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
위선자를 경계
(찬송 시편 103편 – 악보는 맨 뒷장에)
2023-12-25, 월
맥락과 의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내용이 계속됩니다. 오늘 말씀은 위선을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 자신, 목사와 장로, 집사,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위선을 돌아보고 회개합시다.
1. 외식하는 지도자들을 주의하라 (1-12절)
2.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한 7개의 화 (진노의 선언, 13-36절)
3.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 (37-39절)
1. 외식하는 지도자들을 주의하라 (1-1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의 권위를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없는 복잡한 규칙을 만들고 자신도 지키지 못할 것을 가르칩니다(2-3절).
예수님은 “그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지키라.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3절). 제대로 된 가르침은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목사에게 중요합니다. 목사는 말씀을 원래의 뜻대로 정확히 가르쳐야 합니다. 불필요한 규칙들을 만들어 성도에게 짐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성실히 순종해야 하며 성도는 잘 배우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목사의 행동에 틀린 것이 있으면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사의 가르침이 성경과 다른 것이 있을 때, 그것을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목사가 자신은 실천하지 못하지만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경우, 성도들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통해 가르치시는 성령님께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불필요한 규칙을 만들어 괴롭게 해서 안 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부족함을 보더라도 그들이 가르치는 올바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지도자의 잘못에 대해 쉽게 “위선자”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진실한 마음이 있지만 실제적 실천에 부족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위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연약함입니다. 지도자의 부족을 볼 때는 비난하기보다 기도합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고 인정받고자 합니다. 경문의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합니다(5절). 경문(=성경의 글귀)은 성경 구절을 넣은 조그만 주머니를 말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마에 달았습니다.
구약 율법에 하나님의 말씀을 손목에 매고 이마에 새기라고 했습니다(출 13:1-10, 신명기 6:4-9, 11:1). 말씀을 항상 지키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성경구절을 넣은 조그만 통을 만들어 집이나 회당에서 기도할 때 그것을 이마에 달았습니다. 길거리에서 기도하며 경문을 달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주머니를 이마를 가로지를 정도로 크게 만들어 달았습니다. 말씀을 잘 지킨다는 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지킨 것입니다. 사실 성경구절을 주머니 속에 넣는 것보다 머리와 가슴에 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손발로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옷의 끝에 실을 치렁하게 늘어뜨리는 옷술을 달게 했습니다(민수기 15:38).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술을 길게 하며, 자신들은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자랑을 했습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고 인정받아 높은 자리에 있으려는 사람을 주의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6-7절). 당시 바리새인들은 랍비(선생)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참 선생은 한 분입니다(성령님), 그들은 “아버지”라는 말을 듣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모든 성도는 형제입니다. 교회의 선생도 형제입니다. 그들은 지도자라 불리우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지도자이십니다(9~10절).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일수록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고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11-12절). 교회의 직분자나 가정의 직분자인 부모는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한 7개의 화 (진노의 선언, 13-36절)
1) 12-14절: 바리새인은 외식하는 것 때문에 백성들을 잘못 가르칩니다. 천국 문을 닫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2) 15절: 그들은 열심히 전도해 교인을 얻으나 자신보다 배나 더 지옥에 빠뜨립니다. 잘못 가르치고 행하기 때입니다. 조직은 크고 교인들은 모으지만, 교인들이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3) 16-22절: 잘못된 맹세를 경고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세에 대해 이상하게 가르쳤습니다.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고,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물질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름은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맹세한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세대를 책망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계약서 쓴 것은 지키려고 애쓰면서, 하나님께 다짐한 것은 가볍게 하는 일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4) 23-24절: 그들은 남의 눈에 드러나는 십일조는 잘 드립니다. 그러나 정의(의로움), 긍휼, 믿음(신실함)을 버렸다고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율법의 형식뿐 아니라 율법의 정신 둘 다 지켜야 합니다.
5) 25-26절: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게 하는 정결의 의식을 만들어 지킵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무절제)이 가득하며 더럽습니다. 우리는 항상 회개하며, 탐욕과 방탕을 제거해야 합니다.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6) 27-28절: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겉은 아름답지만 그 안은 더러운 것이 썩어 가고 있습니다.
7) 29-36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전하는 종들을 핍박합니다. 그러면서 선지자의 무덤을 쌓고 비석을 꾸밉니다. “우리가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다면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들 스스로 선지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를 죽인 그 조상의 피가 그들에게 흐르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바로 그 순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절). 3장에서 세례 요한이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3:7).
세례 요한은 또, 그리스도가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심판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앞으로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정신 차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이렇게 쉽게 말해서 안 됩니다. 어떤 잘못을 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위선자들이 정신차리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십니다.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큰 희생을 치르셨기 때문에 이렇게 책망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누구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지식과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과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판할 때도 예수님이 하시듯 해서는 안 됩니다.
3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선지자 지혜자와 서기관들을 보내고 있다. 너희는 그들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구약 시대에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구약 백성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이제 다시 구약의 선지자의 전통을 이어갈 사도들과 목사들을 세상에, 교회에 보내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내시는 서기관들은 사도들을 말합니다. “보낸다”는 말에서 “사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세상 사람뿐 아니라 위선적인 교인들은 예수님이 보내시는 종들 (사도, 목사)을 십자가에 못박고 핍박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위선자와 핍박한 자들은 과거의 핍박(아벨-사가랴)에 대한 핏값, 그리고 앞으로 흘릴 피(예수님, 베드로, 바울, 스데반…)피에 대한 대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목사의 길, 복음 전파자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목사들이 고난 가운데서 정직하고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모두 말씀 전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달게 받읍시다.
“화 있을진저” 지금 우리 각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 경고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자기를 돌아보고 성령을 의지하며 회개하고 자신을 낮춥시다.
3.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 (37-39절)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고 탄식하십니다. 아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심판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네 (예루살렘)의 자녀를 모으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7절). “모으려” “원하지” 둘 다 같은 단어입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소원에 따라오지 않고 자기의 소원대로 했습니다.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을 암탉이 그 새끼를 모으는 것 같이 하셨습니다. 출애굽의 구원에서, 하나님이 독수리 날개로 새끼들을 안고 날아오셨다는 비유와 비슷합니다(신명기 32:11,12). 하나님이 백성을 신실하게 보호하시는 것과 백성들이 반역하는 것이 구약 시대에도 신약 시대에도 계속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부활, 성령 오심, 재림)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음으로 결국 국가적으로 멸망했습니다. 주후70년에 로마는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주님은 탄식하십니다. 출애굽 때부터 반역하는 백성을 향해 탄식하십니다. 주님의 탄식은 재림의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오신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교회에 계속 오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날 몸을 가진 분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주님께서는 통곡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보내도 순종하지 않는 교회와 시대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시편 118:26)는 유월절 때마다 부르던 시편이었습니다. 백성은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당시에도 백성들은 이 시편으로 찬송하여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제자들과 무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찬송했습니다(21:9).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메시야/그리스도”라고 찬양했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은 23:39에서 끝납니다. 가르치는 일을 끝낼 때,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야라고 선언하십니다.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실 때에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땅의 인생을 끝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그를 죽인 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모릅니다.
하늘에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는 재림의 왕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재림하시는 왕을 보고 인정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님을 주님(여호와)로 믿은 성도는 기쁨으로 외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두려움 가운데 인정할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성부 하나님)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요한계시록 6:16).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 따뜻한 초대를 받아들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아갑시다.
믿고 복종할 일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사랑으로 품기 위해 심판의 말씀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경고하시는 말씀 가운데, 우리를 돌이키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도록 회개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외식하지 말고 위선자가 되지 맙시다. 위선을 행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이 위선을 행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계속 위선을 행하면 자기가 위선적 행동을 하는 것도 모릅니다. 항상 말씀 앞에 설 때 위선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부족을 돌아보며 기도해야 위선이 조금이라도 싹틀 때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겉으로 드러난 경건의 형식에만 열심을 내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신앙의 실재를 회복하고 삼위 하나님을 실제로 경외하며 경배합시다. 말씀을 배우기만 하지 말고 그대로 순종합시다.
가르치는 자가 말씀을 바르고 용기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신이 가르친 내용대로 순종하여 살도록 힘씁시다. 사람이 보기에 화려한 말을 하는 사람들 따르지 말고 정직하게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귀하게 여깁시다. 성실하게 교회를 섬기는 장로, 집사를 존중합시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재림의 날의 영광을 주십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위로하시는 것을 체험하기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복을 지금 여기서 주십니다. 이 순종과 다스림의 복은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고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의 악과 약함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시대의 어둠을 볼 때 분노하지 맙시다. 죄와 육신과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오시는 삼위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찬양 가운데 기뻐하며 죄와 어둠과 싸워 승리합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37절, “모으려…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네 (예루살렘)의 자녀를 모으려(텔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텔로) 아니하였도다”(37절). 둘 다 같은 단어입니다. ‘텔로’는 ‘원한다. 의지로 지향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소원에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참고> 35절, 사라갸의 피
역대하 24:20-22. 사가랴는 이스라엘의 남북 분단 때의 대제사장이며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유다의 10대 왕 요아스(주전 835-796년)가 우상숭배를 할 때 책망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사가랴를 감동시키셨습니다.
그 백성이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렸다”고 그는 선언하였습니다(20절). 그들은 경고를 듣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대신 백성이 함께 “꾀했습니다”(21절). 반역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가진 선지자요 대제사장에게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요아스 왕은 명령하여 성전 뜰에서 사가랴를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사가랴는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보시옵소서, 여호와여, 찾으소서.” 그는 여호와께서 이러한 현실을 보시고 보복하여 주시기를 구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요아스 왕은 인간적으로 볼 때도 배은망덕했습니다. 사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 대제사장이 요아스가 아기 때 죽음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요아스가 7살 때에는 여호야다가 그를 왕으로 기름부어 세웠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그의 아들인 사가랴 대제사장-선지자를 죽였습니다.
※ 유튜브에서 “정영철 시편 103편”을 검색하여 들으며 연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