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2장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한 성도를 차별 대우하지 말고, 사랑을 행함으로 믿음의 생명을 누리며 살자 2023-11-9, 목
작성자축제작성시간23.11.08조회수66 목록 댓글 0야고보서2장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한 성도를 차별 대우하지 말고,
사랑을 행함으로 믿음의 생명을 누리며 살자
(찬송 449장)
2023-11-9, 목
맥락과 의미
야고보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용서 받았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을 야고보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야고보서는 사람의 행함이 의롭다 함을 받는 공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은혜를 믿을 때 의롭게 되고, 그 결과로 행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야고보서의 전체적인 가르침입니다.
2장에서 믿음의 열매로 행함이 나타나야 할 것을 두 가지 경우를 통해서 가르칩니다. 두 주제는 “내 형제들아”(1, 14절) 하는 사랑의 음성으로 시작합니다.
1. 차별 대우하지 말라(1-13절)
2.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 (14-26절)
1. 차별 대우하지 말라(1-13절)
1-4절: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광의 하나님이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오셨습니다(요한복음 1:14).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계속 봅니다. 영광으로부터 영광으로 나가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합니다(고린도후서 3:18).
이 영광은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경험하는 공동체적 영광입니다. 구약 성막과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출애굽기 40:34,35, 열왕왕기상 8:11). 참 성전인 그리스도(요한복음 2:21)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성전 된(고린도전서 3:16,17) 교회 안에 그 영광이 가득합니다(고린도전서 11:7,15).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교회(2절)가 모일 때 영광스럽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옷을 잘 입은 부자에게는 높은 자리를 주고, 가난한 자는 낮추고 차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일을 슬퍼하며 말합니다. “여러분 성도끼리 서로 차별하고 판단하는 것”(4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5절: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여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약속하신 하나님의 새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부유한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높아졌지만, 그리스도 앞에서 항상 “가난한 교회”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20). 교회에서 우리는 가난한 성도와 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나눕니다. 우리가 평등을 이루도록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8:9,13).
6-7절: 그런데도 야고보서를 받는 교회가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원래 세상에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무시합니다. 심지어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 법의 이름으로 그들의 재산을 뺏기도 합니다.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세상의 관습을 교회가 따라서는 안 됩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부끄럽게 하는 것은, “너희에게 대하여 이름이 불리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성도에 대한 차별 대우(9계명, 이웃을 행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일입니다(3계명).
8-9절: 성경의 여러 명령 가운데 “최고의 법”이 있습니다. “왕국의 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나라”(왕국, 5절)를 상속받은 교회에 그것을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하라는 법입니다. 구체적인 율법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계명을 지킬 때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도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9절, 가난한 성도를 무시하면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1,9절) 하나님의 법을 어긴 범죄자가 됩니다.
10-13절: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성도에게는 율법이 새로운 역할을 합니다.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에게 참 자유를 줍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때문에 죄를 심판하지 않고 긍휼히 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양심의 자유를 누립니다. 이 자비하심과 자유를 받은 자로서 성도는 말도 하고 행동도 합니다.
성도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선한 일을 기쁨으로 하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사람도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서 존중받습니다. 자유롭게 살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도 참으로 존중하고 자유를 누리게 하는 교회와 성도는 그 자신도 자유와 자비를 함께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으니, 우리도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행함으로써, 다 함께 자비하심을 충만히 누립시다.
2.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14-26절)
14-17절: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14절). 생명을 주지 못하므로 죽은 믿음입니다(17절).
예를 들어, 옷이 없어 헐벗고 양식이 없어 굶주린 형제자매에게 말로만 “평안히 가시오, 따뜻하게 하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행함이 없다면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행함이 있을 때 그 말의 유익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결과로 행함이 있을 때, 믿음으로 인한 유익이 있습니다. 나아가 사랑의 행함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참 믿음은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18-20절: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마귀도 하나님은 한 분인 줄 알고 두려워 떱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복종하지 않습니다. 복종의 행함이 없다면, 사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아, 헛된(허탄한) 사람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복종하는 행위가 없는 사람은 믿음의 고백의 실상이 없으니 “헛된 것”입니다. 참 믿음은 복종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21절: 복종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참 믿음을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6에서 하나님이 자손과 땅의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여 믿어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네 아들을 나의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실 때에도, 아브라함은 역시 하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습니다. 그의 순종하는 행함 속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22절: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합니다(행합니다). 행함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온전함을 이루었습니다. 믿음은 마음과 입술의 고백에서 시작하지만 그 믿음대로 행하는 일에서 행함이 온전해집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브라함도 믿음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23절: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온전히 성장하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친구는 중요한 것을 서로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세기 18:1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행하여서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또한 소돔 고모라는 멸망시킬 것을 말해주셨습니다(창세기 18:18-21).
24절: 아브라함의 복종하는 행동을 통해서 볼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항상 함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 인정하신다.”
25-26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반드시 사람을 향한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입을 것, 먹을 것을 주는 등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16,17절).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기생 라합입니다. 그녀는 정탐꾼이 숨고 유숙할 장소를 제공했습니다. 그녀의 사랑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음을 보였습니다. 사랑 안에 나타난 그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는 “성령을 따라 믿음의 소망을 기다리며 ...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얻습니다(갈라디아서 5:5,6). 라합은 여리고 성의 백성과 함께 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17절)를 26절에서, 마지막으로 반복합니다.
믿고 복종할 일
그리스도는 그분의 보혈로써 우리 죄를 용서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시고 낮아지셨습니다.
이 큰 은혜를 받게 하신 그 믿음대로 어떤 환난이나 유혹이 오더라도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대로 순종합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성도를 존중합시다. 그들의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눕시다. 사랑을 통해 믿음의 행동을 합시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소망했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행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그런 나라를 우리는 약속의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를 하면서 그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계속 행합시다.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이 은혜를 주신 이유는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정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10).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셔서 이제는 선한 일을 하는 새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믿음과 사랑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되어가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의 나라를 향해 나갑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행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열매: 행함이 구원의 공로가 아님, 로마서, 히브리서, 베드로전서의 맥락에서 야고보서를 읽어야 함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타락한 교회는 믿음에 더하여 사람의 행위가 구원을 얻는 공덕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22.24절). 이 말씀을 두고 로마교는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일해서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로마교로 모인 트렌트 공회(1546-63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향해 자유에 의해 동의하고 그것과 협력함을 통해서” 칭의를 향하여 돌아선다고 합니다(로마교의 트렌트 공회 제6회기 5장). 사람의 자유의지와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협력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라합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구원을 향해 나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사람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한 것은 아닙니다. 은혜의 결과로 자유의지가 움직인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가 은혜와 함께 협력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조건적으로 믿는 믿음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함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의 행함의 중심에는 자기의 선행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선한 행동은 죄용서 받고,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 위에서 발전되는 것이라는 것은 로마서와 비교해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로마서는 1-4장까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됨을 가르칩니다. 5-8장에서 화목하게 된 자로서 하나님 안에서 평화와 성령 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의의 열매를 맺는 축복을 계속하여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은 로마서 5장을 이어갑니다. 로마서 5:1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 (이제 그것에 기초하여)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화평은 번성, 생명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5:3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틀립시스)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카우오마이) 이는 환난은 인내(휘포모네)를, 인내는 연단(도키마조)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카타-에르가조마이) 줄 앎이라.”
야고보서 1:2, “여러 가지 시험(페이라스모스)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카라)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도키미온)이 인내(휘포모네)를 만들어내는(카라-에르가조마이) 줄을 너희가 앎이라.”
같은 단어를 세 개, 비슷한 단어를 두 개나 씁니다. 연단/시련은 생각 속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일하셔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카타-에르가-조마이). 하나님이 먼저 행함(에르곤)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3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곧 인내가 온전한 일/행위(텔레이온 에르곤)를 가지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온 성도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함께 성도의 행함이 나옵니다.
믿은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고난의 불 가운데서 계속 인내하게 하고 단련시키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먼저 하나님의 행위이며 그 결과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하기 때문에 행함의 열매가 따라 나옵니다.
믿음은 “삼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며 물로 세례받을 때, 삼위 하나님은 성령세례를 동시에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님의 불꽃 안에서 고난을 통해 연단받고 단련받습니다.
단련/연단받기 위해 행동하고 일하는 것이 로마서(5:4, 도키메), 히브리서(3:9, 도키마시아), 야고보서(1:3, 도키미온, 1:12, 도키모스), 베드로전서(1:7, 도키미온)의 주된 주제입니다.
행함과 단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신약 성경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로마서, 히브리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용서 받는 것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실로부터 행함이 나옴을 가르칩니다. 이들 성경책 가운데 야고보서를 두신 성령님과 교회의 뜻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로 죄용서 받고 의롭게 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성장합니다. 훈련 코스를 걸어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믿음의 한 요소요 열매로서의 행위를 말합니다.
야고보 선생뿐 아니라 바울 사도도 행함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역사(에르곤)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데살살로니가전서 1:3). 믿음은 행함으로 나옵니다. “성령을 따라 믿음의 소망을 기다리며... 사랑으로 역사하는(엔-에르게오) 믿음”으로 자유를 얻습니다(갈라디아서 5:5,6).
성령님은 야고보서를 성경의 한 부분으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성경의 전체 맥락 가운데서 야고보서를 읽어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서 “믿음으로만 구원받지 않고 사람의 행동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책읽기의 기초도 모르는 유치한 사람입니다. 그 유치함으로 거짓된 주장을 하는 것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는 성급함 때문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교만입니다. 교만 때문에 거짓에 빠진 사람은 선하게 살려는 의지가 강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선한 행동에도 죄가 물들어 있기에, 자기 안의 죄악을 볼 때 그들은 죄악이 없는 것처럼 덮어버립니다. 혹은, 죄악을 주체하지 못해서 죄책감과 깊은 양심의 고통에 빠질 것입니다.
무지를 만들어낸 그 교만 때문에 스스로 고통에 빠지는 자들의 헛된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맙시다.
<참고> 2절, 회당(시나고게)
교회라는 말 대신에 “회당”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는 회당에서 모이던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아직 널리 전해지지는 않고 유대인에게 전해질 시점에 쓰인 편지로 보입니다.
<참고> 8절, 최고의 법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 되는 내용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36-40, 로마서 13:8-10, 13:8-9).
“최고의 법”은 말 그대로의 뜻은 “왕국의 법”(노모스 바실리코스)입니다. “그분의 나라”(바실레이아, 5절)를 상속받은 교회에 주셨습니다.
<참고> 22절,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됨
22절,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에르곤)과 함께 일하고(신-에르고), 그 행함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온전함을 이루었습니다(텔레이오오).”
히브리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히브리서 6:1-2, “회개, 믿음 세례, 부활, 영원한 심판 등에 대한 말씀의 초보(시작)에 머물지 말고 온전한 데(텔레이오테스) 나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고(텔레이오오)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5:9).
그분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성도)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히브리서 10:14).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브라함도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