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2편
예배를 위한 수고를 기억하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찬송 19장)
2023-2-24, 금
맥락과 의미
시편 120-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123편부터는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릴 때의 심정을 노래합니다.
131편은 어머니 품에 아기가 안겨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고 합니다. 132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쉼으로 백성들을 초대하시는 것을 노래합니다. 1-10절에서는 다윗과 백성들이 언약궤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뻐한 내용이 나옵니다. 11-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쉼을 주신다는 내용을 말합니다.
1. 언약궤를 찾는 다윗의 수고와 언약궤를 찾은 백성들의 찬송 (1-10절)
2.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거하시며 백성들에게 복 주심 (11-18절)
1. 언약궤를 찾는 다윗의 수고와 언약궤를 찾은 백성들의 찬송 (1-10절)
1) 언약궤를 찾겠다는 다윗의 맹세와 수고 (1-5절)
시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다윗의 근심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다윗이 “근심”(아나)한 것이 무엇인지는 이후의 내용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발견해서 예배하기 위해 여러 수고를 한 것을 의미합니다.
역대상 22장에서 다윗은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 사명을 전해줍니다. 다윗은 자기가 성전을 짓고 싶은 소원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다윗은 “환난”(아나) 중에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과 재목과 돌을 예비했습니다(대상 22:14). 하나님의 성막을 찾기 위해 수고한 것이 성전을 짓는 일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맹세했습니다. 성막을 발견할 때까지 침상에 누워 편히 잠을 자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몸을 고되게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을 기억하고 마음을 쏟기로 스스로 결심하는 방법입니다. 성막을 찾기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않고 전심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다윗이 찾으려고 노력한 성막은 특히 언약궤를 의미합니다. 성막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집인데, 하나님의 임재가 특히 언약궤 위에서 나타납니다. 언약궤가 성막의 핵심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즉위한 당시에는 언약궤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언약궤가 어디 있는지 꼭 찾아내서 성막을 복원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사무엘기를 읽어보면 당시 성막과 언약궤가 실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섯불리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부탁해서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 전쟁에서 패배해서 엘리의 두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언약궤는 블레셋에 빼앗겼습니다(삼상 4장).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 때문에 큰 재앙을 당하고 그 궤를 기럇여아림으로 옮깁니다. 언약궤는 그곳에서 20년 동안 거했습니다 (삼상 6장-7:2).
2) 언약궤를 찾은 백성들의 기쁨의 찬송 (6-10절)
다윗은 언약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습니다. ‘우리가’ 에브랏에서 언약궤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또다른 이름입니다(룻 4:11). 언약궤를 실제로 찾은 것은 다윗이지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찾기를 바랐기 때문에 우리가 찾았다고 합니다. 언약궤가 나무 밭에 있다고 합니다. ‘나무 밭’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야일 밭’입니다. 야일은 기럇여아림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드디어 기럇여아림에서 언약궤를 찾았습니다.
온 이스라엘에 언약궤를 찾았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서 그분의 임재 앞에서 경배하자고 찬송했습니다. 이제 언약궤를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옮기며 찬송을 계속합니다. 언약궤와 함께 여호와께서도 일어나셔서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시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여호와께서 영원히 평안하게 거하실 곳이 되게 해 달라는 소망을 담아 노래 부릅니다.
제사장들은 의를 옷입게 해 달라고 합니다. 1차적으로는 지금 언약궤를 옮기는 일을 하는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기럇여아림에서 언약궤를 옮길 때 처음에는 수레를 사용해서 임의대로 옮기려다가 웃사가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대상 13장). 그래서 다음에 옮길 때는 레위인들이 율례에 따라 옮겼습니다(대상 15장).
사람으로서는 높으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다가 언제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율례를 주셔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옮길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의로 보호해 주셔서 언약궤를 안전하게 옮기게 해 달라고 찬양합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지켜보며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즐겁게 찬송했습니다. 특히 다윗 왕조의 복을 빌었습니다(10절).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기름부음 예식을 통해 왕위에 오른 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평생을 수고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1절). 후대 왕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수고를 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거두지 말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언약궤를 들여온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 가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대하 17:12).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 왕조의 후대 왕들이 많은 잘못을 범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지키시는 것과 다윗 왕조의 후대 왕들을 지키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규례와 다윗 왕조에 대한 축복을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 안에서 복을 누리며 삽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합니다.
2.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거하시며 백성들에게 복 주심 (11-18절)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온 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신실하게 맹세하셨습니다. 그 맹세의 약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대하 17장에 맹세의 내용이 자세히 소개됩니다. 이 약속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실 까닭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윗의 수고를 귀하게 여겨 주시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입니다.
약속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왕위에 앉을 것입니다. 그들의 왕위가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증거를 지킨다면’ 하고 조건을 달아서 강조합니다. 우리는 후대 왕들이 언약과 증거를 지키지 않은 일도 많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시며 언약과 증거를 지키도록 하십니다(삼하 7:14).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유다 왕조가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것도 징계를 통해 언약을 지키도록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주시고, 친히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거처를 삼겠다고 하십니다. 시온(예루살렘)에 언약궤를 모신 사람은 다윗이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시온은 장차 성전을 세워서 언약궤를 두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곳입니다. 또한 다윗 왕조가 영원히 거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함께 거하시며 지키실 것입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쉬실 곳(머누하)입니다. ‘쉬실 곳’은 8절에 ‘평안한 곳’(머누하)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거하시며 쉬실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하나님과 함께 머무르며 쉬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쉬시는 곳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거주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입니다. 순전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입니다. 다윗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쉼에 들어가셨고, 그분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함께 쉼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쉼을 주십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복을 포함합니다. 식량이 풍족할 것입니다. 떡이 많아서 굶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쉼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맛보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 드리며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선포할 것입니다(16절, 9절 참고). 성도들은 기쁨의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다윗의 왕가를 축복하십니다. 뿔이 나게 하시고, 등불을 준비하시고, 왕관을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말은 모두 왕의 권세를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뿔과 같이 힘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왕조를 지키실 것입니다(삼하 21:17). 전쟁터에서 원수를 패배시키고 승리의 왕관을 쓰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 왕조의 왕위는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복을 주실 것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바벨론 침략 이후 다윗 왕조는 몰락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다윗 가문에서 왕으로 통치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 영원히 왕위에 앉으리라고 하신 축복의 말씀(12절)은 헛되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변하지 않으심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분께서 영원한 왕으로 우리 성도들을 다스리십니다. 모든 성도를 제사장 삼으셔서 그분께 나아와 예배하도록 하셨습니다. 의와 구원으로 옷 입히시고 주님을 즐겁게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며 영원한 쉼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원수들은 큰 수치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이런 일들을 다 알지 못하였지만, 장차 오실 왕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이런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실제로 맛보아 압니다. 예배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이 시편을 부릅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는 예배와 교회를 세우는 것을 인생의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수고를 감당하고 있습니까? 다윗과 같이, 예수님과 같이 기쁘게 수고를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1절, “근심” (아나) = 성전을 세우기 위하여 다윗이 감당한 수고
“근심”이라고 번역한 히브리 단어는 무력을 써서 어려움을 주거나 당하는 것(창 16:6; 34:2), 혹은 금식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시 35:13; 사 58:5), 그 외에 속죄일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레 16:31; 23:27) 등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말입니다.
역대상 22:14에서는 같은 단어가 “환난”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다윗이)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다윗은 “환난” 중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를 모으려고 노심초사하며 노력하였습니다. 금과 은을 그 정도로 많이 모으려면 쉽지 않기 때문에 마음과 힘을 다 기울여야 했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수고”나 “근심” 혹은 심지어 “고난”, “환난”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였습니다. “환난 중에” 모았다는 말은 금은을 모으다 보면 어려운 일도 간혹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성전에 대한 그의 서원이 이루어지기까지 겪은 온갖 수고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참고> 성전을 향한 예수님의 열심
요한복음 2장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이 후에 깨닫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하는 말씀을 상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예수님에게 가득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셨다”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께서 수난 주간에 하신 일도 성전을 정결케 하는 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성전에 가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성격을 확실하게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는 처음과 끝에 있었던 두 사건, 즉 성전을 정결케 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다윗의 일평생이 성전을 세우기 위한 준비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전체 주제는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의 참된 의미는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정결케 하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요 2:19-21). 그분은 자기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 참된 성전인 교회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성전 된 자기 육체를 헐도록 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그분의 몸인 교회를 정결케 하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전체 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