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장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로 구원하시고 버려 두심 앞에서 겸손히 은혜 의지하며 영광 찬송 2017-9-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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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로 구원하시고 버려 두심 앞에서
겸손히 은혜 의지하며 영광 찬송 (찬송 178장, 새찬송가 180장)
2017-9-8, 금
맥락과 의미
로마서 11장은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택한 사람과 버려진 사람이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서 나오는 은혜를 가르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아직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더 많은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앞에서 사도는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미리 알고 선택한 사람만 구원, 나머지는 악하게 됨 (1-10절)
1절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2절에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5절에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야 시대에 거의 모든 백성이 우상 숭배로 향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선택한 사람 7천 명을 남겨 두셨습니다(열왕기상 19:10,14). 개인적으로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선택하신 백성 가운데서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서 믿지 못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은혜의 선택에 따라 구원받은 사람과 버려진 사람이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와 시편도 증언합니다(8-10절, 이사야 29:10, 시편 69:22,23)
2. 이스라엘 백성-유대인의 범죄와 이방인의 구원 (11-24절)
11-15절: 유대인들 중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많고, 오히려 이방인 가운데 믿는 자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믿는 것을 통해서 유대인에게 시기심을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유대인들이 더 많이 그리스도께 돌아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교회가 더 충만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16-24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유대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 원래의 백성에게 접붙여 짐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16-18절). 신약 교회의 모든 성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뒤를 따르는 믿음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교회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 신약의 성도들이 함께 참여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20절에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원래의 하나님의 백성 중에도 넘어지는 사람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보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지 않으면 찍어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비하게 일하십니다. 구원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십니다. 또 심판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 은혜의 자리에 계속 있으면서 은혜를 의지하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장차 유대인도 구원받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의 은혜를 베푸실 것 (25-32절)
이제 25절 이후에서는 유대인의 구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25-26절에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26-27절은 이사야 59장을 인용합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나오고 또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켜서 그들이 회개할 것이다. 그때 그들과 내 언약을 세우리라.’(사 59:20,21) 29절에 하나님께서 백성을 부르셨기 때문에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31절에 그들을 돌이켜서 구원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서 59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것을 말합니다. 역사의 어느 마지막 시점에는 그동안 회개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더 많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까울수록, 유대인 가운데 구원 얻는 자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유대인들이 구원받는다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또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더 확장하시고 있습니다. 은혜를 확장하는 은혜의 시대를 열어가시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신비합니다. 유대인들이 불순종하고 있는 그 기간에 하나님께서는 온 민족에게 복음을 확장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오히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온 땅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결국은 복음이 더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비하게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4.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신비를 찬양하자 (33-36절)
33절에서 36절은, 유대인들 가운데 믿는 자들이 많아질 것을 바라보면서, 구원의 은혜의 신비함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과 주권과 은혜 앞에서 그냥 겸손히 엎드려서 감사 찬양할 뿐입니다.
34절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36절에 나오는 한 마디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그 분으로부터)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그분을 통하고) 주에게로(그 분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모든 만물을 유지하십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아갑니다. 이 앞에서 우리는 엎드려서 경배할 따름입니다. 온 세계에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은혜 앞에서 우리는 그 은혜를 겸손히 찬양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구원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 안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구원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우리 경험으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할 따름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예정 받았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정하시고 택하십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계속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자비하심 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마치 자동적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계속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계속 확신을 주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복음 말씀을 계속 의지하는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구원의 은혜를 주신 그분 안에서 삼위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고 나가는 거기에 구원이 우리 안에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유대인도 하나님이 다시 그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실 것입니다. 버려진 자들 중에 다시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비를 놀라움으로 경배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감사합시다. 불순종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언약의 저주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엎드려 경배합시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 다 모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가시고 우리의 구원도 이루어 가십니다. 그분 앞에서 감사합시다. 엎드려 경배하는 우리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참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아포-태오)? 그럴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백성을 버리지(아포-태오)? 아니하셨나니” (2절).
1)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여 그 백성을 버리지 않고 찾으심
버린다는 이 단어가 구약에서 “아마스”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그 분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버리신 것에 사용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할 것이요” (호 4:6) “저희(이스라엘)가 듣지 아니함으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호 9:17).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 이방 나라에 의해 고통을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야서의 마지막은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희가 백합과 같이 피겠고. 내가 저를 돌아 보아 대답하기를 .. 네가 나를 인하여 열매를 맺으리라” (호 14:신5,8)로 끝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부르짖었습니다.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버림 당하게) 하시고” (에레미야 애가 3:44).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은 바벨론 포로의 후예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 응답되었습니다.
“버린다”는 말은 신약 성경에 6번 나옵니다. 로마서 아닌 다른 4곳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 분의 종들과 축복을 버리고 배척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이집트와 거기서 해방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모세를 배척했습니다(행 7:27,39). 이스라엘 백성은 사도 바울이 전한 영생의 말씀들도 버렸습니다(행 13:46) 그래서 바울은 “이방의 빛”으로서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심지어 사도의 복음을 듣고 교인이 된 사람들 중(유대인 혹은 이방인)에서도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렸고” (딤전 1:19) 교회의 권징을 받아 출교되어 사단에게 내어 준 바 되었습니다(딤전 1:20).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로마서 11:1,2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에 신실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계속 신실하셔서 그 백성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거절하고 혹시 방황하고 있습니까? 바로 지금 돌아 오십시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 보다 더 큰, 무한한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두 발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감사하며 회개하며 돌아오십시오.
2) “버리셨느뇨,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구약의 시편의 탄식과 엘리야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계속
“버리신다”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이 탄식할 때 하던 기도의 표현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자나흐”의 번역입니다. 구약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버림당한 것에 대해 부르짖고 하나님은 응답하신 과거가 사도 바울에게 계속 이어 집니다. .
시편 60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전쟁에서 밀리면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1절) “하나님이여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절). 기도는 확신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하나니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임이로다” (11절).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버리지 마실 것을 기도했고, 그 응답 가운데 로마서 11:1,2에서 말합니다.
시편 44편에서도 구약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과거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들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그러나 이제는 우리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44:23) ““주여 꺠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23절). 바로 앞 구절 시편 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니다.” 이것을 로마서 8:36이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여, 고난가운데 탄식했고, 그 대한 응답을 받아 기기록했습니다. 성도가 버림 당한 것 같은 고난에서 하나님은 건져 주십니다.
그러나, 고난보다 더 크고 근본적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은 구약 시편의 전통에 따라서 백성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버리시지 말기를 기도했습니다. 로마서 9,10장에서 그의 탄식 기도를 말했습니다. 9:2-4에서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자로 원하는 바로다.” 10:1에서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이 탄식기도에 대한 응답이 바로 로마서 11:1,2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백성을 버리리 아니하셨나니”이 기도와 응답은 단지 사도 바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그 기도와 응답을 기록하여 보편 교회가 읽게 하셨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기도와 응답의 분명한 사례로서 구약 엘리야를 기억합니다(롬 11:2-5).
엘리야의 기도: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잔들을 헐허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을 찾나이다.”
엘리야에게 히나님의 응답: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남겨 두었다.”
바울과 신약 교회에 응답: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이 엘리야와 바울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은, 경건한 성도와 교회가 적어 보이는 때에 항상 위로가 됩니다. 사람의 눈에는 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참 경배자”가 모든 시대의 교회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칼빈은 당시의 교황의 로마교회가 근본적으로 교회일 수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곳에 바른 성례와 말씀의 전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도 “교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 교회들 가운데 그 분의 남은 백성을 놀랍게도 보존하시고.. 교회의 어떤 표지들이 남아있는 그 정도에서는” 교회들이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기독교강요. 4.2.12)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사람은 잘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곳곳에 참 성도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교회의 타락”을 말하면서 비관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한국 곳곳에서, 세계 곳곳에서 참 성도와 예배자를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쉽게 부정적으로 말하지 맙시다. 우리가 하나님 처럼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아니니까, 겸손합시다. 그리고, 엘리야 처럼, 사도 바울 처럼, 칼빈 처럼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하시고,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기도합시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절히 부르짖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앞서간 신앙 선배들 처럼 영적 폐허의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깨달음과 희망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노래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아멘”(롬 11:36).
로마서 11장에는 비슷한 단어 두 쌍을 연결시켜서 말씀을 효과적으로 강조합니다.
1) ‘송사하다’(엔-팅카노, 3절)와 ‘받다’(에피-팅카노, 7절에 두 번)
이 두 말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3절에, 송사한다는 것은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과는 다른 뜻입니다. ‘어떤 사람과 재판장의 중간에서 간청하고 간구한다’는 뜻입니다. 신약에는 5번 나오는데, 그 중에 로마서에서 3번 나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부르짖을 때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롬 9:27). 우리가 죄로 인해서 두려울 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롬 9:34, 비록 다른 사람이나 사단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송사-고소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는 우리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 25:24에서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여달라고 총독에게 청원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하나님이나 백성에게 불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을 위하여 간청하며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엘리야처럼 백성을 위해 간구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청원하는 것(엔-팅카노)과 비슷한 말이 구원을 ‘얻는다’(에피-팅카노)입니다. 가운데에 서서 가지고 오는 것을 청원한다고 합니다. 가까이 가서 가져오는 것이 얻는 것입니다. 7절에서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7절).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님, 그리고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고 간청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얻는다’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5번 나오는데, 그 중 2번이 로마서 11:7절에 나오고 나머지 3번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6:15와 11:33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성도는 믿음으로 얻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원한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히 4:2) 하나님이 은혜로 주십니다.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히 4:5-7).
성부 하나님이 선택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도록 우리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중보기도 하심을 의지하여 성부 하나님께 구원을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2) 무릎을 ‘꿇다’(캄프토, 4절 )와 등이 ‘굽혀지다’(신-캄프토, 9절)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자들은 등이 항상 굽게 될 것입니다. 장애인처럼 등이 굽어서 고통당할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신약에 4번 나오는데, 그 중 2번이 로마서에 나옵니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사 45:43)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롬 14:11, 빌 2:11).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찬양합니다(엡 3:14).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 두려움으로 무릎을 꿇지 맙시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예수님 재림의 그 날을 소망합시다. 어떤 우상적 경향이나 악과 핍박에도 무릎을 꿇지 맙시다.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오직 하나님께만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찬양합시다.
3) ‘내가 말한다’(1,11절)
이 표현은 사도가 성령님의 영감으로 교회에 새로운 계시의 말씀을 줄 때 쓰는 표현입니다. 특히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구원받아 교회의 지체가 되는 때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계시의 말씀을 전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그분의 성령을 사도에게 보내셔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유대인이 한 교회로 되면서 새롭게 생겨나는 문제들과 의문들에 대해 답을 주십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배우자 중 한 쪽이 믿지 않는 경우에 이혼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방인 사회에 복음이 전해 지기 전에는 교회에 속한 부부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부부들 가운데서 한 편만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부부가 이혼하리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명령한다’(고전 7:10)고 말합니다. 그러나, 원래 부부가 믿지 않다가 한 쪽이 믿은 경우에 대해서는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다’고 합니다(고전 10:12). ‘내가 말하노니’는 사도 개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고전 7:40) 자로서 말합니다.
오늘 로마서 11장에서도 사도는 ‘내가 말한다’(1,11절)고 합니다. 특별히 이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은 후에 가져야 할 생각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그분이 예언하신 대로 이 일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도 성령님은 사도를 통해서 이방인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25절)도 교회가 새롭게 세워지면서 새롭게 알아야 할 문제를 말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고 우상 숭배를 하다가 멸망한 것을 일깨웁니다. 이 일을 이방인의 우상 신전에 가서 제물을 먹는 것에 적용합니다(고린도 전서 10:1).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이방 지역으로 교회를 확장하시면서 주신 은사에 대해 가르칠 때 이 표현을 씁니다(고전 12:1).
사도가 ‘내가 말한다’는 엘리야가 말한 것(3절), 다윗이 말한 것(9절)을 계속 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구약 시대와 신약의 사도 시대에 계속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계시를 말씀하시는 것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귀히 여기는 교회에 목사를 통해 계속 가르치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말씀을 읽고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에게 성령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가정의 가장된 부모 여러분, 오늘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내가 말한다’고 하면서 말씀을 가르칩시오. 자녀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따라 말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이 선지자와 사도의 전통 속에서 계속 말합니다. 직장에서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나는 말합니다’고 말하십시오. 복음을 전할 때 뿐 아니라 복잡한 업무에 대해 말할 때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