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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시이 시로` 그를 악마(惡魔)라 부르는 이유와 731부대

작성자묵은지|작성시간16.09.01|조회수1,899 목록 댓글 0


글,편집: 묵은지

*일본군 중장 시절의 이시이 시로

사람이 짐승의 탈을 쓰게되면 어떤 모습으로 까지 변할 수가 있을까요? 과연 사람이 악마(惡魔)가 될 수 있을까요? 묵은지는 이 글을 쓰면서 경악(驚愕)을 금치 못하며 당시의 자료(資料)를 한가지 한가지 대할 때 마다 일본이 자행(恣行)한 침략전쟁(侵略戰爭)이 얼마나 잔혹(殘酷)했는지를 새삼 놀라움으로 치(齒)를 떨었습니다. 특히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에 주둔(駐屯)했던 731부대(部隊)의 잔학상(殘虐上)은 사람으로써 정말로 상상조차 하기힘든 너무도 끔찍한 일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憤怒)가 끓다못해 있는대로 치밀어 오릅니다. 전쟁(戰爭)에 져 패망(敗亡) 할 당시 후환(後患)이 두려운 그들은 증거(證據)를 없애려 모든걸 폭파(爆破)하고 불태워 묻어버렸지만 세월이 흐르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증언(證言)과 묻혀진 유물(遺物)의 발굴(發掘)에 의해 차츰 그들의 악행(惡行)이 만천하(滿天下)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731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자료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렇게 공분(公憤)을 일으킨 만행(蠻行)의 전방위(全方位)에는 다름아닌 '이시이 시로'라는 일본군(日本軍) 장성(將星)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의관(軍醫官) 출신(出身)으로 중장(中將)의 계급까지 오른 자(者)로써 교토제국대학 의학부(醫學部)를 수석(首席)으로 졸업하고 2년간의 해외(海外) 유학(留學)까지 다녀온 사람이었습니다. 해외 유학 시절에 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세균(細菌) 병기(兵器)를 공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32년 '일본 육군 전염병 예방 연구소' 라는 의무부대 사령관(司令官)의 직책(職責)에 오르게 됩니다.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위치한 폭파되기 직전의 731부대 전경.

              *전쟁에서 일본의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자 증거를 없애기 위해 파괴해 버린 731부대 당시 전경.

훗날 이 부대가 '관동군 방역급수부' 부대와 통합(統合)되고 또다시 그 일명(一名) '마루타' 로 악명(惡名)높은 '731 부대'로            *731 부대 창설 당시의 이시이 시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이 731부대에서 이시이 시로는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갖가지 동원된 수법이 인간으로써 도저히 행(行)할 수 없는 방법이었기에 치를 떨게 됩니다. 아무리 일본 군부(軍部)의 지령(指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생사람을 대상으로 너무도 충격적(衝擊的)인 실험(實驗)을 자행했던 것인데 이시이 시로는 군의관(軍醫官)의 신분(身分)으로 숭고(崇高)한 사람의 생명(生命)을 가지고 해서는 안될 갖은 생체실험(生體實驗)을 서슴없이 해 대며 수많은 인명(人命)을 고통의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오죽하면 731부대를 이시이 부대라고 까지 했겠습니까. 여기서 마루타(丸太)라는 말은 일본어로 '통나무'라는 뜻입니다. 일본군은 생체실험 대상자(對象者)들을 마루타로 불렀습니다. 또한 731부대를 일본군들 끼리는 나무를 자르는 '제재소(製材所)'라고 불렀다고하니 그들이 사람을 마치 나무토막 자르듯이 했다는 것이 용어(用語)에서도 증명이 됩니다.              



                                            *731 부대원과 직접 생체 실험을 했던 가담자들.

처음 이곳 관동군 방역급수부 부대는 만주지역에 주둔한 일본군들의 식수(食水)를 해결(解決)하는 역할(役割)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만주지역의 물은 식수로 사용하기에 적절치 못한 탓으로 물로 인한 전염병(傳染病)이 자주 발생하여 전력(戰力)에 상당한 손실(損失)을 끼쳤다고 합니다. 이에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깨끗한 물을 공급(供給)하고 방역(防疫)과 소독(消毒)을 하는 임무를 수행(遂行)하던 부대였습니다. 실제로 이시이 시로는 자신(自身)이 개발(開發)한 정수기(淨水器)로 일본군 고위(高位) 간부(幹部)들 앞에서 스스로 오줌을 걸러 마시는 시음회(試飮會)를 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시이 시로의 일당들이 생체실험을 위해 시신의 내장을 들추어 내고 있다.

그런데 평범했던 방역급수부 부대가 1941년도에 들어서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붙들려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돌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부대안 여기저기서 비명(悲鳴)소리가 난무(亂舞)하고 피비린내가 진동(振動)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부대 명칭(名稱)도 관동군 방역급수부에서 731부대로 바꾸고 이시이 시로의 구상(構想)대로 본격적(本格的)인 사람들을 대상으로한 생체실험에 들어가기 시작 했습니다. 이들의 생체실험은 다양한 분야(分野)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실험 방법 또한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괴기(怪奇)와 공포(恐怖)를 연상하는 그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실험 연구한 세균은 실제 전투에서 활용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직접 죽여보는 무자비(無慈悲)한 생체실험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마취(痲醉)도 없이 실험을 가한 이유는 실험의 효율(效率)을 높인다는 명분(名分)이었고 부패(腐敗)를 막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실험의 종류(種類)는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세균(細菌)실험은 이들의 주요(主要) 실험이었는데 처음에는 수용자(收容者)들에게 예방접종이라 위장(僞裝)하며 감염(感染)시켰고 세균을 넣어만든 만두를 먹이기도 했으며 세균에 오염(汚染)된 벼룩을 대량으로 붙잡혀온 사람들이 갇힌 수용소 감방 안에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참혹함을 양심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일본인.

이들의 생체실험은 점점 그 종류를 다양화(多樣化)하여 동상(凍傷) 치료법을 알아내기 위해 사람을 얼리고 얼은 팔 다리를 망치로 두드리거나 톱으로 잘라내는가 하면 대형 원심분리기(遠心分離器)에 사람을 집어넣고 고속(高速)으로 회전(回轉)시켜 인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분출(分出)되는 과정을 알아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진공압력(眞空壓力)실험이라하여 압력실에 사람을 넣고 서서히 공기를 빼내 사람의 눈알과 내장이 어느 정도의 압력에서 튀어나오는지, 밀폐(密閉)된 공간(空間)에 사람을 가두고 청산가스를 주입(注入)해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觀察)하는 등 정말이지 사람의 정신(精神)을 지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만을 저질렀습니다. 그 밖에도 신무기(新武器)의 연구나 실험, 병기(兵器)의 성능(性能) 실험에도 예외없이 마루타를 이용하였습니다.

윤동주 시인(詩人)도 이 인체실험의 희생자(犧牲者)로 알려졌는데 윤동주 시인의 몸에 있는 피를 빼내고 동물(動物)의 피를 주입하여 생존의 반응을 보는 실험으로 윤동주 시인은 엄청난 고통(苦痛)을 당하며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합니다. 피를 보면 눈이 뒤집히는 악마, 이시이 시로는 자신이 직접 실험에 앞장서며 시신(屍身)의 내장(內臟)을 들추어 내는 일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생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마취도 하지않은 채 배를 가르고 팔다리를 잘라내는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도살자(屠殺者) 이시이 시로는 절대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피에 굶주린자였습니다.   

수용소 실험실내에는 마루타에게서 잘라낸 신체부위(身體部位) 등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곳에 잡혀온 사람들은 대개 중국인이 많았지만 한국인과 러시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전쟁중에 인명살상(人命殺傷)에 필요한 실험은 이곳에서 닥치는대로 잡아들인 사람들을 마루타로 이용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실험이 끝나면 곧바로 전쟁에 활용하였는데 세균실험에서 만들어진 도자기(陶瓷器) 세균폭탄은 실전(實戰)에 투입하여 '콜레라','흑사병','탄저병' 등 수많은 인명에게 손실(損失)을 초래(招來)하였습니다.    


                       *모든 실험은 마취없이 실시하여 엄청난 고통속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이시이 시로는 실험 대상자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닥치는대로 실시했다.

731부대는 아시아의 '아우슈비츠' 였으며 이시이 시로는 일본의 '괴벨스'였습니다. 같은 일본인(日本人)이라 하더라도 이곳으로 새로 전입(轉入)해 온 나이어린 신참(新參)들은 이 부대의 잔인한 통과의례(通過儀禮)를 실시했습니다. 이 부대의 절대권력(絶對權力)을 가진 이시이 시로는 나이어린 신참에게 마루타 가운데 아무나 골라 맨손으로 때려 죽이게 하는 전통을 세웠는데 이것은 병사 가운데 행여 마음이 약해 마루타를 불쌍히 여긴다거나 하는 일을 막으며 그야말로 마루타를 사람으로 여기지 못하게 하고 이곳에 있는 일본군 모두에게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동질(同質)의식을 심어 주려는 의도(意圖)가 다분히 깔려있는 잔인하고 유치한 방법입니다.   


*.731부대원이 마루타를 죽이는 일은 늘상있는 식은죽 먹기다. 

*.우물이나 대량 식수에 투하시킬 세균탄

 1892년에 일본의 치바현에서 태어난 이시이 시로(石井四郞)는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醫學)을 전공(專攻)했습니다. 수석(首席)을 차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성격이 매우 이기적이고 뻔뻔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이시이 시로는 유럽으로 유학(留學)을 하면서 값싸고 저렴한 비용(費用)으로 만들수 있는 전쟁무기가 세균무기라는 것을 간파(看破), 이를 당시 일왕(日王)인 히로히토에게 보고하여 하얼빈에 일왕 직속(直屬)의 세균전 부대를 설립(設立)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시골에서 농사(農事)를 짓던 형제들까지 이 부대로 불러들여 민간인(民間人)으로써 고등관(高等官)으로 복무를 시켰으며 특히 조카인 '이시이 나가데'에게는 마루타를 공급(供給)하는 책임자로 임명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끔찍한 고통속에 숨지게한 그런 사람의 탈을 쓴 악마로써 자신은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며 일본군 중장으로 장군(將軍)까지 승진(昇進)한 사람입니다.

                                                                     *이시이 시로와 그의 가족.

그의 손에 실험용(實驗用)으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지금까지 기록상(記錄上)으로 밝혀진 숫자만도 무려 1,500여명의 수를 넘어섰으며 실제로 실험에 희생(犧牲)된 숫자는 만여명도 훨씬 넘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1,500여명의 숫자는 기록상에 남겨진 것으로 실험의 성공적(成功的)인 성과(成果)기록에 기준한 것이며 만여명이 넘는 희생자의 숫자는 증언자(證言者)의 진술(陳述)을 토대로 그밖의 실험에서 실패(失敗)하거나 제외(除外)시켜 기록 자체가 삭제(削除)되어 어떠한 서류에도 기록되지 않은 숫자로 이런 내용의 희생자가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추측(推測)하여 어림잡은 숫자입니다.      

일제(日帝)가 패망(敗亡)을 한 후에 그렇게 악행(惡行)을 일삼았던 이시이 시로와 그 일당(一黨)들은 당연히 죄(罪)의 댓가를 톡톡히 치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일인지 놀랍게도 전범(戰犯)으로 처벌(處罰)을 받지 않았으며 직접적인 관련자인 731부대 요원(要員)들 대부분은 일본 사회 각계(各界)에서 성공한 일생(一生)을 보냈습니다. 이시이 시로 역시 여러 사업(事業)에 손을 대 성공을 하여 여유로운 일생을 살다 1959년, 67세의 나이에 식도암(食道癌)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저지른 이루말할 수 없는 악행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말도 않되는 편안한 죽음이었고 어이없는 결과였습니다.


                                    *731부대 요원들이 사용했던 각종 수술 도구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전후(戰後)에 들리는 입소문으로는 이시이 시로는 자신의 실험 정보(情報)를 미군(美軍)과 거래(去來)를 하면서 전범자(戰犯者) 면죄부(免罪符)를 받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생생한 기억을 하고있는 증언자(證言者)들도 많은데 어떻게 그들이 편안한 여생(餘生)을 마칠수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 술 더떠서 일본은 이시이 시로를 의료계(醫療界)에 큰 공로(功勞)를 한 군의관으로 대접하고 있다니 도대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마루타 학살 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 전범들은 전후 일본에서 상류층 대접을 받으며 잘살았다. 

심지어는 교토대학 바로 앞에 이시이 시로의 행적(行跡)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세워 그의 업적(業績)(?)과 그가 개발(開發)한 소형 정수기, 접이식 방독면 등을 전시(展示)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1988년에 이런 역사의 진실(眞實)을 중국에서 731부대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題目)은 '흑태양 731'인데 한국에서도 '마루타' 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에 731부대의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영화를 보는 관람객(觀覽客)들은 한결같이 극심한 공포감(恐怖感)으로 떨면서 보아야 했다고 합니다. 필자인 묵은지도 그 영화를 보았는데 설마 사람이 저럴수가 있겠나 하는 생각으로   

솔직히 안이(安易)한 마음이었으며 영화이기 때문에 좀 과장(誇張)된 것이 아니었겠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731부대가 있던 자리에서 계속 발견되고있는  참혹(慘酷)한 흔적(痕跡)의 내용들이 만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내가 역사(歷史)의 진실 앞에 내 생각을 너무 가볍게 여겼구나' 하는 뉘우침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상처나 후유증(後遺症)을 앓고있는 가족들이 엄연히

살고 있으며 그들은 과거(過去)의 악몽(惡夢)에 지금까지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만행(蠻行)을 저질렀던 이시이 시로나 그 일당들은 패전국(敗戰國)이었던 일본이란 나라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정녕 악마(惡魔)의 저주(詛呪)가 내려져야할 그들에게 하늘은 역사의 심판(審判)마저 외면(外面)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전후 70년이 넘어 희생자의 유족(遺族)이나 극적(劇的)으로 목숨을 부지(扶持)했던 생존자(生存者)가 거의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흐른 지금, 하얼빈에는 이들의 만행을 알리는 기념관도 있다지만 아직까지 그 죄악(罪惡)의 실체(實體)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악마들을 자신들의 위대한 영웅(英雄)으로 쳐받들고 있는 뻔뻔한 일본이 과연 세상 사람들 앞에 언제까지 모르쇠와 부인(否認)으로 버티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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