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교제
고후 13:11-13 (하늘에 가득 찬)
2022,6,12,관악교회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ἀπεκδέχομαι우리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다(히 9:28).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면, 우리의 낮은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할 것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우리는 믿음을 지키면서 재림을 기다리고 고대해야 한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간다(눅 20:9). 포도원의 주인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주님은 성부에게 하늘과 땅이라는 포도원을 상급으로 받았다. 왕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자기 피와 부활로 새롭게 하셨다. 우리를 자기 신하로 삼아 포도원을 맡기셨다. 우리는 포도원 농부로 이 왕의 신하답게 천지를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이 일에 성령님의 능력과 도우심이 절실하다.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교제, 엄청난 복이다. 그런데 이 복은 왕의 신하답지 않게 살고 있는 고린도교인들을 향한다. 이들은 다툼, 시기, 분냄, 패거리를 짓고 비방하고 수군거리고 거만하고 무질서에 절어있다(12:20-21). 꾸중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성자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제가 있어야 꾸중도 감당할 수 있다.
우리도 포도원을 맡아 튼실한 포도를 수확하기 위하여 은혜와 사랑과 교제를 받아 누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중에는 꾸중 받을 일이 없는지 잘 살펴보자.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교제
I. 성자 예수님의 은혜
II. 성부 하나님의 사랑
III. 성령님의 교제
사도는 13:11절에서 기뻐하라고 권한다. 온전하게 되어라. 위로를 받으라. 마음을 같이 하라. 평안을 누려라.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리라. 사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권면한다. 회초리를 들지 않고 모든 좋은 말씀으로 선대하면서 편지를 마친다. 그냥 나온 말씀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에 필요한 말씀이다.
1. 기쁨과 은혜는 밀접하다. 은혜는 기쁨이 없는 곳에서 기쁨을 창출한다. 양 백 마리를 가진 어떤 사람이 한 마리를 잃었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자 99마리를 빈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헤맨다. 한 마리를 찾았을 때 기뻐한다χαίρω. 집에 돌아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잃어버린 양을 찾은 과정을 말하면서 함께 기뻐한다(눅 15:6).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를 불쌍히 여긴다. 그에게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εὐφραίνω(눅 15:23,24), 기뻐한다χαίρω(눅 15:32).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는 형에게는 죽었다가 살아난 동생이며, 아버지에게는 잃었다가 도로 찾은 아들이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 때문에 기뻐한다. 기쁨은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것, 잃었다가 도로 찾는 것, 구원이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엡 2:5) 은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여 주신 모든 일을 지칭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희생으로 우리를 위한 은혜를 쟁취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다. 그때에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고 하셨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습니다.”(요 18:8-9; cf. 6:39)는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체포되셨다. 붙잡힌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 기쁨인가? 이 고난의 잔을 그는 그냥 지나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죄와 허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 성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일, 찔리고 상하고 채찍에 맞음으로 이루신 일이다. 고난을 거쳐야 하는 이런 은혜의 사역이 과연 기쁜 일인가?
기쁜 일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기쁨은 아픔을 수반한다. 송아지를 잡아야 잔치를 즐길 수 있듯,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수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기쁨을 얻는다. 부활과 승천과 우편 좌정의 기쁨이다. 이 기쁨은 예수님 자기만을 위하지 않고, 우리에게 은혜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놓임을 받았다. 아니 그리스도와 함게 다시 살아났다!
죽은 자에게는 고난이 없다. 산 자만이 고난을 인내함으로써 생명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은혜는 고난을 통한 기쁨이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거둔 많은 열매이다. 은혜로 새생명을 얻은 열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을 용서한다. 은혜에서 감사와 용서가 나온다. 은혜를 받은 우리도 고난 중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 용서라는 말 속에 ‘은혜’가 들어있다. 은혜받은 자만이 은혜를 베푼다. 죽은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죄와 허물에서 은혜로 놓임을 받아 다시 산 자만이 받은 은혜로 남에게 은혜를 베풀며 용서할 수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6:17, 7:25; 고전 15:57; 고후 2:14, 8:16, 9:15;딤전 1:12; 딤후 1:3; 히 12:28). 이 감사 속에는 은혜라는 말이 들어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골 3:16).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εὐχαριστέω.”(골 3:6하-17)
왜 그리스도의 은혜가 먼저 나오는가? 예수님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문이다. 하나님을 본 자는 없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나타내셨다(요 1:18). 독생자는 자기 아버지를 가르치고 보이셨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προσαγωγή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2. 은혜는 그 배경이 사랑, 선택적 사랑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보내심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특이하게도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는 은혜라는 말보다는 사랑이라는 말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
예수님은 자기 희생의 은혜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부활시키시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5-6).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기 전에, 자기 아드님을 먼저 사랑하셨다. “창세 전부터 사랑하셨다.”(요 17:24) 세례와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임한 아버님의 음성은 분명하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17:5; cf. 엡 1:6!). 아버님은 아드님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요 3:35). 그 만물 중에는 자기 백성이 들어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자이다.
예수님은 아버님의 사랑을 먼저받은 자이시다. 아버님의 사랑은 아드님에게 임하여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아드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요 17:23). 아버님의 사랑은 예수님에게 임하였고 십자가의 은혜로 나타났다. 십자가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우리에게 베푼 예수님의 은혜의 결정판이다.
은혜의 배경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행위의 배경은 불쌍히 여김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리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눅 10:33). 짐승 위에서 내려 강도 만난 자를 만지고 치료하는 자비(37)의 행위, 곧 사랑이다. 탕자의 아버지도 그를 불쌍히 여겼다(눅 15:20).
그런데 이 사랑은 선택적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택한 종 곧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바 그가 사랑하는 자이다(마 12:18; 사 42:1 인용). 이 사랑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었다(엡 1:4). 우리가 이 사랑을 깨닫는 것은 멀고도 멀다.
사랑 받은 자만이 사랑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1-12)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생을 얻은 산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이렇게 은혜와 사랑을 받아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가 교제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 하나님이시다.
3. 성령님의 교제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청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고 응답하셨다. 이 예수님이 승천하셨다. 이제는 성부를 보여주시는 성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눅 24:52-53). 예수님은 성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확인하셨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교제의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의 교제, 이 표현은 아주 특이하다. 예수님의 은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얻은 은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 역시 아버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말한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교제는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교제이다(빌 2:1).
성령께서 베푸시는 교제가 무엇인가? 교제는 참여를 말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여하게 하신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주신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성찬을 말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 그냥 떡이 아니고 그냥 포도주가 아니다. 승천하셔서 성부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이 일을 성령께서 행하신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은혜에 교제하고 참여하게 하신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롬 6:3). 그렇게 하여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신다(4). 누가 이 일을 하시는가?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신다.
또 바울은 자기의 설교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고백한다(고전 2:4).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여 주신 은혜, 그 배경인 하나님의 사랑,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다(롬 5:5). 성령님은 설교 말씀과 세례와 성찬을 사용하여 이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다. 이처럼 성령님은 연결고리이다(엡 4:3 참고). 말씀과 성례로 이루어진 예배에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 교제한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요일 1:3)이다. 우리끼리 교제한다. 이 교제를 성령께서 이루신다. 예수님의 은혜는 성부와 우리를 연결시키며,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은혜, 성부의 사랑과 연결시키신다. 성령은 은혜의 그리스도와 사랑의 성부께 참여시킨다.
성령님께서 교제로 하나님을 사랑을 받게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성령께서 교제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하실 때에, 은혜를 감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곧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기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온전하게 된다. 위로를 받는다.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다. 평안을 누린다. 그럴 때 은혜로 연보하여 어려운 형제자매들을 돕는다(8:1).
말씀을 맺겠다. 고린도 교인들은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아들처럼, 사도 바울에게 저항하였다. 그래도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면서도 은혜와 사랑과 교제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선언한다. 이로써 우리는 늘 죄와 싸우면서 주님의 신하로서 주님의 포도원에서 맡은 일을 감당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대비하라!
“우리 구주 하나님의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