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 창동역사문화공원(도봉구민회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세 분의 동상은 일제강점기 말기, 서슬 퍼런 일제의 압제와 변절의 유혹을 뿌리치고 창동에 은거했던 세 분의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이 세 분을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는 뜻의 **창동 3사자(倉洞 三獅子)**라 불렀습니다. 1930~40년대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도봉구 창동)는 외지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기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은둔하며 뜻을 나누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1. 가인(街人) 김병로 (1887~1964)
"법을 통해 민족을 지킨 사법부의 거인"
가인 김병로 선생은 구한말 의병 활동을 시작으로, 항일 투쟁과 대한민국 사법부의 기틀을 다진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입니다.
창동과의 인연: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해 독립운동가들의 변론마저 금지당하자, 1934년 창동으로 내려와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은거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창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송진우, 정인보 선생도 차례로 창동으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주요 업적: 일제강점기 시절 김상옥 의거,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굵직한 시국 사건의 변론을 도맡아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며 사법부의 독립과 청렴성을 상징하는 영원한 귀감이 되었습니다.
2. 고하(古下) 송진우 (1890~1945)
"언론과 교육으로 민족의 깨움을 이끈 지도자"
고하 송진우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언론과 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우고, 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설파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입니다.
창동과의 인연: 일제 말기, 전쟁 동원 협조와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는 일제의 집요한 변절 압박을 거부하고 김병로 선생이 있는 창동으로 들어와 함께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동상에서는 8·15 광복의 기쁨을 상징하듯 태극기를 들고 계신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요 업적: 3·1 운동의 막후 기획자 중 한 명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며 브나로드 운동(농촌계몽운동)과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운동 등을 이끌었습니다. 해방 후 민족의 건국 준비를 주도하던 중 안타깝게도 1945년 12월 암살당하셨습니다.
3. 위당(爲堂) 정인보 (1893~1950)
"조선의 '얼'을 강조한 민족사학의 등불"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인 **'조선의 얼'**을 정립하고 고취한 국학자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창동과의 인연: 동아일보 등에 민족 사학 논문과 연재를 이어가던 중, 일제의 사상 통제가 극에 달하자 붓을 꺾고 창동으로 내려와 김병로, 송진우 선생과 함께 민족의 미래를 논하며 지조를 지켰습니다.
주요 업적: 신채호, 박은식 선생의 뒤를 이어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사학을 발전시켰습니다. 해방 후에는 감격스러운 **'광복절 노래'**를 비롯해 개천절, 삼일절, 제헌절 등 대한민국 4대 국경일의 노래 가사를 모두 작사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6·25 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를 달리하셨습니다.
'창동 3사자'가 남긴 유산
일제는 이 세 분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당시 양주경찰서에 특별히 고등계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을 정도였습니다. 창동역사문화공원의 동상은 암흑 같던 시절에도 변절하지 않고 꿋꿋이 민족의 자존심과 지조를 지켜낸 세 선각자의 숭고한 숨결을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