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크랩] 양반 사회- 내가 양반(兩班)입니다!

작성자묵은지|작성시간18.12.23|조회수745 목록 댓글 0


  ◎ 양반 사회 




글,편집: 묵은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 양반 저 양반 하면서 쉽게 쓰고있는 이 '양반'이라는 말은 오래전 고려시대 초기 때부터 사용되었던 말이며 그것도 아주 귀하고 높으신 신분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본래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궁중에서 왕이 주관하는 각종 회의나 행사에 대신들의 배열 방향에서 비롯되었는데 왕은 북쪽 중앙 상석에 앉고 동쪽 반에는 문관이 서쪽 반에는 무관이 남쪽 반에는 궁내 실무진이 배열 되었으며 남쪽을 제외한 동·서 양쪽에 배열된 문·무관을 같이 아울러서 양반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남쪽 반의 궁내 실무진은 배열에서 빠지고 문반과 무반인 동·서 양반으로만 나뉘어 양반이란 말은 궁중에서 왕을 대하는 끗발있는 대신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는데 특히 조선의 건국 후에는 양반 거의가 공신들이어서 논공행상에 따라 이성계로부터 한몫 단단히 챙긴 귀족과 관료들로 이들과는 달리 정국 혼란에 시달려 궁핍해진 일반 백성들 처지에는 감히 근접도 할 수 없는 아주 높은 신분의 양반들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출처: 에듀넷)

양반의 위상이 이러다보니 조선시대를 양반 사회라고까지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만큼 양반 계층이 조선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매우 컸으며 조선에서는 거의 유일한 지배계층이었고 그들만이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또한 양반은 농업을 중요시하던 당시의 사회에서 자신이 지닌 권력의 힘에 따라 토지를 소유하게 된 지주 계급이기도 하였는데 다만 농토를 지닌 지주였을 뿐 농사는 뒷전이었고 일상은 오로지 양반 신분 유지를 위한 학업과 정치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했는데 그 반면에 상대적으로 노비는 당장 자신의 끼니를 잇기 위해서라도 선택의 여지없이 양반 밑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처지여서 그들 사이는 필요 불가분의 관계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신분의 차이는 권위적인 유교 사상의 양반 중심 사회에서 신분에 따른 계급이 생겼고 직업의 귀천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서얼의 자손과 남녀의 차별까지 진부한 의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같은 양반이라해도 거주하는 지역의 위치에 따라 다른 유형이 있었는데 한양에 거주하는 양반은 경반(京班)이라 하여 우선적으로 궁중의 요직에 기용을 하였고 지방에 거주하는 양반은 향반(鄕班)이라 하여 대부분 주로 지방이나 변방에 기용되며 관직의 임용에도 차별이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까지는 당시 인구비율로 대략 1~2% 정도의 소수에 불과했던 양반이 조선 후기에 와서는 무려 70%에 육박한다는 설(과장된 표현으로 실제로는 훨씬 못미침)이 나돌 정도로 엄청난 증가세를 보였었는데 이와같은 현상은 계속되는 양반 세습에 따른 양적 팽창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수차례 겪어온 큰 변란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근슬쩍 신분 세탁을 하였거나 정치적 혼란과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틈타 잽싸게(?) 바꾸기도 하였고 재물로 신분을 사고 팔았던 당시의 사회적 부패에서도 그 원인이 있어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났던 것입니다.


양반 신분의 세습은 또다른 문제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숫적 팽창은 한정된 관료의 자리다툼과 제한된 정치적 참여를 둘러싼 서로간의 이권과 파벌이 생겨나 당쟁은 물론 피를 부르는 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급기야 사회가 부패해져 자신들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양반의 신분을 사고 팔기까지 하였습니다. 문관과 무관이 같은 양반이라지만 양반의 세계에서도 무관들을 얕잡아 보는 인습이 있었는데 문과에는 오로지 양반의 자손만이 응시할 자격을 주었던데 반해 무과에는 천인만 아니면 누구든지 응시할 자격을 주었으며 관료가 되어서도 일반적인 관직은 그렇다치더라도 전문적인 군사 지식이 절대로 필요한 군사 요직에서조차 문관을 우위에 두고 그 밑에 무관을 두는 차별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무관의 경시 풍조는 같은 양반이면서도 무시당했던 무신들의 불만이 되어 고려 때에는 무신들의 반란으로 한때 100여 년 동안이나 무신 정권이 들어서기도 하였는데 이런 차별로 인한 쓰디쓴 과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같은 차별은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사회전반적으로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전통적인 신분 계급 구조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는데 그동안 양인의 세습은 경제력의 한계에 부딪힌 일부의 양반들에 의해 의미를 잃어갔고 노비와의 엄격했던 차별은 현실적으로 약화되어 법에 따라 규제되던 양천제 조차 무기력해졌습니다. 기나긴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신분이 천한 노비들은 도망을 하여 자신의 신분을 속이거나 숨어 살았으며 나라에서는 군역의 문제와 재정 궁핍을 모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평민과 천민이 양반의 행세를 할 수 있는 '공명첩(空名帖)'과 '납속책(納粟策)'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은 단계적으로 노비도 해방을 시켜주었는데 순조가 보위에 오르면서 수 만명의 공노비를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었으며 나머지 공노비들도 사노비를 포함하여 1894년 갑오경장 때 모두 해방시켜주어 표면상 공식적으로는 노비제도가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렇게 신분제가 유명무실해 지면서 상대적으로 늘어나기만 하는 양반의 개념 또한 달라졌는데 이는 뚜렷한 객관적 기준이 없어지고 흔해 빠진게 양반이다보니 양반을 대하기도 애매모호하여 양반의 계급적 구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나라에서도 기준을 정해서 양반을 구분해야 했는데 특히 과거시험에서는 생진과와 문과의 경우 응시 자격을 까다롭게 적용을 하여 증조부대까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있어야 그 자손에게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것 또한 유학(幼學)으로 기록된 사람으로 제한하였는데 이 또한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만든 가짜 유학생이나 환부역조(換父易祖) 즉, 조상의 신분을 양반으로 위조하면서까지 특혜를 얻어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신분을 속여 가짜 양반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고 족보를 매매하거나 위조하는 것이 전국적으로 성행하여 일자무식에 자기 성씨도 몰랐던 사람들이 양반가의 성씨를 사들여 자기가 양반가문이라며 허풍을 떨어대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렵게나마 자기 위치를 지켜온 소수의 양반은 그렇다치더라도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평민, 천민 할 것없이 모두 일반인과 똑같은 생활을 하였는데 신 문화의 거센바람이 봇물처럼 터지듯 변화하는 상황에 거부감만 보인 유교 사회는 유명무실해져가고 이에 대처할 능력의 한계가 있었던 양반은 더욱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근대화와 일제 강점기는 그동안 조선 사회를 주도했던 유교사상의 근간을 흔들기 시작했고 덩달아 양반의 위상마저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났거나 양반이라는 체면만 세우다 가세가 기운 양반은 마을에서 글공부를 가르치거나 대필을 해주며 먹고 살기도 하였지만 어쩔수 없이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부류의 양반을 당시에는 '잔반(殘班)'이라 불리었고 이렇게 궁핍한 양반은 도리어 체면이고 뭐고 없이 천민이나 노비에게까지 금전을 빌려 장사를 했으며 농사 역시 그들의 땅을 빌려 일정한 수확물을 바치며 먹고 살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양반의 굴욕은 계속되어 해방이후 한국 전쟁 통에 양반이라는 이유로 인민재판의 표적이 되어 끌려가 고문이나 죽음을 당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후사정으로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대부분의 양반들은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치열한 삶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묵은지네 족보

양반가로서 일제 강점기에 친일을 하지 않았다면 정황상으로 생활 능력의 한계가 있는 양반으로서는 당연히 가세가 어려웠을 것인데 그 궁핍함에도 양반의 기개를 잃지 않고 꼿꼿이 살아가는 골수 양반이 있는가 하면 저하나 잘살겠다고 일제에 빌붙어 치부하며 살았던 양반의 허울만 뒤집어쓴 가치없는 가짜 양반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근래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경제력이 나아지며 부를 쌓은 일부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보잘것 없어 보였던 가문과 조상에 대해 과하게 치장을 하려는 분위기가 일기도 하였는데 자기들 족보를 거창하게 만들려고 쓸데없이 큰 돈을 들인다거나 조상의 묘지를 필요이상으로 확장하는 등 과시욕이 엿보이는 모습들이 많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상을 상기하고 잘 모신다는 것은 옳은 일이나 그 일을 빙자하여 자칫 과한 허세를 부린다면 그건 올바른 양반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나라가 어려움을 당했을때 어떤 누구보다도 나라를 걱정하고 앞장서야할 것이요 국민이 힘들어할 때 어려운 국민의 편에서 아픔을 같이하고 함께 위로를 나누는 것이 진정한 양반의 자세라 한다면 과연 국민들은 그런 양반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양반가의 복장, 아래-장옷을 입은 양반가의 여인(출처:에듀넷) 

대부분의 양반들은 백성들의 바램과는 달리 체면을 빙자한 허세와 권위를 세우고 자신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한 일상을 살았고 심지어는 영달을 위해 착취와 부패를 일삼았습니다. 조선시대 사회에서 정작 백성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고 살았던 진정한 양반은 손꼽힐 정도의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 나머지는 이런저런 수단과 방법으로 얻어낸 허울만의 양반이었으며 그런 양반들의 행동거지는 백성들의 조롱과 비웃음만 받아 왔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정치권에서 올곧은 양반의 정신으로 여당 야당을 떠나 나라를 위해 또는 국민을 위해 올바른 정치를 펼치려고 노력하는 국회의원들은 어떤 누구며 공직자로서 국가 행정을 다루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투철한 국가관과 자부심을 느끼고 본분에 임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국민들이 뽑아 준 선량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는 뜻으로 뽑힌 것이고 공직자들도 높은 자리에 올려주는 것은 그동안 쌓아온 경륜과 경험을 국민에게 더욱 봉사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위정자들이 이런 국민의 바램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쏟아 부었을 때 비로소 나라가 부강해 지고 국민이 온전해 지는 것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양반으로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비록 시대는 바뀌었지만 오늘날에도 진정한 양반 정신의 그 중심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니 이제는 옛날처럼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는 사회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새로운 시대의 양반이 되어 과거의 좋지않은 악습이나 볼썽 사나운 적폐는 모두 걷어버리고 밝아오는 2019년 새해부터는 국가와 국민이 서로를 위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한 양반이 되어 '내가 양반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사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듀 2018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비공개카페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