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편집: 묵은지
풋풋하고 꿈 많은 10대의 어린 나이인 처녀가 이미 5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든 중년(中年)의 남자를 사랑하여 결혼을 하고 그를 뒷바라지를 하면서 평생(平生)을 헌신(獻身)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 될 수 있을까요? 설사 어떤 목적(目的)을 위해 결혼은 할 수 있었다지만 이미 중년을 넘긴 늙수구레한 남자를 바라보며 꽃다운 나이에 사랑을 끝까지 지키며 오로지 평생을 헌신했다하니... 같은 남자인 묵은지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하고 자신에겐 그저 가당(可當)치도 않은 희한(稀罕)한 남의 일이라 여기며 머리를 절레절레 도리질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믿기지 않은 일이 미국의 '헐리웃'가(街)에 실제로 있었으며 지고지순(至高至順)하고 순애(純愛)한 '러브 스토리'가 세상의 관심(關心)속에 무수한 부러움을 쏟게만들며 한 편의 사랑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창 피어나는 나이인 18세의 처녀가 결혼을 자청(自請)해서 늙어 죽을때 까지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하니 수많은 뭇 사내들의 부러움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마치 천사(天使)와도 같은 그녀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모든 남성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 이야기의 주인공(主人公)은 다름아닌 미국 영화계(映畵系)를 주름잡았던 마임예술가로 유명한 배우 '찰리 채플린(Chares Chaplin)'과 그를 아낌없이 헌신하며 사랑을 베풀었던 '우나 오닐(Oona O'neill)'이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찰리 채플린은 헐리웃에서 어린 여자 배우만을 골라 연애 상대를 삼는 바람둥이로 소문(所聞)이 아주 자자(藉藉)했으며 우나 오닐을 만난 시기에는 이미 세번이나 이혼을 한 경력(經歷)과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여배우들과의 염문(艶聞)과 특히 여배우 '조안 배리'의 임신(姙娠)으로 친자소송(親子訴訟)에 휘말리는 등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어쨌던 바람둥이 채플린은 당시 세상사람들에게는 돈좀 지닌 유명 영화배우라는 것 외에는 영국의 빈민가(貧民家) 떠돌이 출신성분(出身成分)으로 아버지는 알콜중독자로 죽었으며 어머니는 정신쇠약(精神衰弱)에 시달리다 죽은 그의 과거를 뒤돌아 보아도 형편없고 보잘것 없었던 무엇하나 올바르게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그런 중년의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나 오닐은 채플린과 상대적인 비교(比較)를 해 보았을 때는 확연하게 극을 달리하는데 아버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受賞)하였고 극작가(劇作家)로서 명성(名聲)을 떨친 '유진 글래드스턴 오닐(Eugene Gladstone O'nill)'이며 어머니는 격조(格調)높은 미국 상류사회(上流社會)인 뉴욕 사교계(社交界)에서도 알아주는 '아그네스 볼턴(Agnes Boulton)'으로 짱짱하게 잘나가는 집안의 딸로써 외모(外貌)조차도 빼어난 흑발(黑髮)의 아름다운 미녀(美女)로 빛나는 가문과 참신(斬新)한 성격(性格)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답고 꿈 많은 처녀가 어떻게 채플린과 같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정말 알수없는 것이 큐피트의 화살 촉 방향(方向)이라더니 그런 사실을 단순(單純)하게 채플린의 여복(女福)으로 돌리기에는 묵은지로서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으로 느껴졌습니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 후반(後半)에 접어들면서 이전의 '무성영화(無聲映畵)'시대에서 발성(發聲)을 넣은 '유성영화(有聲映畵)'시대로 바뀌어 가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영화배우를 꿈꾸는 젊은 청년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우나 오닐 역시 그녀의 꿈인 헐리웃 스타를 향한 의욕(意慾)으로 헐리웃에 첫발을 내딛던 시기였습니다. 지인(知人)을 통해 뉴욕의 어느 파티장소에서 채플린은 우나 오닐을 소개받게 되는데 나이가 어린 아름다운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 채플린은 그때부터 그녀와 자주 만남을 가졌으며 매우 각별(各別)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우나 오닐 역시 어릴적 이혼을 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자신에게 너무도 자상(仔詳)하게 대해주는 채플린에게 마음이 끌리면서 차츰 그에게 사랑을 느끼며 큰 나이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적(理性的)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채플린은 자신이 이미 세번의 이혼을 한 상태이고 심지어 여배우와의 임신설(姙娠說)로 온 세상이 떠들썩한 때인지라 그녀를 사랑하지만 차마 감히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告白)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 도리어 우나 오닐이 채플린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청혼(請婚)을 하는게 아닙니까? 우나 오닐 역시 항간(巷間)에 떠도는 채플린에 대한 안좋은 소문(所聞)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채플린의 복잡한 과거를 알고있던 그녀의 부모로 부터 완강(頑强)한 반대와 함께 결혼을 고집할 경우 부모자식간을 의절(義絶)하겠다는 엄포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녀 나이 18세에 1943년 6월16일 채플린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세인(世人)들은 한결같이 이 부조합(不調合)스런 커플을 두고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단정(斷定)짓고 빈정대며 언제 이들이 결별(訣別)을 고(告)할 것인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인들의 불필요(不必要)한 우려(憂慮)속의 여론(與論)은 우나 오닐의 진실(眞實)한 사랑앞에 결국 사라지거나 두손 두발을 들고 말았습니다. 채플린 역시 과거의 바람둥이 기질(氣質)은 간 곳이 없고 우나 오닐과의 부부생활(夫婦生活)을 행복(幸福)해 하며 안정(安定)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채플린은 자신이 창조(創造)해낸 특유(特有)의 헐렁한 바지의 복장(服裝)과 발에 맞지않는 큰 구두를 신고 비둘기처럼 뒤뚱거리며 걷는 걸음걸이로 단숨에 인기(人氣)를 얻고 대 스타가 되었으며 영화 사업에도 손을대 크게 성공(成功)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한 때, 미국 사회에서 불었던 이념적(理念的)인 '매카시즘' 광풍(狂風)으로 채플린은 자신이 제작(製作)한 영화의 내용으로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로 몰리면서 미국 정보국(情報局)인 FBI에서의 끈질긴 압박(壓迫)을 받았습니다. 결국 채플린은 해외(海外) 출장중(出張中)에 FBI로부터 미국에 입국(入國) 불허(不許) 통보(通報)를 받게 되었고 채플린은 어쩔수 없이 우나 오닐과 함께 스위스의 '브베이(Vevey)'로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이 곳에서 채플린 내외(內外)는 '제네바(레만)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하얀 대저택(大抵宅)을 짓고 20여 명의 하인(下人)들을 두고 여보란 듯이 35년간을 사랑이 넘쳐나듯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채플린은 우나 오닐과의 결혼 직전에도 여배우 조안 배리가 임신한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우겨댔었는데 나중에 아이가 출산(出産)하고 아이의 혈액(血液)을 검사(檢査)한 끝에 친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FBI는 공산주의자로 낙인(烙印)이 찍힌 채플린을 궁지(窮地)로 몰기위해 '무책임(無責任)하게 여배우에게 아이를 임신시켰다'는 여론몰이를 하고 미국 법원(法院)에 압력을 넣어 재판(裁判)을 불공정(不公正)하게 이끌어 채플린을 억울하게 누명(陋名)까지 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되자 당연히 미국 사회에서의 채플린 이미지는 형편없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고 이때에도 우나 오닐은 채플린의 억울한 사정을 믿고 그를 따랐으며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스스로 도움을 자청(自請)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채플린은 자신의 결백(潔白)을 믿어주지 않는 미국을 원망(怨望)하며 떠나게 되었고 우나 오닐 역시 망설임없이 채플린을 따라 스위스로 향(向)했던 것입니다.
스위스에 정착(定着)한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 부부는 8명의 자녀(子女)를 낳고 키우면서 그야말로 닭살이 돋을 정도로 금실(琴瑟)이 좋아 이를 지켜보는 이들이 도리어 '과연 저럴수 있을까?'라며 의아(疑訝)해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幸運)일까요? 채플린이 과거 몇 번의 결혼생활을 실패(失敗)한 것이나 어린 여배우들과 놀아났던 것들은 우나 오닐을 만나고부터 기억(記憶)에서조차 잊혀져 버린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신을 진작에 만났더라면 내가 다른 여인들과 그렇게 방황(彷徨)할 일이 없었을텐데...'라는 채플린의 후회(後悔)는 차라리 우나 오닐을 만난 것에 대한 무한한 감사(感謝)의 말로 들릴 뿐입니다. 우나 오닐 역시 그녀가 부모님에게 단언(斷言)했던 '채플린 이외(以外)의 남자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은 확고(確固)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의지(意志)를 나타낸 것으로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人生) 마지막까지 겪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지켰던 정신(精神)이 되었습니다.
1977년 12월 25일, 채플린이 88세를 일기로 운명(運命)을 하자 우나 오닐은 크게 상심(傷心)하여 거의 매일같이 그의 묘지(墓地)를 찾았으며 그러한 일과(日課)가 우나 오닐이 정(定)한 하루의 낙(樂)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잠시 해외(海外)에 볼일이 있어 며칠을 비운사이 도굴범(盜掘犯)들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屍身)을 도난(盜難) 당하는 일을 겪게 되었는데 채플린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財産)이 많은 미망인(未亡人)을 상대로 금품(金品)을 노리려는 도굴범들의 속셈이었으나 우나 오닐의 흔들림없는 대처(對處)로 시신을 되찾았으며 또다시 불상사(不祥事)가 일어날 것에 대비(對備)하여 콘크리트로 더욱 탄탄한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녀 나이 66세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남편의 무덤을 지켰으며 결국 그녀도 남편의 옆자리에 영면(永眠)을 하였습니다.
명배우 채플린은 명성도 명성이지만 한 때는 수많은 여배우들과 어울려 쾌락(快樂)과 방탕(放蕩)에 빠져 어디로 튈지 몰랐던 존재(存在)였습니다. 그랬었던 그를 우나 오닐은 인생의 동반자(同伴者)로서 지혜로운 내조(內助)는 물론, 부부로서 모범(模範)을 보이며 채플린과 함께 당대(當代)의 최고 배우로서 명예(名譽)를 지켜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평생동안 채플린을 사랑하고 감싸주었던 우나 오닐의 헌신(獻身)은 자칫 채플린의 유명세(有名勢)에 가려 묻힐뻔 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시대 남편들의 부러움을 무쟈게 받으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이 풍족(豊足)한 것에 비해 조금만 힘들어도 참아내지 못하고 투정을 부리고 서로를 배려(配慮)하려는 마음과 부부의 예(禮)를 다하지 못하는 요즘의 사람들에게는 분명 부러움과 함께 스스로의 어떤 뉘우침도 있을 것으로 압니다. 묵은지 역시 40년 가까이 부부생활을 해 오고 있지만 스스로 생각컨데 반성(反省)의 소지(素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남의 행복이나 아름다운 본보기를 보면서 부러워하기만 하는 마음보다는 비록 때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주저없이 우리 부부의 아름다운 인생을 한 번이라도 더 가꾸어 보려는 노력(努力)을 기울이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며 현명(賢明)한 생각이 아닐까 덧붙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