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7편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부르는 바벨론 강변의 슬픈 노래
(찬송 438장)
2023-3-21, 화
맥락과 의미
137편은 대표적인 애가(슬픈 노래)입니다. 이 시편에는 “기억의 고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바벨론 강가에 앉아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합니다. 고통스러운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에돔 사람이 그때에 행한 일들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시인이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씨름하는 이유는 시온(예루살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는 시온을 기억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원할 정도로 시온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시온의 성전과 예배를 회복시켜 주시길 소원하면서 힘겨운 노래를 부릅니다.
137편은 세 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4절은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바벨론의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시온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는 “우리”라는 말이 아홉 번 나옵니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시온을 기억합니다.
그다음 5-6절은 “나”의 고백입니다.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자기의 오른손이 잊을 것이고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자기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7-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기억해 주시기를 호소하고, 여호와께서 장차 공의로 심판을 내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1. 바벨론 여러 강변에서 우리가 기억함(1-4절)
2.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사랑함(5-6절)
3. 여호와께서 바벨론과 에돔을 기억함(7-9절)
1. 바벨론 여러 강변에서 우리가 기억함(1-4절)
1)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두 가지를 생각함(1-2절)
1절에 “바벨론 여러 강변”은 포로지의 모습을 알려 줍니다. 바벨론에는 큰 평야가 펼쳐져 있고, 여러 강들과 운하들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지로서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나 에스더서의 모르드개처럼 그 땅의 번영함을 보고서 그 사회에 적응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시온을 기억하며 심히 울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풍요와 번영을 보면서 파괴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이렇게 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애 2:18) 죄를 회개하며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눈물입니다.
2절에, 바벨론 강변에는 또한 버드나무가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면서 소리를 내는데, 그 바람 소리도 예루살렘에서 듣던 바람 소리와 다릅니다. 버드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면서 나는 ‘쉬-’ 소리에 시인은 자기의 황량한 마음을 실어 보냅니다. 3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쉬”라는 발음이 7번 나오는데, 이것이 버드나무의 바람 소리를 연상시킵니다.
2) 시온의 노래와 여호와의 노래(3-4절)
3절에, 바벨론의 통치자들이 시인더러 “시온의 노래”(참고. 시편 46편, 48편, 87편 등)를 부르라고 합니다. 시인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두었습니다. 만일 시인이 하나님과 성전의 영광을 찬양하는 이 노래들을 불렀다면, 바벨론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온 그들과 하나님을 더욱 조롱하였을 것입니다.
4절에, 시인은 거룩한 “여호와의 노래”를 이방 땅에서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강변에 앉아 그냥 울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과, 그분의 언약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함부로 조롱당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방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것을 강요당하는 이 상황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의 애절함을 드러냅니다. 시온에서 쫓겨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라는 원수들의 말을 들으면서 슬피 울었습니다.
2.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사랑함(5-6절)
1-4절에서는 “우리”라고 했는데, 5-6절에서는 “나”로 바뀝니다. 시편 137편은 공동체의 애가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애가입니다.
5절에, 시인은 바벨론 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며 예루살렘을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을 잊으면 자기의 오른손이 잊을 것”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내용이 6절에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릴 것”으로도 표현됩니다.
자기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고 바벨론에 적응하여서 살아간다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고, 오른손이 잊어버릴 것이라고, 곧 손 자체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결심을 과장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을 “기억한다”와 “나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다”를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단지 예루살렘을 머리로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포로 생활 중에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겠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다는 말은, 시온이 자기 기쁨의 전부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없으면 자기의 손과 혀가 존재할 이유가 없고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사모함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사랑 고백은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근본 원인인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겼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간음이었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 왔습니다.
지금 그들은 바벨론의 영광을 거부하고서 여호와께 대한 최고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벨탑을 쌓고 살던 그 땅, 곧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과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께서 바벨론과 에돔을 기억하심(7-9절)
1) 에돔의 말과 행위를 기억함(7절)
7절에 시인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날”을 기억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문맥으로 보면 예루살렘 멸망의 날을 기억하며 원수들을 잔인하게 보복해 주실 것을 청하는 의미입니다.
7절에 에돔 자손은 바벨론 사람이 성전을 헐 때에 “헐어라 헐어! 그 기초까지” 하면서 바벨론의 편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도망하던 사람을 붙잡아서 바벨론에 넘겨주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데에도 참여하였습니다(옵 1:11).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에돔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옵 1:10-16; 겔 35:5-7; 애 4:21-22).
시인은 하나님께 에돔 사람이 이스라엘에 행한 일들을 “기억”하여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이 곧 시온의 회복을 의미하기에 이러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자 오바댜와 에스겔, 예레미야 등의 말씀에 호소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보복과는 다릅니다.
2) 바벨론의 행위를 기억함(8-9절)
8-9절은 매우 잔인하게 보입니다. 특히 9절에서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서 바위에 메어치는 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하는 저주가 가혹해 보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네가 우리에게 행한 그대로 너에게 갚아 주는 이”라고 한 것을 보면,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먼저 이런 잔인한 일을 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공의로 그들의 죄값을 되갚아 주시길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사 13:16).
9절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하실 “역사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공의의 최후 심판을 바라보는 부르짖음입니다. 잔인하게 느껴지지만, 그만큼 시인의 마음에 새겨진 민족적 아픔이 깊고 큼을 나타내는 과장된 표현입니다.
개인적인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의를 이루실 것을 소망하며,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적개심을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세력 전체에 대한 심판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성도의 정당한 기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믿고 복종할 일
사람의 눈앞에는 바벨론의 영광이 크게 보이지만,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그날을 소망하며,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고백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안겨 줍니다.
첫째,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기억합시다. 시인이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포로된 현실을 계속해서 기억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지금 처한 비참한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해 주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회복시켜 주시길 담대하게 구합시다.
둘째,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과 예배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고 살아갑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손과 혀가 없어져도 좋다는 심정으로 사는지를 돌아봅시다. 혹시 나에게 우상 숭배적인 경향이 있다면 어서 돌이키고 주님만을 의지합시다. 세상의 물질과 번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셋째, 어서 속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루시고 우리를 속히 구원하여 주시길 간구합시다. 우리를 까닭없이 탄압하는 악한 세력에 짓눌리지 맙시다.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이 땅의 부정의 가운데서도 깨끗한 손을 지키며 살아갑시다.
바울 사도는 마음이 새롭게 됨으로써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4,19,21)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십니다. 그날에는 땅과 바다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를 모두 내어놓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성도들이 드린 슬픔의 기도가 응답을 받고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고난의 현실 가운데에서 눈물의 찬송을 부르며 인생길을 걸어 갑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주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항상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주님께서 곧 다시 오셔서 모든 원수를 멸하시고 내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을 믿습니까? 오늘도 다시 오실 주님 소망하며 선을 행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3절, ‘ㅅ-’ 발음의 반복을 통한 바람 소리 묘사
3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쉬”라는 소리가 여러 번 나옵니다. 소리나는 대로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키 샴 셔엘루누 쇼베누 디브레-쉬르 버톨라레누 쉼하 쉬루 라누 미쉬르 지온.” “ㅅ-” 발음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일곱 번 나옵니다. 이렇게 “쉬-”하는 소리를 사용하여서 버드나무 가지와 그곳에 매단 수금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연상시킵니다. 이방 땅에서 고통을 겪는 그들의 마음을 시적인 발음을 사용하여서 표현하였습니다.
<참고> 시편 137편은 찬송시들 사이에 끼어있는 슬픔의 시
135-136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노래하는 시편이고, 138편도 찬송하는 시편입니다. 찬송의 시편들 사이에 137편이 놓여 있습니다.
주님의 영원한 자비하심을 찬송하는 시편들 사이에 137편의 애가를 넣어서 주신 데에는, 바벨론 포로기를 생각하고 다시는 그러한 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왔다고 하여서 그들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다윗의 왕위가 회복되지 않은 그들의 삶은 사실 포로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이 시편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137편의 마지막에서 기도한 대로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면 그 결과 138편의 찬송이 나올 것입니다. 바벨론의 모든 신들 앞에서 주님을 찬송하고(138:1), 주님을 거스르던 왕들도(138:4) 모두 주님을 찬송하는 데에 참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