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개요
I.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증거
1. 유산을 포기하고 장래의 유산으로 (8절)
2. 유목민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도시를 소망 (10절)
3. 이방 땅에서 약속을 동료들과 함께 확신 (9절)
II. 우리의 믿음
1. 낙오하지 않음 (10:38-39)
2. 담대함 (10:35)
3. 인내 (10:36)
III. 믿음의 주
1. 우리 믿음의 주관자: 예수 그리스도 (12:1-2)
2. 우리 믿음의 실체: 살아계신 상 주시는 하나님 (11:6)
3. 삼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 하늘 (11:16)
생각할 문제
1. 히브리서 11장 8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행은 어떤 것입니까? 장래의 유업은 무엇일까요? 장래의 유산을 받을 땅에 나가는 사람의 특징은?
2. 히브리서 11장 10절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까?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며 그의 바라는 것과 그의 현실을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3. 히브리서 11장 9절에서 약속의 땅에 정착해서 사는 아브라함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이삭과 야곱이 아브라함에게 주는 영향력을 무엇입니까?
암송구절
히브리서 11:8
I.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증거
우리는 이미 창세기를 통해서 아브라함을 잘 압니다. 우리는 그의 인생의 길을 꽤 상세히 알 수 있는데 창세기에서 상당히 상세히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의 생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youtube 채널을 운영하신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채널에서 조회수가 가장 많은 아브라함의 동영상을 압축해서 shorts까진 아니라 해도 다른 각도에서 편집한 동영상을 제작한다면 그러면 아마도 히브리서 11장 8-10절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창세기 아브라함의 상세한 이야기를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관심의 중심은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8절과 9절에 처음 시작은 믿음으로입니다.
1. 유산을 포기하고 장래의 유산으로 (8절)
8절에서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서 전진하기로 나가기로 순종했다, 나갔는데 가는 곳을 사실은 알지 못하고 나갔다...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간결하게 말합니다. 이 일은 창세기 11장 27-12장 5절까지와 더 깊이 연관되어 보입니다.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이 그가 순종하여 걸어 나갔던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업은 유산입니다. 아브라함이 장래에 받을 유산, 가나안이라고 하는 땅을 투자가치를 잘 따져보니 수익이 나올 것 같아서 거기로 나갔다? 이런 의미일까요? 어쨌든 유산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상들의 것을 공짜로 얻는 것입니다. 유산이라고 하니 아브라함에게는 어쨌든 이익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라는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숙부, 조카 가족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이라는 곳에 정착합니다. 여기서 좀 헛갈리는 진술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언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창세기 11장 31절을 보면 이들이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이미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는 목적 하에 하란이라는 도시에 정착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1-4절에는 이를 뒷받침합니다.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 곧,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이미 영광의 하나님이 보여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 곧 가나안으로 가라는 부르심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창세기 11장 27절이하는 어떤 이유인지 설명하지 않고 일단 하란까지는 왔고 하란에서 본토, 아비, 친척집을 떠나라는 부르심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히브리서는 언제 부름이 있었는가보다 “장래의 유산”에 주목합니다. 아브라함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갈대아의 우르, 하란 이 두 도시는 고대의 유명도시입니다. 요즘 같으면 뉴욕과 로스엔젤레스 같은 대도시입니다. 이들은 당연히 이 두 도시에서 부동산을 소유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기에 정주해서 집을 가지고 사는 거류민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들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왔을 때 혹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 가나안은 무명 지역입니다. 읍면도 아닌 시골에 보시면 무슨 리 정도로 전혀 인지도가 없는 땅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 혹은 하란에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땅, 가족, 일가를 뒤로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이유가 장래의 유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산은 공짜로 얻는 것이지만 갈대아의 우르나 하란 뉴욕, 로스엔젤레스에 살았다면 그가 받을 유산을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으로 가면 사실상 이 유산이 모두 사라집니다. 가나안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고 이들이 소유한 땅은 1제곱미터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장래의 유산? 가나안 땅에서 그런 물리적 땅을 유산으로 받을 것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현실입니다.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의 자산, 가족친지들로부터 받을 유산이 없어졌습니다. 유산이 될 지도 거의 불확실한 장래의 유산을 향해 나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손해지만 약속이 현재의 현실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실현될 것인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가나안 땅에 소유한 땅 한 평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산 자체가 어떤 내용인가가 아니라 유산을 주는 주체입니다. 이들에게 가나안이라는 장래의 유산은 유산이 가지는 가치가 아니라 유산을 주시는 분, 바로 영광의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자녀에게 유산을 주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겐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값비싼 유산, 혹은 이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다 줄 수 있는 인맥, 가족과 친척으로부터 나와서 전혀 아무런 유산이 될 수 없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한다면 이 믿음을 결정하는 것은 유산이 가진 가치나 효용성, 확실성이 아니라 유산을 주시는 분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현실 혹은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가능성이 아니라 유산을 주실 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에 가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순종하여 그곳을 향하는 과감한 발걸음을 걷는 믿음의 행동이 동반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약속의 차이: 현실-유산 전체를 잃어버리고 주어질 유산도 확실하지 않음
약속-유산을 주실 영광의 하나님
현실=믿음-하나님이라는 유산 주실 분이 가나안 땅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던 그가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간다.)
2. 유목민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도시를 소망 (10절)
10절에서는 땅을 넘어서 땅위에 들어설 성, 도시를 제시합니다.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정착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유목민으로 살았습니다. 정착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히브리서는 현실에서는 평생 유목민 아브라함에게 도시가 약속되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한 번도 도시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정착하기 위해서 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거나 도시를 만드는 재료들을 모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도시가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현실에서는 보지 못한 도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이란 도시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동시대에는 멜기세덱이 왕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이 도시를 중심으로 왕국을 세웠지만 이 도시는 왕들과 백성들의 죄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세운 도시가 되지 못했습니다. 도시는 후대에도 그 실체를 완전히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가 말하는 하나님이 건설하실 도시는 12장 22절에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아브라함의 현실은 유목민입니다. 정착이 안정과 풍요를 가져다 주지만 그것은 꿈만 같은, 비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건설한 도시를 약속했습니다. 현실에는 땅도 없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실 도시, 하늘의 예루살렘을 소망하면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현실과 약속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지만 믿음은 이 간극을 없애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도시, 하늘의 예루살렘을 현실 삼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3. 이방 땅에서 약속을 동료들과 함께 확신 (9절)
9절에는 약속의 땅을 말하는데 가나안 땅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정착한 것 같았지만 현실은 이방의 땅처럼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그것이 그의 현실입니다. 이삭과 야곱에게 줄 유산이 있었는데 그것은 물리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이었습니다. 현실에는 없는 유산을 자녀에게 물려줄 셈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유산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제시한다면? 허탈하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공동의 유산이 있었습니다. 실체가 없는 유산입니다. 오직 이 유산을 주시는 분만을 의존하는 믿음에만 존재하는 유산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세 사람이 모두 함께 이 유산을 공유했다고 말합니다. 이 3대는 공동 유산 상속자들입니다. 아브라함 혼자만이 아니라 약속을 유산으로 함께 받은 신앙의 형제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부자지간이지만 공동 유산인 약속을 함께 소유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3절을 보면 이렇게 함께 유산을 소유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서로가 동정하고 소유를 빼앗길 때도 함께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것을 아는 동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약속을 주십니다. 약속된 유산, 약속된 땅, 약속된 도시가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현실에는 유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약속된 도시를 소망하지만 도시는커녕 어떤 땅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유목민, 이방인, 나그네입니다. 약속과 현실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있습니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라는 것이 실재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가 있습니다. 그 실재는 믿음 속에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증거해 주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믿음은 약속의 내용, 약속된 땅, 약속된 유산, 약속된 도시가 아니라 약속하시는 분에게 올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면서 그 약속을 보증해 주시기 때문에 믿음은 땅, 유산, 도시, 자녀라는 약속의 물리적인 내용이 아니라 약속하시는 분께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II. 우리의 믿음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우리의 믿음으로 시선을 이동합니다. 하나님의 유튜브 채널에서 압축된 동영상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youtube 채널이나 내가 follow하는 sns는 내가 유익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열심히 구독하고 시청하고 follow하면 실용적으로 유익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시청하는 채널이 혹은 follow하는 sns가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경우도 생깁니다. 우리의 가치판단, 인생에 대한 결정, 중요한 원칙까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단지 외형적인 것, 실용적이 이유 때문에 follow 했는데 어느덧 그 sns가 암시적으로 전파하는 사상, 가치관, 행복, 삶의 목적이 은연중에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손, 땅, 유산, 도시가 약속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상속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상속을 함께 하는 자로서 연결됩니다.
로마서 8장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성부가 성자에게 넘겨주신 모든 유산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로서 그리스도와 같이 상속하는 상속자입니다.
이는 교회건설의 약속 안에서 확인됩니다.
성부는 성자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유산을 상속받아 교회건설안에이 우리와 함께 이 유산을 공유하십니다.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1. 낙오하지 않음 (10:38-39)
믿음은 10:38-39에서 낙오하지 않음, 이탈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우리 교회의 현실은 약속해 주신 말씀에 턱 없이 부족합니다. 우리 가정의 믿음도 우리 자녀들의 신앙상태도 불확실해 보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났던 기근이나 기근 때문에 이방 왕들에게 가서 당한 여러 수치를 만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살아가기 위해서 경제적 부족, 사람들 관계에서 어려움에 그저 허덕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기도 전에 우리 삶의 무게 때문에 이리 저리 방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길에서 우리는 낙오하거나 이탈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꾸역꾸역 자리를 지킵니다. 약속과 현실사이에서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약속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현실에 파묻혀서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뒤로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주신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현실 속에 없는 약속을 믿음안에서 현실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안에서는 약속이 현실이 되기 때문에 이 약속에서 현실로 이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담대함 (10:35)
담대함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가지게 된 태도입니다.
히브리서 4:16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담대함을 우리의 일상에서도 간직하는 것입니다. 여유있고 자신감을 가집니다. 그런데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소유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이라는 분이 주신 약속 때문에 우리는 불안하거나 조급하지 않고 여유 있으면서도 긍정, 낙관, 기쁨 속에서 담대함을 가집니다. 원래 담대함은 기탄없이, 거리낌없이 그 어떤 주저도 없이 대중앞에서 과감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태도를 의미했습니다. 현실은 항상 ups and downs합니다. 그런 현실속에서 우리는 약속을 가졌고 그것이 우리의 참된 현실이기 때문에 이런 담대함을 잃지 않습니다. 현실과 약속사이의 간극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우리에게 상속된 유산을 다 소유한 자의 확실성 곧 담대함이 우리의 현실이 되게 합니다.
3. 인내 (10:36)
마지막으로 믿음은 인내입니다. 우리의 인내력이 강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약속 때문입니다. 굳건한 하나님의 약속이 현재의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확고하고 확실합니다. 그 분께서 주신 약속을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III. 믿음의 주
1. 우리 믿음의 주관자: 예수 그리스도 (12:1-2)
2. 우리 믿음의 실체: 살아계신 상 주시는 하나님 (11:6)
3. 삼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 하늘 (11:16)
마지막으로 믿음은 약속을 주시는 분 때문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먼저 약속을 주신 성부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11장 6절에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분이 계신 것 때문에 현실과 약속사이의 간극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 분께서 인내에 대해서 상주시는, 약속을 주시는 주체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집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우리 앞서서 믿음을 길을 시작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생 길의 기초를 놓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 믿음의 길을 완주하시고 우리를 완주하도록 종결지으실 분입니다. 그 분은 마라톤과 같은 믿음의 여정에서 내 앞에서 뛰어주시는 선두주자로서 피날레까지 동반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마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코치하면서 함께 하실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직접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달리신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피날레, 목적지에 서 계십니다.
예수는 길과 진리, 생명입니다. 그 분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 하늘에 들어갑니다. 11장 16절에 우리가 사모할 도시는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삼위 하나님이 계신 곳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삼위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와 그 우편에 서 계신 성자와 하늘로부터 오고 계시는 성령 삼위가 우리가 목적지로 삼고 있는 바로 그 약속 그 자체가 되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