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편
나를 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송함
(찬송 40장)
2023-4-26, 수
맥락과 의미
시편 139편은 24절로 구성된 긴 시편인데, 여섯 절씩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앞의 세 연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각각 여섯 절씩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찬송의 형식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19-24절에서는 기도를 드립니다. 전지하시고, 편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악인을 물리쳐 주시고, 또한 자기를 살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서 서술합니다. 첫째 단락에서는 하나님 혹은 주님이, 둘째 단락에서는 시인이 주어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다시 셋째 단락에서는 하나님 혹은 주님이, 그리고 넷째 단락에서는 시인이 주어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면서, 그분의 능력을 자신의 삶과 관련지어서 찬송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에서는 “안다”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됩니다. 1-18절에서는 전지하시고 편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심을 찬송합니다. 이어서 19-24절에서는 “하나님의 원수를 심히 미워한다”고 하며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모든 것을 아심(1-6절)
2. 모든 곳에 계심(7-12절)
3. 지으시고 돌보심 (13-18절)
4.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 (19-24절)
1. 모든 것을 아심(1-6절)
1절에 “살펴본다”는 “조사하여서 속에 있는 것도 안다”는 뜻입니다. 내가 앉거나 설 때에 혹은 무슨 말을 할 때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도 환히 아신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살피고 아시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2-18절까지 이야기합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인 23절에서 다시금 “살펴 주시고 알아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같은 말을 시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사용함으로써, 이 시편의 주제가 “나를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2절부터 시인은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아시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2절), 그리고 길을 행하거나 일을 마치고 눕는 것(3절)까지 모두 아십니다.
4절에 심지어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할 때에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도 잘 아십니다. 물론 내가 침묵하고 말을 하지 않을 때에도, 혹은 무슨 의도로 그러한 말을 하였는지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십니다. 나를 지으신 그분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5절에 “하나님께서 앞뒤로 감싸고 손을 얹으시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호의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지켜 주시고 또한 복을 주십니다(참조. 창 48:14, 17; 출 33:22). 또한 우리가 잘못하면 징계하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6절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지식이 너무나 기이하고 높아서, 그것을 다 헤아릴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에서 “기이하다”는 말은 특히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실 때 찬송하는 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이성으로 파악하거나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의 일은 “너무 높아 제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고 영광의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2. 모든 곳에 계심(7-12절)
타락한 이후로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빛을 피하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참조. 창 3:8; 욘 1:3). 그런데 7절에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피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8절에 자기가 가장 높은 곳인 하늘에 올라가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고, 가장 낮은 곳인 음부에 내려갈지라도 거기에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피하여 죽음의 세계로 도망하여도,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죽으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자리 또한 다스리시며, 그곳에서 죄인에게 화를 내리고 심판하십니다(암 9:2-4).
9절에는 “새벽 날개를 타고 가서 바다 끝에 자리를 잡는다”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과 지중해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10절에 “오른손”은 히브리어로 “남쪽”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은 남쪽을 가리키고 “주님의 손”으로 말한 다른 손은 북쪽을 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쪽부터 서쪽까지, 남쪽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도 주님께서 거기 계시며 나를 지키신다고 찬양합니다.
이어서 11-12절에서는 하나님께는 어둠과 빛이 동일하기 때문에 어둠에 숨더라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빛의 신과 어둠의 신을 구별하지만, 하나님은 어둠도 빛처럼 보시는 분이십니다.
8-9절과 11-12절의 중간에 10절이 있습니다. 10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인도를 말합니다. 해가 새벽 날개를 펴면서 떠올라 서쪽 바다로 이울 때까지 그 모든 과정을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어두운 시기를 지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며 빛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3. 지으시고 돌보심 (13-18절)
13절에,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나의 깊은 곳, 곧 내가 볼 수 없는 저 장기들까지도 지으셨습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듯이 주님께서 나를 정성스럽게 빚어서 지으시되 어머니의 태에서 기이하게 창조하셨습니다(14절).
14절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이하게 지으신 사실을 자기의 영혼이 잘 안다고 고백합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지음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미의 태에서 직접 지으셨기에, 그 일을 다 아십니다(15절).
16절에, 우리를 위한 날들이 하루도 시작되기 전에 내가 행할 일이 모두 주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행동하기 전에도 무슨 행동을 할 것인지 아셨습니다. 시인은 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읽음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알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천지의 창조주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어머니의 태에서 구체적으로 지으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태아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 아이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생명책에 기록하여 두셨다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능력도 없고 자질도 없으며, 가정 환경도 좋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열등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자신을 비하하고 하찮은 존재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17절). 나를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의 덜 귀히 여기는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시며,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게 하시려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분입니다(참조. 고전 12:23).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묘하게 빚으시며 주님의 뜻에 따라 귀하게 지으셨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할 일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18절에 “깰 때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 하는 고백은 이 문단의 맥락에서는 어머니의 태에 있다가 이제 태어나면서 빛을 보는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하셨습니다. 우리의 탄생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시기를 지날 때에도 이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신 뜻 가운데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4.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 (19-24절)
1) 악인의 멸망(19-22절)
시인의 곁에는 악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피에 주린 자들입니다(19절).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악한 생각을 품고 자기의 현세적인 이익을 위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들입니다(20절).
그러한 악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 피에 주린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고 소리칠 정도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시인은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주님을 미워하고 주님께 맞서는 자”라고 합니다(21절). 주님을 미워하는 자를 자기도 미워하며 주님께 맞서는 자를 자기도 싫어하겠다고 말합니다(22절).
시인은 원수에 대하여서도 자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말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그들의 악행의 근원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태도가 있고,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자기도 그들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 “더할 수 없는 미움으로 그들을 미워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이고 그 결과로 동시에 자기의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긍휼의 태도도 담겨 있습니다. 악인이 나에게 심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공의의 보복을 호소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을 긍휼히 여겨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구할 수도 있습니다.
2) 자기 성찰과 지속적인 교제 (23-24절)
23절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서 간구합니다. 사실 우리의 원수가 우리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도 육신이라는 죄악적인 요소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나도 본질상 하나님께 반역하는 사람입니다.
24절에 시인은 자기 안에 악한 길이 있는지 살펴 주시기를 구합니다. 자신의 원수에게 적용한 그 말씀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서 스스로의 영혼을 살핍니다.
1절에서 “여호와께서 저를 살피셨으니 저를 아십니다” 하는 고백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저를 살피시고 제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시인 자신을 더 분명히 알아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제거하시고,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시며 영원히 사랑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다 아십니다. 그분은 나를 어머니의 태에서 지으시고 낳으셨습니다. 나의 존재와 인생에 주님의 귀한 뜻과 계획이 있음을 확신합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께서 지금도 나를 지켜 주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뻐합시다.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 복된 삶으로 나아갑시다.
악한 자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문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가운데 나에게도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노하시며 합당한 저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악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셔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은혜를 의지하며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도 죽임 당하신 어린양 안에서 하나님을 뵐 것입니다. 태에서 우리를 빚으시고 우리의 탄생부터 함께 하신 분께서 영원한 사랑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과 동행하며 평안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는 주님께서 직접 지으시고 생명을 주신 존귀한 존재임을 믿습니까?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서 항상 나를 아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메리즘(양단법, merism)
2절에 “앉거나 서는 것”을 아신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앉거나 서 있을 때에 행하는 모든 행동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양극에 속한 두 가지를 말함으로써 전체를 표시하는 방식을 “메리즘”(merism)이라고 합니다.
1-12절에는 메리즘이 일곱 번 나옵니다: “앉거나 서는 것,” “길을 가거나 눕는 것,” “앞에서나 뒤에서도,” “하늘과 지옥,” “새벽 날개와 바다 끝”(동과 서), “어둠과 빛,” “밤과 낮.”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메리즘으로 강조합니다.
이렇게 메리즘을 일곱 번 사용하는데, 7은 완전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편재하심이 완전한 사실임을 표현하였습니다.
<참고> 20절, “주의 원수들”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2문답
20절에 내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주의 원수들”로 표현한 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2문에서 “그가 그의 모든 원수들 곧 나의 원수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형벌하실 것이며, 나는 그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에게로 이끌어 들이실 것입니다” 하고 고백한 것과 비슷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