고전 16:17). 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음행, 분쟁,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한 비난 등의 소문을 들었습니다(고전 1:11, 글로에 사람 편으로). 그래서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던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냅니다(스데바나 등을 통해서. 545년경). 바울이 3 전도 여행 에베소에 있을 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내기 전에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냈습니다(고전 4:17, 16:10-11). 디모데가 바울에게 와서 고린도 교회에 분쟁, 도덕의 문제가 여전히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급히 고린도를 방문합니다(55). 그러나 서로 상처만 남기고 바울은 에베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근심의 방문이었습니다(고후 2:1, 2 방문). 그는 다시 고린도 교회에 눈물로 편지를 써서 디도 편으로 보냈습니다(고후 2:4, 편지는 남아 있지 않음).

바울은 디도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도가 목회하던 에베소에서는 그를 죽이려는 시민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19:23-41). 그래서 바울은 55, 56년경에 급히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 20:1) 그곳에서 남쪽으로 고린도로 예정이었습니다.

마침내 디도가 왔습니다.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바울을 비난하던 교인을 고린도 교회 전체가 권징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고후 2:12-13, 7:6).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변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린도후서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일을 회상하고, 그들을 권면하며 다시 방문하고 싶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가지 문제에 대해 다룹니다. 첫째, 음란, 시기와 분쟁(12:20-21), 헌금과 나눔에 인색함(9) 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다시 회개를 권면하고 변화를 요청합니다. 둘째, 권징을 받은 사람들이 회개했는데도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가혹하게 다룰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용서하라고 말합니다(2:10).

 

<참고> “계획”(16, 헬라어-불레, 히브리어-에차)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2에서는 협의(counsel, consilium) 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자기 뜻의 협의를정하시는 행위라고 합니다. “자기 뜻의 협의 에베소서1:11마음의 원함 그대로 인용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에 따라 작정(결정)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성도를 구원하시고, 섭리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분별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살아갔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계획도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계획에 변화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분의 백성을 심판한다고 경고하시고도 당장 심판을 집행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회개하도록 심판의 날을 미루십니다(벧후 2:9).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준엄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구원하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원래 말하신 것과 다르게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누가 그분은 일관성이 없는 분이라고 비난하겠습니까? 누가 신실하지 않은 하나님이라고 비난할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비난받아야 합니다. 심지어 그분이 구원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 선택된 백성이 비난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않고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지 않은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신실한 사랑 때문에 자신이 고난을 받으심을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심판이라는 원래의 계획을 어기는 듯합니다. 사랑 때문에 신실하지 않은 듯합니다. 합리적인 생각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신실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신실합니다. 사랑 때문에일관성이 없다 비난을 받으면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해할 있겠습니까? 그분의 신비한 구원의 은혜 앞에당신은 영광스럽습니다”( 11:33) 하고 엎드려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신실함 때문에 비난을 받으면서도 교회의 가장 유익을 위해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변덕스러운 같지만 속에서 가장 일관성 있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고 있습니다.

 

<참고> 24, “믿음을 주관하려는”(퀴리오오)=주님(퀴리오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믿음을 주관하려”(퀴리오오) 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을 주관하는 것은 오직 주님(퀴리오스)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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