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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3사자

작성자Jote|작성시간26.06.23|조회수5 목록 댓글 0

서울 도봉구 창동역사문화공원(도봉구민회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세 분의 동상은 일제강점기 말기, 서슬 퍼런 일제의 압제와 변절의 유혹을 뿌리치고 창동에 은거했던 세 분의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이 세 분을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는 뜻의 **창동 3사자(倉洞 三獅子)**라 불렀습니다. 1930~40년대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도봉구 창동)는 외지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기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은둔하며 뜻을 나누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1. 가인(街人) 김병로 (1887~1964)

​"법을 통해 민족을 지킨 사법부의 거인"

​가인 김병로 선생은 구한말 의병 활동을 시작으로, 항일 투쟁과 대한민국 사법부의 기틀을 다진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입니다.

​창동과의 인연: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해 독립운동가들의 변론마저 금지당하자, 1934년 창동으로 내려와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은거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창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송진우, 정인보 선생도 차례로 창동으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주요 업적: 일제강점기 시절 김상옥 의거,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굵직한 시국 사건의 변론을 도맡아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며 사법부의 독립과 청렴성을 상징하는 영원한 귀감이 되었습니다.

​2. 고하(古下) 송진우 (1890~1945)

​"언론과 교육으로 민족의 깨움을 이끈 지도자"

​고하 송진우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언론과 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우고, 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설파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입니다.

​창동과의 인연: 일제 말기, 전쟁 동원 협조와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는 일제의 집요한 변절 압박을 거부하고 김병로 선생이 있는 창동으로 들어와 함께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동상에서는 8·15 광복의 기쁨을 상징하듯 태극기를 들고 계신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요 업적: 3·1 운동의 막후 기획자 중 한 명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며 브나로드 운동(농촌계몽운동)과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운동 등을 이끌었습니다. 해방 후 민족의 건국 준비를 주도하던 중 안타깝게도 1945년 12월 암살당하셨습니다.

​3. 위당(爲堂) 정인보 (1893~1950)

​"조선의 '얼'을 강조한 민족사학의 등불"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인 **'조선의 얼'**을 정립하고 고취한 국학자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창동과의 인연: 동아일보 등에 민족 사학 논문과 연재를 이어가던 중, 일제의 사상 통제가 극에 달하자 붓을 꺾고 창동으로 내려와 김병로, 송진우 선생과 함께 민족의 미래를 논하며 지조를 지켰습니다.

​주요 업적: 신채호, 박은식 선생의 뒤를 이어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사학을 발전시켰습니다. 해방 후에는 감격스러운 **'광복절 노래'**를 비롯해 개천절, 삼일절, 제헌절 등 대한민국 4대 국경일의 노래 가사를 모두 작사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6·25 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를 달리하셨습니다.

​'창동 3사자'가 남긴 유산

일제는 이 세 분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당시 양주경찰서에 특별히 고등계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을 정도였습니다. 창동역사문화공원의 동상은 암흑 같던 시절에도 변절하지 않고 꿋꿋이 민족의 자존심과 지조를 지켜낸 세 선각자의 숭고한 숨결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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