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3장
고통 가운데 여호와를 신뢰하고 찬양하며 도우심을 구함
(찬송 83장)
2023-7-3, 월
맥락과 의미
애가 3장은 다른 장들에 비해서 더 조직화되어 있습니다. 한 연에 3행씩 전체 22연 66행로 이루어져서 히브리어 알파벳 22개 순서대로 각 연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한 연을 이루고 있는 세 개 행이 모두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3장이 전체 애가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장에서는 주어로 “나”와 “우리”가 번갈아가며 사용됩니다. 개인의 구체적인 슬픔을 호소하면서, 동시에 당시 고난당하는 모든 백성들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시의 앞에서는 자신이 당한 고통을 생생하게 호소합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마지막으로는 구원에 대한 간구로 마무리합니다.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신자의 심경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받게 된 죽음과 절망의 고통을 호소(1-18절)
2. 고통 가운데 여호와를 소망하며 그분의 자비하심을 신뢰(19-24절)
3. 여호와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찬양(25-39절)
4. 이스라엘이 공동체적으로 회개하며 용서를 간구(40-47절)
5. 여호와께서 원수를 갚아 주시길 간구(48-66절)
1.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받게 된 죽음과 절망의 고통을 호소(1-18절)
1-3절(알렙): 시인은 자기 자신이 여호와의 심판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매”(셰베트)에 맞았습니다. 시편 23편에서는 “주의 지팡이(셰베트)와 막대기가 나를 안전하게 보호한다”고 고백했는데, 이제 주님께서 그 지팡이로 나를 치십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시 23:4).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어둠 가운데 가게 하십니다. 앞이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이 계속해서 시인을 치고 있습니다.
2절부터 17절까지 자신의 고통을 묘사할 때 하나님을 “그”라고만 하고 그분의 성호 “여호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마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과 같은 상황에 처했음을 나타냅니다.
4-6절(베트): 고통이 너무 커서 살이 심하게 빠지고 뼈만 남은 상황인데, 그 뼈조차 부러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수고의 성을 높이 쌓아서 그 속에 시인을 가두셨습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이 죽음의 어둠 가운데 방치당한 채 오랜 기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버리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7-9절(김멜): 시인이 아무리 그 상황 가운데 벗어나고자 하여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담장을 높이 세우시고 무거운 사슬을 채우셔서 고통의 감옥에 가두셨기 때문입니다.
홀로 고립된 상황에서 하나님께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 뿐인데, 아무리 큰 소리로 기도해도 하나님께선 의도적으로 듣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보려고 여러 방향으로 시도를 해 보지만,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돌을 쌓아 길을 막으십니다. 시인은 지금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돌파구를 마련할 수 없는 큰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10-12절(달렛): 하나님께서 시인의 목숨을 노리고 사자와 곰과 같이 길에 숨어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인이 길을 잘못 들도록 하여 맹수에게 찢겨 죽게 하십니다. 시인은 아무도 없는 길바닥에서 외롭게 죽어갑니다.
일찍이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다”(삼상 17:36)고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이”(잠 28: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자와 곰이 되어서 악인들에게 보복하시며 가난한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니다.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새끼 잃은 곰같이 백성들을 찢고 암사자같이 그들을 삼키겠다”(호 13:8)고 말씀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길에서 “치우치게”(수르)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시인 자신이 잘못된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애가와 같이 알파벳 시인 시편 119편에서는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수르) 않았다”(시 119:102)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이 백성을 표적으로 삼아서 화살을 쏘십니다. 운좋게 짐승을 피해 도망가더라도 하나님의 공격을 피할 수 없습니다.
13-15절(헤): 하나님께서 멀리서 쏘신 화살이 시인의 몸 속 깊은 곳 급소를 관통했습니다. 시인은 괴로이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 가까운 동료 백성들에게까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철저한 고립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마치 “쓴 것”(마로르)과 쑥만으로 배를 채운 것 같은 괴로운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자식들을 모두 잃고 “괴롭게 된”(마라르) 상황(룻 1:20), 욥이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전재산과 자녀들을 다 잃고 심한 병에 걸려 “괴롭게 된”(마라르) 상황(욥 27:2)에 비견될 만한 고통입니다.
16-18절(바브): 돌맹이에 맞아 시인의 이빨이 부러졌습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먼지 구덩이 가운데 파묻히게 되었습니다. 본래 우상숭배, 살인, 간음 등 중요한 율법 규정을 고의로 어긴 경우에 돌로 쳐죽임을 당합니다(신 17:5; 21:21; 22:21). 지금 시인이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평강이 사라졌습니다. 복을 경험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힘이 다하였다. 여호와에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모든 소망이 완전히 상실된 시인에게는 오직 절망과 어둠만이 있을 뿐입니다.
2. 고통 가운데 여호와를 소망하며 그분의 자비하심을 신뢰(19-24절)
19-21절(자인): 지금까지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에 낙심해 있던 시인은 이제 마음을 돌이켜 소망 가운데 나아갑니다.
먼저 내가 쑥과 쓸개즙과 같이 쓰디쓴 “고통”(오니)과 “재난”(마루드: 떠돌아다님)을 당하였음을 아시고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고, “떠돌아다니는 빈민”(오니임 머루딤)을 재워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나눠주는 것을 기뻐하는 분이십니다(사 58:7). 지금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돌아봐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처지를 생각하면 낙심하고 좌절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면 자신의 비참함 가운데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모든 것을 가졌다” 하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추십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고 겸손하게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를 높이시는 분입니다(시 147:6).
22-24절(헤트): 시인은 소망 가운데 주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합니다. “우리 언약 백성들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놓여 있어도 결코 진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인자’(헤세드)와 ‘긍휼’(라하밈)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에무나)이 큽니다.”
시편 40편에서는 여호와의 “인자”(헤세드)와 “긍휼(라하밈)”과 “성실”(에무나)을 서로 연결시켜 언급합니다(시 40:10-11).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신실하시며 특히 죄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지금 구원의 소망을 사람의 존재나 선행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롭고 신실하신 성품에서 찾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셔서 그들과 맺은 언약을 이루실 것입니다.
앞의 18절에서는 “여호와”의 이름 가운데 소망이 없다고 절망적으로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24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며 그분께 소망이 있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현실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여호와를 붙잡으며 힘을 얻는 신자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3. 여호와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찬양(25-39절)
25-27절(테트): 이번 연의 세 절은 모두 “좋다”(토브)로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좋으신(토브, 개역개정에서는 “선하신”) 분입니다. 그분을 기다리고 구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토브).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그의 기다림에 응답하시고 반드시 구원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젊은 시절에 멍에를 매는 것이 “좋습니다”(토브).
여기서 “멍에”(올)는 종으로서 무거운 노역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것(레 26:13), 르호보암 치하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것(왕상 12:4)에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우상 숭배하면 멍에(올)를 씌우고 대적을 섬기게 할 것”(신 28:48)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실제로 이 예언이 이뤄져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차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멍에(올)를 꺾고 종에서 건져내어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실 것”(겔 34:27)입니다. 젊은 시절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우상 숭배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알게 될 터이기에 좋은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8-30절(요드): 하지만 홀로 고립되어 거하며 주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앞서 26절에서는 “좋다”고 고백했지만, 막상 그 기다림의 시간을 감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이 홀로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입을 땅의 먼지에 댈 정도로 철저히 낮아지고 겸비해지기를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그럴 때 그 슬픔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으로 승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가 자기를 때린다면 반대쪽 뺨까지 돌려대어서 더 많은 수치를 겪기를 권합니다. 이처럼 완전히 자기를 부인할수록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31-33절(카프): 주님께서 낮추실 때 그 심판을 받아들이고 더욱 철저히 낮아져야 하는 이유가 제시됩니다.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때에 구원의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근심케 하실 때에도 풍부한 “인자하심”(헤세드)으로 “긍휼히 여기십니다”(라함). 앞서 22절에 나왔던 표현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주님의 인자와 긍휼의 성품을 굳게 붙듭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이 근심하는 것을 즐기는 잔인한 분이 아니십니다.
34-36절(라메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 낮은 자와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갇힌 자(아시르)”는 감옥에 갇힌 범죄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 갇혀 지내는 자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사 42:7).
포로된 자들을 짓밟고, 경험이 부족한 사람의 판결을 왜곡하며, 재판에서 억울하게 대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이 일들은 과거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이 저지른 악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지금 바벨론에서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을 그대로 반대로 돌려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악을 행하는 바벨론의 지도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37-39절(멤): 이런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한 마디 말씀 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에서 심판의 말씀이 나오면 그 판결대로 화와 복이 결정됩니다. 살아있는 “사람”(게베르: 젊은 남자)은 자기 죄들 때문에 화를 받기에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1절에 여호와께 고난당한 “자”(게베르)입니다. 또한 27절에 젊어서 포로로 끌려와 멍에를 멘 그 “사람”(게베르)입니다. 그리고 35절에서 이제 포로 신분으로 재판 가운데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힘있는 젊은이가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하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화를 내리셨지만 그를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그의 “생명”(하이)을 속량하실 것입니다(58절).
4. 이스라엘이 공동체적으로 회개하며 용서를 간구(40-47절)
40-42절(눈): 지금까지 시인은 개인의 시점으로 회개하며 찬양하였는데, 40절부터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와 함께 간구합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행위들을 살펴보고 여호와께 돌아가야 합니다. 손을 들어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마음을 높여서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의 죄를 분명히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42절부터는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현재의 불행의 책임이 우리의 범죄함에 있음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께서 용서하시면 이 어려움 가운데서 벗어나게 될 것임을 신뢰합니다.
43-45절(사멕): 주님께서 스스로를 진노로 덮으셔서 긍휼의 성품은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추격하여 죽음으로 몰아넣는 공포스러운 모습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셔서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본래 구름은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이었는데, 지금은 단절의 수단이 됩니다(참고- 출 16:10; 애 2:1).
과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서굴라: 보배)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열방 가운데 쓰레기와 폐기물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속했을 때에만 이 세상에서도 가치있는 존재가 됩니다.
46-47절(아인):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원수들이 해치려고 달려듭니다. 치명적인 해악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부르짖습니다. 두려움-함정-파멸-멸망 순으로 점차로 심각성이 고조되며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본래 “아인” 연은 48절까지인데 47절에서 공동체적인 기도가 끝납니다. 기도를 다 마무리하지 못한 채 불시에 중단해야 할 정도로 큰 위기 상황에 처했다는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5. 여호와께서 원수를 갚아 주시길 간구(48-66절)
48절(아인): 48절부터는 다시 시인의 관점에서 슬픔을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을 “딸 내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혈육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백성들의 “파멸”(세베르)을 슬퍼하며 눈물 흘립니다. 47절의 “멸망”(세베르)과 같은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49-51절(페): 48절에서는 “내 눈에 눈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49절에서는 “내 눈”이 흐른다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의역해서 “내 눈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49절의 원문에는 “눈이 흐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려서 눈이 흘러내릴 정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돌아보시고 구원해 주시기 전까지는 이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애가 2장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자식을 품에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들이 등장했습니다(애 2:12). 남편은 칼에 잃고, 자녀는 기근에 잃고 홀로 남겨진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이 여인들을 보니 내 영혼에 깊은 슬픔이 임합니다.
52-54절(차덱): 시인 또한 원수들의 공격에서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미 앞에 1-18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부르짖었습니다. 52절부터 다시 한 번 개인적인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려 듭니다. 구덩이에 넣고 위에서 돌을 던져 죽이려 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시위대 뜰의 구덩이에 갇힌 예레미야의 경험을 연상케 합니다(렘 38:6).
구덩이 속에 물이 차서 몸이 점차로 잠깁니다. 몸이 완전히 잠겨서 멸절될 지경에 처했습니다.
55-57절(코프):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 나는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무의 도움도 구할 수 없는 깊은 구덩이 속에 갇혀 있을 때, 나를 도우실 유일한 분은 주님 뿐이시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립니다.
“주님은 이미 내 음성을 다 듣고 계시지 않습니까? 더 이상 나의 기도에 귀를 가리지 마소서!” 44절에 구름으로 가려서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이제 그 구름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시인은 그분의 전지 전능하심과 자비하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을 때, 시인은 과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으니, 이 두려움을 제하여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58-60절(레쉬): “원통함을 풀어주었다”(리브)는 소송을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판사와 변호사가 되셔서 재판에서 억울함을 다 풀어 주셨습니다.
“속량하다”(가알)는 값을 대신 지불하고 되사는 것입니다. 과거 보아스가 나오미 집안의 빼앗긴 땅을 대신 사 오는 것이 바로 속량입니다. 나는 죄를 지어 죽을 운명에 처했는데,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을 살려 주셨습니다.
과거에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동일한 은혜로 나를 구원해 주시길 구합니다. 이유 없이 부당하게 구덩이에 갇히고 죽음의 위협을 당한 억울함과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합니다. 저들이 나를 함부로 보복하고 거짓으로 모함한 것은 주님께서 다 목격하셨으니 절대 숨길 수 없습니다.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죄를 범하여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악용해서 주변의 악인들이 시인과 백성들을 함부로 탄압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그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61-63절(신/쉰): 악인들은 거짓으로 나를 비방합니다. 거짓으로 모함합니다. 그들의 입술에서는 죽음과 거짓의 말들이 계속해서 흘러 나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를 조롱하고, 심지어 조롱의 노래를 지어서 부르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악하고 거짓된 말들의 증인이 되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그들의 범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보아 주시길 구합니다.
64-66절(타브): 마지막으로 시인은 원수를 갚아 주시길 구합니다. 그들의 악행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되갚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거만하여 자기의 형벌을 더 많이 쌓게 해 달라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심판하셨습니다(43절). 이제 더 큰 진노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끝까지 뒤쫓으셔서 멸하여 주시길 구합니다.
이 간구는 단지 시인 개인의 복수심이나 민족감정에서 나온 요청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하늘 아래” 멸하여 주시길 구합니다. 이들이 시인과 이스라엘을 핍박한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대적하였기 때문입니다.
보복을 요청하는 이 기도는 언뜻 보면 잔인해 보이지만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멸망시키고 하늘 아래 오직 여호와만이 높임을 받으시길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애가 3장에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 가운데 고통을 호소하며 도우심을 구합니다. 강렬한 감정을 표출하되, 알파벳 시편이라는 엄격한 형식을 따라서 절제된 언어로 표현합니다.
이 시에는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는 고난에 대한 깊은 묵상이 담겨 있습니다. 3장의 내용으로 볼 때, 고난을 통해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변화가 찾아옵니다.
① 스스로의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자신들에게 악을 행하는 이방인들을 보며 과거 스스로가 범했던 죄악을 거울처럼 보게 됩니다.
②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긍휼히 여기심의 성품들을 생생하게 깨닫고 찬양으로 주께 영광 돌립니다.
③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간절한 믿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④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한 불행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⑤ 하나님의 원수를 멸망시켜 주시길 구하며 주님의 이름이 온 땅 가운데 높아지길 소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심판의 형벌은 큰 고통을 안겨 주지만, 주의 백성을 회복케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고통들 가운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시의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하심을 확신했습니다. 주께서 “내 생명”의 죄값을 대신 치르고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과 파멸을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죽음의 공포와 절망은 바로 예수님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심판과 멸망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멸망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혼자 있다 느껴질 때에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기뻐하며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립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내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고통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를 대신하여 그보다 더 큰 고난을 감당하셨음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고난이 나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것임을 신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