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그리스도의 나심과 어린 시절
(찬송 16장)
2023-11-30, 목
맥락과 의미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갑자기 하신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약의 언약 백성에게 주신 복과 예언된 약속이 더 발전되고 완성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 삶도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순종했듯이, 요셉이 믿음으로 순종했듯이 우리도 순종하며 나갑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 인해 바벨론에 사로잡힌 고통에서 구원하시는 해방자이십니다.
1. 그리스도의 나심과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러 옴(1-12절)
2. 이집트로 도망갔다가 오심(13- 23절)
1. 그리스도의 나심과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러 옴(1-12절)
1) 동방박사가 헤롯 궁전에 옴(1-6절)
헤롯 왕 때입니다. 헤롯 왕은 당시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에게 모세 때의 이집트 파라오와 같은 역할을 한 자입니다.
그는 에돔인 아버지와 아라비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아주 수완이 좋아서 로마 황실의 왕자와 함께 자랐고 기원전 40년에 로마에 의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사마리아 도시를 재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장엄하게 다시 짓는 등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야망이 컸습니다. 병상에서 죽어가면서도 자기 아들을 죽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킨다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백성을 억압했습니다.
그런데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그런 헤롯의 궁전을 찾아왔습니다. 별의 인도를 받아왔다고 했는데, 아마 그들은 점성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왕들에게 자문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미신으로 행하는 점성술을 행했지만, 성령님께서 특별한 감동을 주셔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습니다(3절). 경건한 백성이 기다리던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헤롯과 도시 전체는 당황하고 소동합니다. 헤롯은 하나님을 경쟁자로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층도 자신들의 안정과 지위가 흔들릴까 두려워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이 불편하여 마음이 소란스럽게 됩니다. 우리 시대는 모두가 자기의 왕이 되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비웃기까지 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경쟁하지 맙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잘못을 교정하는 분이십니다.
헤롯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날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미가서 5:1-3을 인용합니다.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스리는 분이요, 사랑 많은 목자로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2)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고국으로 돌아감(7-12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어디서 날지를 알았지만 기다리는 열망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선택했습니다. 왕의 별을 통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10절에 보면 그들은 그 별을 다시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며 따라갔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그리스도께 예물로 드리고 경배했습니다(11절). 이사야 60:6의 말씀이 거의 그대로 인용되었습니다. 시바와 동방에서 왕들이 황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경배하러 온다고 한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유대왕”을 만난 다음에 다시 자기 궁전에 와서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마음을 숨기면서 위선으로 말합니다.
헤롯 왕의 행동을 설명하는 마태복음의 표현은 구약 성경의 악한 자에 대해 쓰는 말입니다.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7절). “가만히” 우상 숭배를 하게 하는 사람들은 돌로 쳐 죽여야 했습니다(신 13:6).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가만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시 101:5)라고 선언하십니다. 자기 권력을 우상처럼 높이고 이웃을 허물어뜨리려 하는 헤롯왕을 하나님은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또 헤롯은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보라”(8절)라고 말합니다. 구약 율법에서는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언하는 사람에 대해 재판장이 “자세히 조사하라”(신 19:18)고 명령했습니다. 거짓말하여 이웃에게 피해를 주려고 한 그대로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헤롯 왕은 거짓을 밝혀서 공정하게 재판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정직한 마음을 품고 부당하게 살인하려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악할 뿐 아니라 자기 직무에 반대되게 행하는 ‘업무상 배임죄’를 짓고 있습니다. 구약의 언약의 하나님은 신약 시대 왕에 대해서도 당연히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헤롯 왕의 거짓과 악한 의도가 아기 예수님에게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일하셨습니다. 박사들의 꿈에 천사들을 보내어 헤롯에게 가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땅으로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더 복종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왕이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일에 이방인을 들어서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져서 이방인인 우리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이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모르던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나 그리스도가 왕이신 사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동방박사들처럼 왕으로 오신 메시아를 경배합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경배할 때 우리 자신이 영광스럽게 됩니다.
2. 이집트로 도망갔다가 오심(13- 23절)
1) 이집트로 피함(13-15절)
주의 사자가 나타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까 일어나 이집트로 피하라”고 합니다(13절). 아기 예수는 이집트로 피합니다. ‘피한다’는 단어는 출애굽기 2:14에서 모세가 이집트에서 미디안 광야로 피한 경우에 쓰인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집트처럼 되어버린 유대를 떠나 거꾸로 이집트로 가셨습니다. 모세가 구약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기 위해 광야로 피해 간 것처럼 그리스도도 새 백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집트로 피해 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집트로 간 것은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호세아 11:1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15절). 호세아의 말씀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지만 그들이 내 말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앗시리아에 포로로 보내겠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11:8부터는 하나님이 불타는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 가운데 거룩한 분으로 거하겠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거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는 맥락에서 심판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기로 태어나셨을 때 그 백성은 죄 가운데 헤매고 있어서 이방 나라인 이집트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이방인 왕 헤롯에게 눌려 있었습니다. 죄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헤롯의 폭력을 피해 가지만 사실은 그를 심판할 분이십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그 백성을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구원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2) 헤롯이 베들레헴 지역의 아기를 죽임(16-18절)
헤롯은 예수님을 놓치자 베들레헴의 아기를 다 죽였습니다. 이 영아 살해는 예레미야 31:15의 성취입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라마는 베들레헴 근처인데, 거기에 이스라엘 조상의 어머니 라헬의 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쪽 왕국 유다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갈 것을 예언했습니다. 포로들이 잡혀 가던 길목에 라헬의 묘가 있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라헬이 그 후손들의 비참함 때문에 통곡하고 있는 소리를 듣는 듯했습니다. 이제 자식을 잃은 라헬의 통곡이 다시 베들레헴에서 들렸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31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바벨론 포로된 데서 돌아오게 한다는 소망을 예언합니다(23절). 하나님이 이제 그 백성과 새 언약을 맺어서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날이 오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렘 31:31-34).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과 라헬의 울음을 너머서 멀리 하나님의 구원의 장면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소망하며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를 듣습니다 (16-18절). 예수께서 앞으로 죄와 비참함에 눌린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언약 백성을 온 세계에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도 파라오와 헤롯보다 더 악한 사단의 포로, 죄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죄와 죽음과 사단의 고통에서 계속 벗어납시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합시다.
3) 이집트에서 돌아와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함(19-22절)
이집트에 있을 때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20절). 출애굽기 4:19에서 모세에게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하신 말씀을 거의 그대로 반복해서 말합니다. 모세의 생명을 노리던 파라오가 죽었고, 그리스도를 죽이려던 헤롯도 죽었습니다. 파라오의 죽음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새 백성을 만드는 구원 사역을 진행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구원주로 오십니다. 그리스도로 하나님은 새 백성을 만드십니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마 2:23). 이 구절은 구약 어느 본문을 인용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사사기 13:5, 16:7에 나오는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그 백성을 구원한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는 경건한 분으로 백성을 구원한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또 이사야 11:1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하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가지는 ‘나자르’인데 나사렛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후손으로 그 백성을 구원할 자로 오셨습니다.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집트의 고난 가운데 버려두었습니다. 그들을 심판하였다가 바벨론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왕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해방하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의 삶에는 이집트의 노예 생활과 같은 비참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겪는 바벨론의 고통스런 삶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반복하여 바벨론 포로의 후예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셨지만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비참함을 느낄 때마다 죄의 불행을 볼 때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요셉의 가문이 아기 예수와 함께 이집트를 오가며 고난을 당했듯이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도 고난 받습니다. 우리의 회개와 고통은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이루는 데 다 연결됩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한 그 때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더 완성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경쟁하려 했던 헤롯과 같이 되지 맙시다. 왕이신 그리스도께 기쁘게 복종합시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거짓과 탐욕과 불평등이 심각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넘어서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헤롯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해 주시던 그 구원을 우리에게 이루고 계십니다.
헤롯이 아이를 죽이려 하고 그리스도는 이집트로 도망가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구원의 일을 이루십니다. 지금 우리가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연단해 가고 계십니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8절, 자세히 알아보라(엑-에타조 아크리보스)
8절의 “알아보라”와 2절의 “물었다”는 구약 히브리 성경에서 같은 단어 ‘다라셔’에서 온 말입니다. 8절에서 헤롯은 동방 박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난 곳을 ‘자세히 알아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다라셔 하-야텝’(히브리어)을 구약 헬라어 성경에서는 ‘자세히 알아보라’는 뜻으로 ‘엑-타조 아크리보스’라고 표현합니다(신 19:18).
같은 히브리어 단어 ‘다라셔’의 다른 번역은 ‘물어보다’(핀타노)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박사들의 질문을 받고 헤롯왕이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물었다”(핀타노, 헬라어, 마 2:4)라고 할 때 쓰였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자기 뱃속에서 쌍둥이가 서로 발로 차며 심하게 싸울 때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물었습니다(다라셔, 핀타노, 창 25:22). 하나님은 두 쌍둥이의 후손이 서로 다른 두 민족이 될 것인데 형의 민족이 동생의 민족을 섬길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형은 에서이고 동생은 야곱입니다. 형의 후손은 에돔 민족이고 동생의 후손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에돔의 후손인 헤롯왕은 자기가 왕이라고 위세를 부립니다. 야곱의 후손으로 태어날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자세히 알아보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은 리브가가 물어볼 때 그 답을 알려주셨습니다. 에서의 후손은 야곱의 후손에게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참고> 모세와 예수님의 비슷한 점
모세 (출애굽기 2장) | 예수님 (마태복음 2장) | |
원래 살던 곳 | 이스라엘, 이집트 | 이스라엘 |
어릴 때 피한 곳 | 이집트 왕궁 | 이집트 |
죽임당한 아이들 | 이스라엘 남자 아기 | 베들레헴 남자 아기 |
커서 피해 산 곳 | 미디안 | 갈릴리 |
떠나가다/피하다 (아네코레오) | 모세(15절) | 동방박사(12, 13절), 요셉과 예수(14, 22절) |
온다 (파라기노마이) | 제사장의 딸들(16, 18절), 모세(19절) | 동방박사(1절) |
구원 | 모세(17, 19절) | 예수님(1:21) |
찾았던 사람, “어디에 있느냐?” | 미디안 제사장이 모세를 찾음(20절) |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음(2절) |
부르다 | 제사장이 모세를 부름 (20절) |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1:21, 23, 23) |
아기의 이름을 짓다 | 모세의 아들(22절) |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1:21, 23, 23) |
함께 살다 |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과(21절) | 예수님이 나사렛에 삶 (23절) |
그 사람과 “함께” |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과(21절) | 요셉이 예수님을 함께 데리고(13, 14, 20, 21절) |
죽었다(텔류타오) | 파라오(23절) | 헤롯(19절) |
백성을 위해 한 것 |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데려감 | 온 세계에서 교회를 부르심, 하늘나라 |
모세와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1) 이집트 왕 파라오는 이스라엘 남자 아기들을 죽였는데 모세는 이집트의 왕궁으로 피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도 헤롯왕은 베들레헴 근처의 남자 아기를 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집트로 도망가서 살았습니다.
2) 모세는 왕자로 살다가 미디안에서 가난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왕이지만 말이 사는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지역인 갈릴리에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3) 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이 모세를 찾아와 같이 살면서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 동방박사들이 찾아왔고 아버지 요셉이 어린 예수를 도와주었습니다.
4) 모세를 죽이려 하던 파라오가 죽은 다음에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도 헤롯이 죽은 다음에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5) 모세와 예수님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고난을 받았습니다.
6)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고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구원했고 예수님은 죄와 마귀의 세력에서 구원했습니다.
<참고> 7절, 가만히(라트라)
헤롯왕은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서 아기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다음 히브리어를 번역한 헬라어입니다.
1) “버-마스타르”(히브리어)- 신명기 13:6,7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의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 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돌로 쳐죽이라”(10절) 했습니다.
욥기 31:27, 28에서 욥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 마음이 (태양과 달을 신으로 섬기면서)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시편 101:5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비방하는) 자는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는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2) “버-사타르”(히브리어)- 하박국 선지자는 구약 교회 바깥의 바벨론과 교회 안의 악한 자들에 대해 이렇게 탄식합니다. 3장 14절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3) “버-랕”(히브리어)- 삼상 18:22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죽게 하려고 꾀를 냅니다.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이면 다윗을 자신의 사위로 삼겠다고 하는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이고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보듯이 구약에서 ‘가만히’(라트라)는 나쁜 뜻으로 쓰입니다. 이웃을우상 숭배하도록 유혹하거나 비방하는 것,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거나 사람을 속여 위험에 빠뜨리는 것에 쓰입니다. 특히 악한 사울 왕이 “가만히” 다윗 왕을 죽이려는 음모는 악한 헤롯왕이 참된 왕 그리스도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에서도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