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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부른 다수결(多數決)

작성자묵은지|작성시간17.01.20|조회수619 목록 댓글 0

소크라테스

多數決


글,편집: 묵은지

'너 자신을 알라' 철학자(哲學者) '소크라테스'의 말입니다. 고대(古代)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사실 자신이 직접 쓴 어떠한 철학적인 글 하나 남기지 않았던 그런 철학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서양철학(西洋哲學)의 아버지'로 추앙(推仰)을 받고 있는 것이 묵은지로서도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우리가 흔히 소크라테스에 대해 알고있는 그의 삶이나 일화(逸話), 행적(行跡) 등 모든 이야기들은 대개 그의 제자(弟子)인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등 수많은 제자들의 저서(著書)나 기록(記錄)을 통해 애매모호(曖昧模糊)? 하게나마 알게된 것들이어서 그나마 그를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여하튼 이런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어린시절, 아테네에서 석공(石工)인 아버지 밑에서 석공일을 도우며 평범한 가정속에 자란 인물로 보여집니다. 

소크라테스가 세상(世上)에 태어나 자신의 철학을 구가(謳歌)하며 살던 시기는 기원전 5세기경으로 '아테네 제국(帝國)'이 정치적(政治的)으로나 문화적(文化的)으로 전성기(全盛期)와 쇠퇴기(衰退期)가 서로 동시에 교차(交叉)하는 격동(激動)의 시기였으며 또한 주변국가(周邊國家)와 전쟁이 잦은 때 였기에 결코 안정된 생활 여건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산파(産婆) 일을 하는 어머니와 석공일을 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그리 넉넉치 못한 집안 형편이었기에 아버지의 석공일을 도우며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가세(家勢)가 어렵다보니 결혼 역시 늦은 나이인 50세에 들어서야 세상사람 모두에게 악처(惡妻)로 익히 알려진 그 유명한 여인 '크산티페'와 결혼을 하게되고 슬하(膝下)에 두 자녀를 두게 됩니다.

그런데 여담(餘談)입니다만, 우리가 지금까지도 그의 부인인 크산티페를 주저없이 악처라 부르기는 하지만 이 부분은 모두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로 여겨집니다.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묵은지가 생각을 해봐도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되집어 보면 이역시 어느정도 크산티페의 억울함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처지에 돈벌이는 아예 제쳐두고 허구헌날 오가는 사람들과 씨알데없는(?) 논쟁(論爭)이나 벌이는 무능(無能)한 자기 남편에 대해 과연 어떤 부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리 너그러울 수가 있을까요? 어찌보면 크산티페는 도리어 생활력(生活力)없는 무능한 남편을 끝까지 보살피고 지켜낸 악처가 아닌 현모양처(賢母良妻)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됩니다.

어찌되었던 소크라테스는 그 당시 자신의 철학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은 대단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소크라테스 이전(以前)의 철학은 소위 '우주(宇宙)의 진리(眞理)'를 위주로한 넓은 의미의 철학이었던 것에 반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자기 자신의 진리를 찾는 내면(內面) 철학이었기에 그 당시 시대상(時代相)으로 비추어 보았을때 젊은이들에게 실질적(實質的)인 새로운 논리가 가슴에 와 닳는 내용으로 큰 호응(呼應)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40세를 전후(前後)로 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完成)하고 설파(說破)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많은 추종자(追從者)와 제자를 두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귀족(貴族) 출신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심취(心醉)한 나머지 정치적인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抛棄)하고 오로지 철학에 빠져들기까지 하였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나이 60을 넘겨서 만난 제자였습니다. 아테네 명문가(名門家) 출신의 플라톤은 한때는 정치적인 야망(野望)을 갖기도 하였으나 서로 죽고 죽이며 헐뜯고 모함(謀陷)이나 하는 정치판에 환멸(幻滅)을 느끼던차에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스무살 젊은 혈기(血氣)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집요(執拗)하기까지한 철학적 견해(見解)에 감동(感動)을 받게되었고 그의 철학에 빠져 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의 일이지만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철학을 이어받고자 플라톤은 현대(現代) 대학(大學)의 시초(始初)인 '아카데메이아'를 설립(設立)하여 소크라테스가 많이 등장하는 내용의 유명한 '대화편(對話篇)'이나 '정치학(政治學)', '윤리학(倫理學)', '형이상학(形而上學)', '인식론(認識論)' 등을 강의(講義)와 저술을 하였으며 그도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의 대가(大家)인 제자를 두기까지 했습니다. 이후에도 아카데메이아는 무려 천년의 세월 동안을 학당(學堂)으로서의 명성(名聲)을 이어갔습니다.   

암튼 소크라테스는 한마디로 매우 못생겼는데 그 정도가 어느 수준이었는가 하면 앞이마가 훌렁 벗겨진 대머리에 눈알이 툭 불거져 나오고 코는 양옆으로 뭉개진 모양인 사실 굳이 외모(外貌)로 따진다면 정말 보잘것 없이 형편없는 몰골(沒骨)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업친데 덥쳤다고나 할까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은 외모를 중요시 하여 번듯한 외모에 격(格)을 갖추고 멋을 잘 내는 사람들이 출세(出世)를 하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부류(部類)들을 몽땅 제치고 그런 사회에서도 유명한 철학자로 명성을 날리며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한창시절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건강한 젊은이면 누구나 당연히 겪어야 하는 군인으로서도 세번의 전장(戰場)에 나가 전투(戰鬪)를 치뤘으며 이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난 것이 소크라테스가 유일하게 아테네를 벗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많큼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활동 영역(領域)을 아테네 밖으로 벗어나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한때는 아테네의 민회(民會) 기구인 '500인회'의 회원(會員)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뿐 자신의 철학을 위한 활동외에는 굳이 관심을 두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생활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행동반경(行動半徑)도 지극히 제한하며 오로지 자신의 철학만을 일상적(日常的)으로 위했던 그가 어쩌다가 아테네의 법정(法廷)에 세워져 많은 배심원(陪審員)들의 판결(判決)로 사형(死刑)을 언도(言渡)받기까지 하였을까요? 상당한 고령(高齡)인 그의 나이 70세에 어찌하여 독배(毒盃)를 마시고 죽음을 맞아야 할 정도의 죄를 졌는지 그저 묵은지로서는 의아(疑訝)하기만 합니다. 일단 아테네의 법정에서 다수결의 판결로 죽음을 부른 소크라테스의 죄명(罪名)과 형량(刑量)을 밝혀보면 그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죄인(罪人)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믿는 신(神)인정(認定)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모신 죄와 젊은이들을 타락(墮落)시키는 죄까지 범하였다"라며 이 죄의 형벌(刑罰)로 사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악법(惡法)도 법(法)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이때 독배를 마시기전 어이없는 판결로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둔 스승에게 제자들이 도망을 할 것을 권하였지만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과 법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독배를 마시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부터 죽음으로까지 이른 것을 목격하고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辯論)'에서 밝힌 내용과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의 회상(回想)' 의 책에서는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유죄(有罪) 판결을 받게 되었는지에 각각의 다른 견해(見解)를 내놓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폭압정치(暴壓政治)를 일삼았던 자들도 있어 스승이 그들의 죄를 대신했다는 것이나 법정에서 자신의 혐의(嫌疑)에 대한 건방지고 무리한 변론(辯論)으로 배심원들의 미움을 부채질 했다는 이야기는 그 근거(根據)가 뚜렷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정보(情報)에 비춰 보았을 때 어느 것 하나 비껴갈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어찌되었던 소크라테스는 새 정권(政權)의 실력자(實力者) '아뉘토스'의 하수인(下手人)인 시인(詩人) '멜레토스'에게 상당한 미움을 사게되어 고소(告訴)를 당했고 결국 아테네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360:140, 이 숫자는 아테네 법정에서 500명의 배심원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유죄와 동시에 사형을 확정시킨 배심원들의 다수결(多數決) 숫자입니다. 그 어떤 나라보다 '민주제도(民主制度)'가 가장 잘 이루어진 아테네는 정치적인 것이나 모든 법률적인 것에 '과반수(過半數)'의 찬성(贊成)으로 결정하는 민주제도를 도입(導入)하여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다수결에는 다수결이 지닌 모순(矛盾)과 소수의 지나칠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수결로 결정된 소크라테스의 사형확정은 그 죄목상(罪目上)으로 보았을때 죄의 무게보다도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意圖)와 개인의 감정(感情)이 개입(介入)되었으며 내용의 실체(實體)도 모른체 오로지 일당(日當)만을 챙기려 나온 배심원들이 단지 기분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유죄에 손을 들어 과반수를 넘기게 한, 그래서 한사람의 인생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가버린 다수결의 우(憂)를 범하게 된 경우의 사례(事例)입니다. 

아테네 법정에 참석한 배심원 대부분은 소크라테스가 저질렀다는 죄의 혐의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앞서 얼마나 많은 비율(比率)의 사람들이 어느 쪽으로 몰리고 있는 것인지를 보려했으며 다수(多數)라고 여기는 곳으로 마음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결국 각자 개인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기 보다는 전체의 대세(大勢)를 따랐다는 결과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다수결에 결정되는 집단적 민주주의의 모순은 결과에 따라서는 엄청난 실책(失策)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如實)히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법리적(法理的) 판단에는 신중(愼重)함이 있어야합니다. 다수의 판단에서도 소수의 의견은 반드시 존중(尊重)되어야하는 것이 마땅하며 집단적 민주주의인 다수결은 어떤 문제를 해결(解決)하는 방법가운데 반드시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銘心)해야 할 것입니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 하였지만 그곳에 참석한 배심원들은 그의 말을 듣기 보다는 법정 분위기(雰圍氣)를 이끄는 어떤 보이지 않은 세력에 휘둘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항변을 듣지도 않고 졸고있는 배심원들을 향해 심하게 꾸짖기까지 하였다니... 어쩌면 그의 미움은 자신이 자초(自招)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는 이른바 그들 사회에서의 지식층(知識層)을 자처(自處)하는 '소피스트'들의 군웅할거(群雄割據)로 궤변(詭辯)이 난무(亂舞)하고 지식(知識)의 혼란(混亂)을 가져오며 온 사회가 그들의 논리로 들끓고 있던 때였기에 소크라테스의 등장은 관심(關心)의 대상이었고 그많큼 그들로 하여금 경계(警戒)의 대상(對象)으로 시기와 미움을 사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미움의 대상은 집단적 민주주의를 이용하여 '마녀사냥' 하듯 다수로 몰아쳐 버릴수 가 있습니다. 적어도 주도(主導)하는 쪽의 세력이 언변(言辯)이 좋고 재력(財力)과 지인(知人)이 많다면 자신들이 요구(要求)하는 방향(方向)으로의 결정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 다수결입니다. 다수결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생각이 공통적(共通的)일 때 동반(同伴)하는 결정(決定)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다수결은 민주적이며 비교적 어느정도의 판단에 대한 형평성(衡平性)을 가지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수결에 집착(執着)하여 소수의 중요한 의견을 무시(無視)해 버린다면 그 또한 매우 잘못된 일이라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몰고온 다수결의 결과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時事)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복잡 미묘(微妙)한 현대(現代)를 살아가는 우리들 시대를 생각한다면 이제는 다수결에 무게를 두기보다 소수의 의견도 경청(傾聽)하여 좀더 세심(細心)하고 깊이있는 신중(愼重)한 판단을 하는 생활태도가 필요한 때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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