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寧越)과 단종애사(端宗哀史)4
영월군수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단종이 서거한 후 영월군수로 부임한 군수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영월부 읍지(寧越府 邑誌)에 보면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에 부임한 박세호(朴世豪), 신축년(辛丑年, 1541, 中宗 36) 5월에 부임한 권수중(權守中), 같은 해 5월에 새로 부임한 연현령(延玄㱓) 등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다음으로 군수직을 제수(除授) 받은 김희성은 아예 부임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영월군수직은 비어있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관아 건물은 퇴락(頹落)하고 지방 관족(官族)들과 토호(土豪)세력들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도둑떼들까지 들끓어 백성들의 생활이 걷잡을 수 없이 어려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승문원교검(承文院校劍)으로 있던 박충원(朴忠元)이 영월군수직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승문원(承文院)-조선시대 문서를 관리하던 관청으로 교검(校檢)은 정6품
박충원(朴忠元)은 신축년(辛丑年, 1541, 中宗 36) 9월 초에 부임하게 되는데 병오년(丙午年, 1546, 明宗 1) 정월에 후임 민종건(閔宗騫)이 부임 할 때까지 약 5년 간 재임하였다.
박충원은 부임 첫날밤,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동헌에 불을 밝히고 앉아있는데 과연 혼령이 나타났다. 박충원은 혼령이 단종임을 알아보고 “전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이시나이까?”라고 물으니 단종은 자신의 묘에 제사를 지내주면 큰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박충원은 관속(官屬)들을 풀어 엄흥도의 친척을 찾아내어 단종 시신이 묻힌 곳을 찾아 나섰는데 동을지산(冬乙支山)에서 가시넝쿨에 쌓인 단종의 묘를 찾아내어 봉축(封築)하고 제를 지냈다.
제문은 “왕실의 맏이요, 어리신 임금이시여, 비색(否塞)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 청산에 만고의 고혼(孤魂)으로 누워계시나이다. 바라건대 강림(降臨)하시어 제수(祭需)를 흠향(歆饗)하소서.”였다는 기록이 있다.
숙종 17년(1681)에 이르러 노산군은 노산대군으로 추봉(推捧)됐고, 숙종 24년(169)에 노산대군을 단종(端宗)으로 추상(追上)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
단종이 쌓은 망향비(望鄕碑) / 관음송(觀音松) / 왕방연(王邦衍) 시조비 / 청령포 금표(淸泠浦禁標)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에 의해 즉위 3년 만에 상왕(上王)으로 밀려났다가 노산군(魯山君)으로 격하(格下)되어 영월로 유배(流配)되어 오게 되는데 1457년 6월로 당시 17세였다.
처음 유배되어 머물던 곳이 청령포(淸泠浦)였는데 곧바로 장마가 시작되어 강이 범람하자 2개월 머물다가 영월 관아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 2개월, 결국 유배 4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열일곱 살 소년으로 아무것도 몰랐을 단종은 수양대군의 횡포에 중신(重臣)들이 들고 일어나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자 수양대군은 단종을 위시하여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감행하는데 사육신(死六臣)이 그들로, 어찌 보면 단종은 아무것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의금부도사(義禁府道使)였던 왕방연(王邦衍)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 올 때 호송책임자였다고도 하고, 다른 기록에는 수양대군의 명으로 사약을 가지고 왔다고도 한다.
아래의 시조(時調)는 왕방연이 읊은 시조인데 단종을 영월로 호송하고 돌아가면서 그 서글픔을 노래한 것이라는 설, 또는 사약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단종 앞에서 차마 말을 못하고 흐느껴 울자 옆에 시중들던 공생(貢生), 혹은 공(功)을 세우려고 나선 포졸(捕卒)이 활시위 줄로 단종의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고 하는데 그 아픔을 노래한 시조라고도 하며, 이 시조는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전한다.
이 왕방연의 시조비(時調碑)는 청령포가 건너다보이는 언덕위에 세워져 있고 단종이 기거하시던 청령포의 어소(御所) 앞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당시 세워졌던 금표(淸泠浦禁標)가 세워져 있다.
또 청령포 어소(御所) 부근에는 단종이 한양을 그리워하며 손수 쌓았다는 망향탑(望鄕塔), 단종의 서글픈 모습을 지켜보고(觀) 그 비탄의 소리(音)를 들었다는 관음송(觀音松) 소나무도 있다.
※공생(貢生)-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에서 공부하던 유생(儒生)
懷端宗而作時調(회단종이작시조) - 王邦衍
千里遠遠道(천리원원도) 美人別離秋(미인별리추)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此心未所着(차심미소착) 下馬臨川流(하마임천류)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천류역여아) 鳴咽去不休(명인거불휴)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여의다-멀리 떠나보내다. 죽어 이별하다. ※예놋다-‘가다, 흘러가다.’ 라는 의미의 고어(古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