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 서론
1. 제목
‘열왕기’라는 제목은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다윗의 말년부터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끌랴기사 황제의 특전을 받은 일까지를 기록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지만, 왕조실록과 달리 선지자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신학적으로 반성하면서 쓴 책입니다. 특히 신명기에서 가르친 말씀을 따르는지의 여부를 중심으로 이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2. 저자와 연대
열왕기서의 저자는 알 수 없습니다. 고대 유대인의 전승을 따르면 예레미야가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는 열왕기하의 끝부분(24:18-25:21, 27-30)과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부분(52:1-27, 31-34)이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그렇지만 열왕기의 히스기야에 대한 부분은 이사야서와 비슷하기도 합니다(왕하 18:13, 17-20:19; 사 36:1-39:8). 따라서 본문의 유사성을 들어서 저자를 단정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최근에는 신명기와의 유사성 때문에 ‘신명기 학파’가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누가‘신명기 학파’에 속하는지에 대하여서는 통일된 의견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이라 하고, 다른 이는 예루살렘의 지혜자라고 합니다.
열왕기는 포로로 잡혀간 다음에 쓰였습니다. 물론 그 도중에도 “솔로몬의 행장”(왕상 11:41),“유대 왕 역대지략”(왕상 14:29, 15:7, 22:45; 왕하 14:18, 23:28),“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왕상 14:19, 15:31; 22:39; 왕하 14:15, 28) 등의 다른 문서들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최종적인 형태는 포로기 이후에 완성되었습니다.
3. 주제와 내용
열왕기는 왕들의 역사를 다루는데 ‘경제.정치적인 면’에서 왕조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면’에서 그 역사를 다룹니다.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오므리의 통치는 매우 간략히 다루고(옹상 16:23-26), 북이스라엘의 멸망 과정도 몇 절로 처리합니다(왕하 17:3-6; 18:9-12). 북이스라엘뿐 아니라 남유다의 멸망도 우상 숭배임을 지적합니다(왕하 24:1-4).
남조와 북조의 멸망은 군사력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외적들에게 넘기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왕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에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셨습니다. 이러한 징계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다윗과 세운 언약대로 징계하신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지속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삼하 7:14-16). 열왕기하의 마지막 장면은 여호야긴이 죄수의 옷을 벗고 바벨론 왕과 함께 식사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소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왕하 25:27-30).
1) 제사장권과 제사
열왕기에서 제사장 직분 혹은 성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주제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전 건축입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하며 싸우는 자였고(왕상 5:3-4), 그 땅이 안식을 누릴 때에 성전을 지을 것이었습니다(신 12:10-11). 다윗이 주위의 대적을 물리치고 그 땅에 안식을 가져왔을 때에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지었는데, 그것은 출애굽한 지 480년 후에 완성되었습니다(왕상 6:1). 성전을 지음으로써 출애굽의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 기도를 하면서 그들을 주님의 기업과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출애굽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왕상 8:51, 53. 참조. 출 19:5-6).
둘째, 산당 문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짓고 한 곳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지만 유다에서는 백성이 산당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등은 착한 왕이기는 하였어도 산당을 제거하는 일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산당을 제거하여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셋째는 ‘여로보암의 길’입니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않도록 하려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세웠을 뿐 아니라 예배의 장소, 시기, 제사장 등 네 가지를 바꾸었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습니다”는 말이 북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시므리는 7일간 통치하였지만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오므리도 유능한 왕이었지만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는 말과 함께 6절에서 간략히 언급되고 말았습니다.
넷째,‘바알 숭배’입니다.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 때에 바알 숭배를 도입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이 2계명을 어기고 금송아지 숭배를 도입하였다가 1계명을 어기고 바알을 숭배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바알 숭배를 도입한 오므리 왕조를 예후를 통하여 철저히 진멸하셨습니다. 그 시기에 엘리야와 엘리사를 보내어 바알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하셨고, 이 내용이 열왕기상 17장부터 열왕기하 11장까지 길게 서술되었습니다.
2) 왕권
열왕기 기자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지위로서의 왕의 역할에 관심이 있습니다. 왕들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앗수르에까지 알려진 오므리 왕은 여섯 절에 간략히 언급되었고(왕상 16:23-28), 북이스라엘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여로보암 2세도 역시 간략히 언급됩니다(왕하 14:23-29). 남유다의 여호사밧은 경건한 왕이었지만 주변 인물로 묘사됩니다. 아합과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왕이 율법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면 그 나라는 길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열왕기에서는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왕상 15:11; 왕하 18:3; 22:2) ‘다윗과 같지 아니하며’(왕상 11:4; 15:3; 왕하 143; 16:2)는 말과‘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습니다’(왕상 16:25-26 등)는 말이 왕의 통치를 평가하는 문구입니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습니다는 말은 20여 회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백성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중보적인 위치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왕권이 이렇게 강조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예표하는 것으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3) 선지자
열왕기는 왕들의 이야기이지만 중간에 선지자의 활동을 길게 적었습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주요 선지자로는 단연 엘리야와 엘리사이지만, 그 외에도 아히야(11:29-40, 14:5-18), 스마야(12:22-24), 미가야(22:8-28), 요나(왕하 14:25), 이사야(왕하 19:1-7, 20-34), 훌다(왕하 22:14-20)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이 왕들의 역사 중간 부분에 길게 나옵니다. 이들은 여로보암의 죄에 따른 것뿐 아니라 바알 숭배의 도입과 관련하여서 그들의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바알이’비’풍년’ 생명’의 신이라고 추앙되었는데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가뭄과 기근 그리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이적 등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에 나타내셨습니다.
둘째, 선지자의 말이 성취된 것을 중요하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 예를 들어서 강조합니다.
그러한 기록들을 보면, 벧엘에 있는 예배 장소에 대해서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 요시야라는 왕이 그 단을 부정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30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왕상 13:1-10; 왕하 23:15-16).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이 사자에게 죽었습니다(왕상 13:11-32).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들었을 때 아히야 선지는 그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말했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왕상 14:10-14; 15:28-29).
예후는 바아사의 집안의 멸망을 예언하였고 그대로 실행되었습니다(왕상 16:1-4; 16:10-12).
여리고를 건축하였던 히엘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대로 그의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왕상 16:34; 수 6:26).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대로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는 밀가루와 기름통이 비지 않았다(왕상 17:13-16).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사건 관련하여 네 가지 예언이 있었는데 모두 이루어졌습니다.(왕상 21:17-24; 22:34-38; 왕하 9:21-26, 30-37; 10:10, 17).
아하시야가 다락에서 떨어졌을 때에 엘리야는 에그론의 신을 찾아가는 그에게 죽을 것을 말했습니다(왕하 1:16-17).
엘리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 일들을 열왕기하에서는 주의하여 기록합니다(2:19-22; 4:42-44; 6:15-18; 7:1-2 등)
셋째, 신명기의 말씀이 열왕기에 자주 나옵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당부하는 장면에서도(왕상 2:1-4) 여호와께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지키며(신 6:2; 8:6; 11:1) 마음과 뜻을 다하여 지키고(신 4:29) 순종하는 자에게 주는 형통케 하심을 맛보라고 합니다(신 29:9).
솔로몬에 대한 평가의 기준도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왕상 11:2, 4). 이후의 왕들도 모세의 율법을 기준으로 그들을 평가합니다. 특히 신명기 28장의 언약의 저주가 열왕기에서 그대로 나옵니다. ‘질병’(신 28:21-22; 삼하 24장),‘한발’(신 28:23-24; 왕상 17-18장),‘사람의 고기를 먹음’(신 28:53-57; 왕하 6:24-30),‘포로로 잡혀감’(신 28:36-37, 49-52; 왕하 17:24-32; 2518-24) 등이 열왕기에 나옵니다.
4) 하나님과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조망
제사장, 왕, 선지자 등 세 가지 직분으로 나누어서 열왕기의 흐름을 살펴보았는데 세 직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고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를 조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구별된 분입니다. 금송아지와도 구별되고 바알과도 구별된 분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분으로서 언약의 복과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솔로몬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신실함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둘로 나누셨습니다.
열왕기는 악순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사사기의 혼란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심판하는 데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저주를 내리면서도 그 언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이야기한 것뿐 아니고 솔로몬이 기도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할 때 그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회개하고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왕상 8:46-50). 여호와는 그의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는 분입니다(왕상 18:37). 따라서 그분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행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호야긴이 높아진 이야기로 열왕기서가 마무리되는데, 그가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4. 문예적 특징
1) 신학적 관점의 평가
열왕기는 왕들의 통치를 서술하되 정치적이나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하여 평가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모두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금송아지를 섬겼기 때문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고 평가합니다. 남유다의 왕은 두 왕, 곧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모범적인 왕으로 칭찬을 받고, 여섯 왕은 ‘산당을 폐하지 않았다’는 조건을 붙여서 칭찬을 받고(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나머지 왕들은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이때의 기준은 다윗의 길로 행하였는지의 여부입니다.
신학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왕의 재위 기간과 서술의 분량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므낫세는 55년을 다스렸지만, 그에 관한 서술은 18절으로 국한됩니다(왕하 21:1-18). 반면 요아스 왕 18년째에 있었던 개혁은 41절에 걸쳐 상세히 언급됩니다(왕하 22:3-23:23). 7일을 다스린 시므리에 대한 기록(왕상 16:15-20)은 12년간 통치한 오므리(왕상 16:21-28)나 52년을 다스린 아사랴(왕하 15:1-7)과 비슷합니다. 오므리 왕은 앗수르의 연대기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왕이지만 열왕기에서는 매우 간략히 묘사되었습니다. 언약을 중심으로 서술한 열왕기의 관점에서는 외적인 번영과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