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31편
젖먹이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주님 품 안에 거하며 누리는 평안
(찬송 23장)
2023-2-4, 토
맥락과 의미
시편 120-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123편부터는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릴 때의 심정을 노래합니다.
129편에서는 이방 민족들의 핍박 가운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지키심을 말했습니다. 130편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둘 다 고난 가운데 주님의 구원을 바라는 노래였습니다. 131편은 구원받은 백성의 평안한 심정을 노래합니다. 어머니 품에 아기가 안겨 있듯이,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고 합니다.
1. 말씀에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자(1절)
2. 어미 품에 안긴 아기와 같이, 하나님 품에서 온전한 평안을 누리자(2절)
3. 온 이스라엘이 영원히 하나님 품 안에서 보호받자(3절)
1. 말씀에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자 (1절)
시인은 세 가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다짐합니다. 첫째는 마음이 교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만은 마음을 높여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낫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교만한 사람이 남 유다 왕 웃시야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마샤는 반역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웃시야는 16세라
는 어린 나이에 백성들에 의해 추대되는 형식으로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대하 26:4-5). 유다를 강성하게 하셔서 주변 민족들을 정벌하셨습니다.
웃시야의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아버지의 불행한 운명을 보고 교훈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침범하여서 성전 향단에서 분향하려 했습니다. 제사장 아사랴와 다른 제사장들이 와서 웃시야를 가로막았습니다. 웃시야 왕과 제사장들 사이에 분향을 한다 만다 하고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웃시야를 벌하셔서 나병을 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나병환자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다시는 성전에 다시는 나갈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과 제사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 큰 교만입니다. 그런 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시인은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둘째는, 눈이 오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만한 것은 자기 눈을 높이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 앉아서 마치 자기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웃을 깔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잠언 30:13-16에서는 눈이 높은 자의 특징을 묘사합니다. 이들의 앞니는 긴 칼과 같고 어금니는 군인들의 짧은 칼 같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망설임 없이 해칠 수 있는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약탈합니다.
마치 거머리의 두 딸과 같이 사람의 피를 아무리 빨아먹어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무덤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집어 삼켰습니다. 하지만 만족할 줄 모르고 새로운 시체를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눈이 높은 사람은 쉼 없이 다른 사람을 죽이며 자신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시인은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불법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셋째는, 크고 기이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크고 기이한 일’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가리키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구원의 일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구원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구원을 행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셔서 백성들을 안전히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군대는 모두 물 속에 잠기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고 기이한 일을 찬송했습니다(출 15:11).
출애굽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홍해의 기적을 보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도 백성들을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급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셔서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안전하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구원의 일에 사람이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뿐입니다. 시인은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2. 어미 품에 안긴 아기와 같이, 하나님 품에서 온전한 평안을 누리자 (2절)
2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노래합니다.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이 평안은 1절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교만으로부터 마음을 지켜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때만 가능합니다. 눈이 높아지지 않아서 이웃들에게 사랑을 행할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크고 기이한 구원의 일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찬양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젖을 뗐다는 것은 어머니의 젖을 배부르게 먹고 입을 뗀 것을 나타냅니다. 이 아이는 어머니 품에 기대어서 만족스러워하며 금새 새근새근 잠이 들 것입니다. 어머니가 안전한 보호막이 되고, 모든 것을 공급해 주는 분이 됩니다. 자신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줍니다. 다른 곳에 가서 방황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1절에서 마음을 높이는 자, 눈을 높이 치켜드는 자,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려는 자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그분 안에서 모든 필요를 다 공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젖먹이 갓난 아이가 홀로 자립해 보겠다고 엄마 손길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젖먹이 아이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계속해서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낮추고 하나님을 엄마처럼 의지하는 겸손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품에 안으시고 배불리 먹여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서 66:11은 바벨론 포로로 붙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젖을 풍성하게 빠는 것같이 하나님의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고,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온 이스라엘이 영원히 하나님 품 안에서 보호받자(3절)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시인이 누리고 있는 평안을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누리자고 합니다. 시인 혼자만 평안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만 시인도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품 안에서 평안을 맛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 품에 한 번 안겼던 경험을 가진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분 품 속에 거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젖을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시는 구원이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의 삶에서 지속되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영원히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지키실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마음과 눈을 높이고 스스로 큰 일을 이루려는 사람과 민족이 영원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금새 사라질 것입니다. 오히려 갓난아기처럼 힘없어 보이는 시인과 이스라엘이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품 속에 넣고 지키시고 먹이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갓난아이처럼 낮추시길 바랍니다. 영원히 하나님 품 안에 거하시며 그분께 모든 것을 공급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131편은 조금 오해되기가 쉽습니다.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고,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다소 나른한 느낌을 가져다 줍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정서적인 안정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어른이 젖먹이 아이처럼 되고,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죄악된 세상 속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마음이 교만하지 않는다, 눈이 오만하지 않는다, 큰일과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다는 말은 그만큼 유혹이 많은 것을 보여 줍니다. 교만하고 높아지려는 유혹이 많은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하고 끝납니다. 이 구절은 130편 7절에서도 나옵니다. 개인과 민족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를 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131편도 죄와 고난의 현실 가운데에서 쓰여졌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이 넘치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죄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그로 인해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를 그 분께로 돌이키셔서 품에 품어 주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는 지금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주님 품 안에 거하는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주님 품 안에 안겨 있음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생각이나 행동의 변화가 필요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