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장 거룩, 특히 가정과 성의 거룩, 형제 사랑, 재림의 소망 가운데 기뻐하며 살아가라 2023-9-30, 토
작성자축제작성시간23.09.29조회수109 목록 댓글 0데살로니가전서 4장
거룩, 특히 가정과 성의 거룩, 형제 사랑,
재림의 소망 가운데 기뻐하며 살아가라
(찬송 시편 32편 – 악보는 맨 뒷장에)
2023-9-30, 토
맥락과 의미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갓 믿은 성도들로 이루어진 어린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그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도록 위로하는 편지입니다. 계속해서 거룩함에서 성장하라고 격려합니다. 가장 큰 위로는 이 땅의 수고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3장 모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짧게 언급하며 끝납니다.
4장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한 단락으로 길게 설명합니다(13-18절). 다음 시대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소망 가운데서 현재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4장은 원문에는 같은 단어를, “권면한다”, “권한다”, “위로한다”(1,10,18절) 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의 거룩함, 형제 사랑, 주님 재림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 4장의 내용입니다.
1. 음란을 버리고 각각 부부 안에서 거룩한 성을 누리라(1-8절)
2. 형제 자매를 더욱 더 많이 사랑하라(9-12절)
3. 먼저 죽은 성도가 먼저 부활한다는 사실로 서로 위로하라(13-18절)
1. 음란을 버리고 각각 부부 안에서 거룩한 성을 누리라(1-8절)
첫째, 거룩한 삶을 살라고 위로합니다. 이미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하고, 더 잘 하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바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음란을 버리고 가정과 성의 거룩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4절, 참 성도는 “음란을 버립니다.” 음란은 6절, “분수를 넘어” 하는 행동입니다. 자기의 아내와 남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탐하는 것입니다. 그 탐욕 때문에 경계를 넘습니다. 음란은 성적인 영역에 나타나는 탐욕입니다.
성도는 오직 “자기 아내를 취하라.” 여기서 아내는 아내에 대해 보통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릇”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여러 도움을 주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성적인 그릇의 역할입니다. 배우자의 몸 안에 하나님께서 성적인 즐거움을 담아 주셨습니다. 그것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거룩과 존귀함으로 취하라.” 한계 안에서, 부부 안에서 누리는 성은 참으로 존귀하고 거룩합니다. 성(性)은 거룩한 성도가 누리는 성(聖)스러운 것입니다. 그 그릇을 거룩하고 존귀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성을 품위없게 추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을 주님의 거룩한 성도로서 존중하면서 서로를 즐깁니다.
그러나 경계를 넘으면, 6절, 남의 그릇을 자기 그릇처럼 사용합니다. 형제를 해하기 때문에 반드시 “신원”, 곧 징벌하십니다.
음행의 더 중요한 문제는 사람과의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어기는 것입니다. 7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계속 죄를 지으라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8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저버림”은 거절하고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구원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성적으로 경계를 넘는 것은 다른 형제 자매의 가정을 파괴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끊어버리는 심각한 불행을 낳습니다.
성경에서 계속 성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대 시대보다 지금은 더 악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경계 없는 성을 즐거워하는 악한 문화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가 우리 사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복을 누리려면 우리가 결혼과 가정의 성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이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데도 숨기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형제 자매를 더욱 더 많이 사랑하라(9-12절)
둘째로, “형제 사랑에 관하여”(9절) “권하노니”(10절). 온 마케도니아 지역에 사랑의 소문이 났습니다. 구체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돈으로 구제하면서 사랑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원래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물질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자기 도시의 교회들뿐 아니라 마케도니아 지역의 많은 교회에게도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와 성령님은 다시 명령하십니다. 10절,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사랑하라.” 우리도 지금 사랑하고 있다면 더 사랑하고 더 희생합시다. 이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11절, “너희에게 명하노니 각각 자기 손으로 땀 흘려 일하라.” 교회에서 구제를 열심히 하니까 땀 흘려 일하지 않고 교회의 도움을 받는 교인도 생겨난 듯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궁핍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또 비기독교인에게도 단정하고 모범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땀 흘려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직업을 잘 수행하는 것을 기뻐합시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주위에 드러내길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전도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3. 먼저 죽은 성도가 먼저 부활한다는 사실로 서로 위로하라(13-18절)
세 번째, “자는 자들에 관하여” 위로합니다(13절). “자는 자”는 주님 안에 먼저 죽은 자들입니다. 그때 초대 교회 성도들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환영하러 나갈 것이다. 그런데 먼저 천국에 간 가족들은 이 환영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주님이 언제라도 오실 것으로 알고,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걱정이 있었습니다.
14절에 사도 바울이 응답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이것을 말한다.” 주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전합니다. 14,16절에, 예수님이 공중에서 구름 타고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장엄하게 오십니다.
그때, 이미 죽은 성도들의 몸이 먼저 부활합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처럼 변합니다. “홀연히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
살아있는 성도는 공중으로 끌어올려져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땅으로 내려옵니다. 새롭게 된 하늘과 땅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절,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도 이 기쁨에 참여합니다. 우리도 재림의 간절한 소망을 회복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는 육체를 가지고 오십니다. 언제라도 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께서 오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기대와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죽은 성도들은 이미 주님을 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그들과 친교를 나누시며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들의 몸이 부활할 것입니다. 다시 우리와 함께 육체를 가지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먼저 천국에 간 가족을 슬퍼하기보다, 주님이 주신 소망 가운데 즐거워합시다. 이 소망 가운데 거룩을 향해 나아갑시다. 형제를 사랑하며 수고하며 땀 흘려 일합시다.
믿고 복종할 일
오늘 본문에서 주신 세 가지 위로/권면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하는 결혼과 성 생활,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더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가족 관계가 더욱 거룩하고 완전해질 것입니다. 한 남자, 한 여자만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성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한 가족으로 삽니다. 아들 하나님을 우리 가문의 맏아들로 모시고 삽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우리 육체 안에서 풍성히 나타납니다. 배타적으로 두 사람 안에서만 즐기는 그런 육체적 성은 사라집니다.
또 거룩함으로 일할 것입니다. 계시록 22:3은 “종들이 그를(하나님과 어린 양을) 섬긴다”고 합니다. 섬기는 것은 ‘일한다’는 뜻도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은 계속됩니다. 노동(勞動, 괴로운 활동)이 아니라 희동(憙動, 즐거운 활동)이 될 것입니다. 예배와 가정의 즐거움이 회복될 것입니다. 노동의 즐거움이 주님 안에서, 삼위일체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온 교회가 완성된 예배, 완성된 가정, 완성된 직업을 누릴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이 찬양하며 즐거워하며 일하는 그날이 옵니다. 기쁨으로 소망하면서 주님 재림할 때까지 우리에게 주신 교회와 가족과 직업에 기뻐하고 고난 가운데 즐거워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영원한 나라는 위로가 영원하고 무한한 나라입니다. 기쁨이 무한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아직 옛 땅에서 고난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미 믿음으로 그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미래의 기쁨은 이미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혈 공로로 승리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합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권면한다/권한다/위로한다(파라칼레오, 1,10,18)
4장은 ‘파라칼레오’라는 단어를 권면한다/권한다/위로한다(1,10,18절)로 다르게 번역합니다. 성의 거룩함을 권면하고, 형제 사랑을 권하고, 주님 재림으로 위로합니다. 이 말로서 4장의 단락을 나눕니다.
<참고> 4절 아내=그릇(스쿠오스)
헬라어에서 아내는 ‘귀네’입니다. 그런데 그 말 대신에 “그릇”(스쿠오스)이라는 말로 아내를 표현합니다. 우리 말에 성에 관련해서 “기”(器-그릇)라고 쓰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참고> 성령님과 직분자와 위로
성령님은 “위로자/보혜사”(파라칼레토)이십니다(요 14:16,26, 15:26, 요일 2:1). 성령님의 위로(파라칼레시스) 가운데 교회는 건강하게 자랍니다(행 9:31). 또 초대 교회의 요셉은 위로가 넘치는 사람이었기에 “바나바”(위로의 아들)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 재산을 다 팔아 바쳤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자(집사 겸 복음 전도자)로 헌신했습니다.
<참고> 휴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 17절,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휴거, 携擧)
17절,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에서 “끌어 올린다”를 한자로 쓰면 휴거(携擧)입니다. 휴거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퍼져 있습니다.
잘못된 휴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은 사람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 어느 날에 조용히 그리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낙원을 누린다고 합니다. 그동안 땅에서는 큰 재난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은 사람들은 휴거 되지 못하고 땅에서 큰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성도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예수님 오실 때 혹시 나는 휴거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불안을 이용해서 이단들이 역사적으로 많았습니다. 한국에도 있어 왔습니다.
그런 잘못된 주장을 들으면 불안해하지 맙시다. 주님 재림을 기쁨으로 기다립시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 세 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재림과 성도가 하늘로 끌어 올려지는 것(휴거)은 조용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알게 큰 소리가 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16절에, 주님은 큰 소리로 호령하십니다. 천사장이 “하늘과 땅의 왕이 오신다! 어서 환영하라!” 하고 크게 소리칩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둘째, 하늘로 올려진 성도는 공중에 있지 않습니다. 새로워진 땅으로 주님과 함께 내려옵니다. 17절에 “끌어 올려”(휴거)에 이어서 “주를 영접”합니다. 영접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왕이나 귀한 손님이 올 때, 환영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다시 성 안으로 들어옵니다. 계속 성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땅으로 내려오십니다. 우리는 귀하고 귀하신 우리 주님을 맞으러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다시 내려와서 땅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주님과 함께, 우리는 새로워진 땅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이 땅 안으로 들어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주님의 보좌 앞에서 강이 흘러나오는 땅입니다. 성도들은 그곳에서 주님의 얼굴을 보면서 일합니다(계 22:1-5). 삼위 하나님의 보좌가 이 땅에 있으니, 하늘이 이 땅 위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 재림하시는 날은 성도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날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축제의 날입니다(계 19:6-9). 주님의 피 공로를 믿지 않고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불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양의 보혈 공로를 믿고 죄 용서받은 자입니다. 기쁨으로 고난 가운데서 거룩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날에 성도들은 “그들의 의로움”에 대해 상을 받을 것입니다(계 19:8).
“그때에 각 사람(성도)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수고했다. 이제 나와 함께 즐기자.”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이 변화되어 그 영광스러운 새 하늘 아래, 새 땅에서 기쁘게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