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7장
고린도 성도에게 거룩을 권면함,
디도가 옴으로써 고난받는 사도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찬송 264장)
2023-4-17, 월
맥락과 의미
바울은 에베소(터키 서부지역)에서 2년 반 동안 목회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영적 타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많이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디도를 고린도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다시 오지 않으니까 초조해서 디도가 오게 될 여행로를 향해 떠났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가서 기다리는 동안 “쉼-안식”이 없었습니다(2:13, 7:5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2:12-7:4은 디도를 기다릴 때 답답한 심정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 가운데서 성령님께서 주신 위로와 사도의 사명에 대해 말합니다.
7:5-16절은 디도가 바울에게 와서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고 변했다고 말해주었을 때 바울이 기뻐한 것을 말합니다.
1. 교인에게 거룩한 삶을 권면, 사도를 기쁘게 받아들일 것(1-4절)
2. 디도가 와서 전해준 고린도 교회의 회개와 화해, 기쁨(5-16절)
1. 교인에게 거룩한 삶을 권면, 사도를 기쁘게 받아들일 것(1-4절)
1-4절은 앞에 6장에서 한 말을 간략히 요약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마음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6장에서 복음 전파(1-2절), 고난 가운데서의 기쁨(3-10절), 고린도 교인에게 바울을 향해 마음을 열 것을 요청(11-13절), 거룩한 삶을 살도록 복음 전파(14-18절)에 대해 말한 것을 요약하여 7장에서 다시 말합니다.
1절, 우리는 “이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백성을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행하시고 그들을 아들과 딸로 삼으신다는 언약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온 세계 교회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한 삶을 살자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관심도 물질적 안정을 너머서 거룩한 삶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2-4절은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향해 비난한 것에 대해 변호하면서 다시 복음을 전합니다. 1-7장의 흐름으로 보아서, 마케도니아에서 초조하게 디도를 기다릴 때 가진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아직도 사도 바울에 대해 남아 있을 수 있는 불신을 해소하려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라고 강권한 것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은 불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마치 사도가 불의한 행동을 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해롭게 했고, 돈을 속여서 빼앗았다는 비난을 했습니다.
바울은 세심한 목회적 배려를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말합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성도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3절). 고린도 성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다시 달게 받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명의 능력을 지금 이 땅에서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에도 거룩한 삶을 살아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지금 이 편지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교회를 위해 담대하게 책망도 합니다. 또 그들의 영적 성장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수고하면서 죽을 듯이 힘든 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위로와 기쁨이 넘친다고 간증합니다. 고통의 순간에 경험한 위로와 기쁨을 회상하며, 그 기쁨 안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초대합니다.
바로 지금 이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 모두도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서 기쁨과 위로가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2. 디도가 와서 전해준 고린도 교회의 회개와 화해, 기쁨(5-16절)
1) 디도가 전해준 고린도 교회의 변화의 소식과 기쁨(5-7절)
7:5-16절은 앞쪽의 1장-2:13과 비슷합니다. 앞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발전시킵니다. 7:4에서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라고 합니다. 1:4에 “환난 중에서 위로하사”라고 했던 것을 다시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을 통해 위로를 받았지만, “비천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6절, 1:4을 정확히 반복)이 참 위로가 된다고 말합니다.
디도가 와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과 화해하고 회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디도 자신이 직접 바울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말씀 전파자와 모든 성도를 위로해 주십니다.
8-12절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과 화해하고 변화된 것으로 인해 위로받았음을 말합니다. 13-16절은 디도 자신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위로받았기 때문에 바울도 위로받았다고 합니다.
2) 고린도 교인의 회개로 인한 기쁨(8-12절)
8-10절: 사도는 디도를 보내서 고린도 교회를 권면하기 전에도 편지를 보내 강하게 책망한 적이 있습니다. 이 편지는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보낸 편지(지금은 없어짐)를 말하는 듯합니다. 교인 중에 불의하게 살면서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을 권징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 편지를 보낸 후에 바울은 마음에 걸렸습니다. 내가 너무 심하게 했는가?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후회하지 않습니다(8절). 그 편지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근심을 일으켰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함으로써 “회개함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9절).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근심했기 때문에 회개를 “이루었습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마음으로 후회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은 죄책감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한 마디로 사망을 “이룹니다.”(10절)
앞서 사도는 이 땅의 환난은 가볍지만 그것은 크나큰 천국의 영광을 “이룬다”(4:17, 참고 로마서 5:3)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두고서 하나님 앞에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고, 하나님 안에서 받는 고난은 영광을 이룹니다.
11절: 바울의 책망(편지, 디도의 방문)으로 인한 근심이 낳은 결과
간절함: 그들은 사도 바울을 비난하던 것을 버리고 화해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습니다.
변증(변호): 자기들이 바울을 비난하던 것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분함: 바울에게 잘못한 교인들에 대해 분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을 대항한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모함: 바울을 사모하는 좋은 마음으로 어서 화해하기를 원했습니다.
열심(열정): 바울을 향한 열정,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일어났습니다.
벌함: 바울을 비난한 사람을 교회적으로 권징했습니다.
너희의 깨끗함을 나타냄: “깨끗함을 나타냈다”(11절)는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추천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추천서를 요구하듯이 바울을 의심했습니다(3:1). 하지만 사도는 다른 추천서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복음 전파(4:2)와 고난 가운데서 생명과 기쁨을 나타내는 삶(6:4)을 보이며 스스로를 자격 있는 사람으로 추천하였습니다. 이제 고린도 성도도 자신의 거룩함을 스스로 추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절은 바울이 지난 번에 쓴 편지의 목적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을 향한 고린도 교회의 열심(11절의 ‘간절함’과 같은 말)이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과 화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문에 “불의를 행한 자”(바울을 비난한 성도)를 권징하라고 편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 사람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바울과의 관계를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불의를 당한 자”는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 자신을 말하는 듯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 사람을 권징하면서, 교회 전체가 사도와 화해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벌한 것 자체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화해한 것을 기뻐합니다. 앞에서도 바울 자신은 그 사람을 용서했으므로 교회 전체가 그 사람을 다시 형제로서 따뜻하게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2:5-11).
2) 디도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위로받은 것으로 바울을 위로(13-16절)
사도는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받은 위로 때문에 기쁨이 더 커졌습니다. 디도는 고린도 성도를 만난 후 “안심함을 얻었습니다.”(13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정확히 같은 단어를 씀으로써 성령님은 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쉼과 위로가 교회와 성도를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디도는 고린도 교회의 모든 성도가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그들을 향한 “심정이 더욱 깊었습니다.”(15절) 즉 마음으로부터 성도를 향한 깊은 정이 넘쳤습니다.
‘영접하다’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파송할 때 설교한 마지막 말에 나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마 10:40) 고린도 성도가 말씀 사역자 디도를 영접할 때, 다시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는 인간적인 화해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5:18) 때문에 기뻐합니다. 직분자가 전한 말씀을 받고 “순종한” 데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했습니다. 음란과 분쟁과 자기 자랑을 회개하고, 직분자와 화해하면서 그리스도께 복종한 것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 시대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와 같이 혼란한 상황입니다. 자기 직분을 신실하게 다하는 문화가 너무 약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난과 갈등을 인간 관계의 문제로 보지 않고, 직분으로서 보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고 권면하도록 기도합시다. 잘못을 바로잡으려 할 때 고통이 있습니다. 관계의 불편함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근심하고 갈등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성도와 교회 전체가 깨끗하고 거룩한 삶에서 추천할 만한 상태로 성장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도 온유한 마음으로 권하고 책망합시다. 직장에서도 하급자에게 사랑으로 바른 책망을 합시다. 그것이 우선은 괴로워도 좋은 결과를 낼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도,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해야 합니다. 거기에 참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서로를 직분자로, 혹은 새로워진 그리스도의 지체로 영접합시다. 거룩한 기쁨이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기도합시다.
바울과 디도처럼 참된 쉼을 누리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쉼은 육체적 정서적 쉼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쉼은 그리스도의 죄 용서 안에서 양심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직분의 십자가를 지는 가운데 쉼을 누립니다.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며, 또 다른 사람도 거룩함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은 힘듭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참된 쉼을 풍성히 누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후 영원한 쉼으로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신비가 고난과 쉼으로 나타납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는 말씀으로 권면하는 직분자의 말을 달게 받고 순종합니까? 나 또한 직분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이끕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2:14-7:4, 고난 가운데서 묵상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받음
고린도후서는 아주 잘 짜인 교육용 편지입니다. 2:12과 7:5에서 같은 말을 함으로써 편지의 틀을 만듭니다.
2:12,13,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노라.”
7:5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바울은 에베소(터키 서부지역)에서 2년 반 동안 목회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영적 타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많이 염려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낸 다음에 편지를 한번 더 보내고(지금은 없어진 편지), 방문도 한 차례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바울은 상처를 입고 다시 에베소에 와서 계속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가 너무 염려되어 디도를 고린도로 보냈습니다. 디도가 오지 않으니까 초조해서 디도가 오는 여행로를 향해 떠났습니다. 북쪽 드로아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기다렸습니다. 계속 디도가 오지 않으니까 너무 초조했습니다.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지만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 다시 서쪽으로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
2:13과 7:5은 바울이 디도를 만나기 위해 에베소에서 마케도니아로 갔을 때의 상황을 말합니다. ‘영(프뉴마)에 쉼-안식’이 없었습니다(2:13). ‘육신(사르크스)에 쉼-안식’이 없었습니다(7:5). 밖으로는 다툼(분쟁과 여러 투쟁)이 있었고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어 7:6은 디도가 옴으로써 받은 위로를 회상합니다.
이 글쓰기 방법은 사이에 끼인 2:14-7:4에 주목하게 합니다. ‘바울의 영과 육신, 온 인격이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안팎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상황’으로 모든 독자를 초대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 고난에서 벗어나 위로와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바울이 그 다급한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버텨냈을까를 궁금하게 합니다.
그 궁금증에 대한 답으로써 2:14-7:4은 사도직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교회론’ 혹은 ‘직분론’을 쓰는 학자의 글이 아닙니다. 영혼이 타들어 가는 고통 가운데서 ‘답답한 일을 당하면서’ 성령님이 주신 위로와 깨달음을 간증처럼 말합니다.
‘도대체 나의 직분과 사명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고난을 내가 꼭 당해야 하는 것인가? 이 고난을 통해 교회에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 나는 실컷 고생만 하고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그때 사도의 영혼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던 질문들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는 모든 목사의 기도 시간을 길어지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주 안에서’ 직분을 감당하려는 모든 성도의 실존적 질문입니다.
앞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발전시킵니다. 마치 샌드위치 가운데 있는 고기처럼 2:14-7:4이 있고, 바깥의 두 쪽 빵처럼 1장-2:13과 7:5-16절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샌드위치 구조라고 말합니다. 7:5-16절은 1장에서 말한 환난 가운데서의 위로를 말합니다.
<참고> 이루다(에르가조마이, 카타-에르가조마이,10절), 이루다(카타-에르가조마이11절)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룹니다(카타-에르가조마이, 10절).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 하는 근심은 구원을 이룹니다(에르가조마이, 10절). 또 사도 바울을 향해 간절하게 합니다(하며=이룬다, 카타-에르가조마이, 11절).
사도가 환난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영광을 위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카타-에르가조마이, 4:17).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카타-에르가조마이, 로마서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