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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과 식물

웅치전투(熊峙戰鬪) 전적지

작성자이봉수|작성시간25.08.02|조회수4,616 목록 댓글 0

▲ 전북 완주군 신촌리 곰티재의 웅치전적비(熊峙戰蹟碑). 이곳은 제3방어선이고 15927()에 조선관군과 의병이 왜군을 맞아 전투를 벌인 격전지로서 2022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조선군과 왜군의 병력규모는 정확하게 나온 문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웅치(熊峙)는 임진왜란 당시에 진안에서 전주로 가는 길목으로 전주성으로 가려면 이곳을 반드시 넘어가야 합니다. 좁고 긴 골짜기가 이어지고 산은 높지 않으나 험준하여 수적으로 많은 왜군과 전투를 벌이려면 좁은 길목에 목책과 같은 장애물을 설치하고 틀어막아 최대한 적의 희생을 강요하며 전투를 했을 것이나 화력과 병력 숫자에서 열세인 조선군을 상대로 승리한 왜군의 지휘관인 안코쿠지(安國寺恵瓊,왜승병장)는 끝까지 싸운 조선군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충절(忠節)에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지난 5월에 이치전투 전적지를 탐방했었는데 두 달 정도가 지난 오늘은 웅치전투 전적지를 찾았습니다. 웅치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이치전투, 1차 진주성전투와 함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왜군으로부터 지켜낸 전투입니다. 1592년 7월 7일(음)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전주성으로 진격하던 왜군과 조선군이 웅치(곰티재)에서 전투를 벌여 조선군이 패했고 8일 전주성 앞의 안덕원(安德院)에 진영을 갖추고 전열을 정비하던 왜군을 9일 새벽에 황진장군의 부대가 급습하여 승리합니다. 지금은 교통사정이 좋지만 당시에 조선의 육로 교통사정은 최악이라서 조정으로 가는 세곡(稅穀)과 같은 주요수송수단은 수로와 바닷길을 이용했습니다. 육로로 이동하는 왜군 입장에서는 금산에서 전주성으로 가려면 대둔산(▲878)과 운장산(▲1125,노령산맥의 주봉) 사이의 이치(梨峙)와 운장산 줄기와 마이산(▲687) 사이에 있는 웅치(熊峙)를 반드시 넘어야 했습니다.

 

▲ 창렬사(彰烈祠). 이곳은 당시에 제2방어선 격전지 한 복판에 세워진 사당으로 덕봉마을에서 420여 년간 추모제를 모셔왔고 진안군은 순국하신 영령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2023년에 사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전투배경

 

조선은 1592년 4월(음)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200년 간 평화를 누리다 보니 조선군은 나약해졌고 왜군은 120년 간 일본 내에서 전국시대의 전쟁을 직접 하다 보니 전투력이 강했습니다. 더구나 조선군은 처음 보는 왜군의 조총에 대한 두려움 컸지요. 그런데 전투경험이 쌓이면서 왜군 조총수가 3열종대로 사격을 하는 동안 조총소리가 날 때 알아서 피하고 조총을 장전할 때 궁시(弓矢)로 공격하면 된다는 대응법을 터득했던 겁니다. 물론, 백병전(白兵戰)은 왜군이 월등하지만 왜군이 성벽에 올라오면 그때는 왜군의 칼이 무서운 게 아니라 저놈이 죽든 내가 죽든 해야 되니 몸싸움을 하는데 조선군이 왜군보다 머리하나 정도는 더 크니까 육박전(肉薄戰)은 해 볼만 하거든요. 이런 식으로 조선군은 전투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는 반면에

 

왜군은 여러 가지로 상황이 꼬입니다. 선발대 고니시(小西行長)와 가토(加藤淸正)가 평양성과 함경도 북쪽으로 전진을 했는데 식량보급이 잘 안 됩니다. 남해를 거쳐 서해바다의 수로를 이용하면 보급품이 원활하게 올라올 건데 이순신의 수군이 남해바다에서 왜군함선을 보는 족족 깨버리니 수륙병진(水陸竝進)이 안 되고 해서 육로로 보급을 해야 되는데 조선의 도로사정이 최악이라서 등짐으로 조금씩 이라도 보내면 중간에서 조선의병들이 끊어 먹기 하다 보니 왜군은 보급품이 없어 너무나 힘든 상황이 되는데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군대가 참전한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왜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고 음력 9월에서 10월이 넘어가면 조선의 추위에 대한 공포감이 밀려옵니다.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대부분의 왜군은 일본 규수지방의 따뜻한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왜군들은 조선관군과 의병에게 쫒기면서 겨울철에 많이 얼어 죽습니다. 결국 명나라군 참전과 이순신의 공포감 그리고 조선의병들과 조선 추위에 대한 두려움에 더하여 보급품까지 제대로 안 오니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과 오랜 전쟁에서 발생하는 피로감이 쌓이다 보니 왜군들의 상황은 갈수록 엉망이 됩니다.

 

결국, 왜군지휘관들도 머리를 굴립니다. 전쟁의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되는데 방법은 오직 하나, 호남을 점령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왜군이 침략해 오던 시기가 1592년 4월이니까 경상도는 모내기도 못했는데 농민들은 잡혀 죽었고 살아남은 농민은 피난 갔지요. 충청도와 경기도지역은 모내기는 했지만 왜군이 들어와서 밟고 지나가니 다 피난 갔고 농사가 제대로 안되다 보니 농업생산량이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물론, 왜군도 점령지에서 둔전(屯田)을 운용하여 쌀을 확보하지만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피해 간 전라도를 점령해야 되었던 겁니다. 전라도는 쌀이 충분하니 무조건 점령해야 했고 전라도를 점령하면 남해바다를 지키는 이순신의 조선수군에게 보급품을 끊고 육지에서 조선수군진영을 공격하여 깨버리면 수륙병진(水陸竝進)을 할 수 있으니 무조건 전라도를 공격하여 점령해야 했던 겁니다. 바닷길은 이순신이 막고 있으니 전라도를 공격하는 방법은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북쪽에서 전주를 공격하는 방법은 ①금산에서 이치고개를 넘거나 ②진안에서 웅치고개를 넘어 전주를 공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전라도를 공격하는 방법은 ③함양으로 해서 전주로 공격하거나 ④섬진강을 타고 남원을 경유하여 전주를 공격하는 방법이 있는데 무조건 진주성(晉州城)을 점령해야 합니다. 오늘은 네 가지 방법 중 왜군이 진산에서 전주로 공격하던 웅치전투를 알아보겠습니다.

 

웅치전투의 시작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한양점령(1592.5.3음) 후 전쟁이 장기화 될 것에 대비하고 조선을 분할하여 왜군 지휘관들이 식민통치를 하고자 합니다. 전라도를 할당받은 왜군 제6군의 지휘관인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15천의 병력을 이끌고 한양을 출발해 무주를 점령한 후 금산(錦山)(1)으로 진군합니다. 왜군은 1592622일 금산 제원에 이르러 조선군과 전투를 벌여 금산군수 권종(權悰,권율의 사촌형)이 전사했고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현으로 퇴각해 623일 금산성을 점령하고 고바야카와의 부장인 안코쿠지(安國寺恵瓊,왜승병장)에게 수천의 병력을 주어 개전초기에 조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곡창지대인 전라도 전주성을 공격하도록 웅치로 출발시킵니다.

 

웅지전투 결과

 

전주성을 공격하기 전에 왜6군의 고바야카와는 왜군이 남원에서 전주를 공격한다는 거짓정보를 흘리는데 전라감사(全羅監司,2품 문관직) 이광은 동북현감(6) 황진장군에게 남원을 지원하도록 급하게 내려 보냅니다. 당시 조선군은 개전초기에 말도 안 되게 패배했으나 살아남은 병사들은 전투 경험치가 쌓여 조총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터득했고 백병전 싸움 실력이 늘어 웅치전투에서는 조선군들이 이를 악물고 싸우니 왜군들도 당황합니다.

 

전라감사 이광은 전투배치를 합니다. 웅치의 최전선인 제1방어선 산 아래에는 의병장 황박을 배치하였고 제2방어선인 산 중턱에는 나주판관(羅州判官,5) 이복남과 해남군수 변응정을 최종방어선인 제3방어선 곰티재에는 김제군수(金堤郡守.3) 정담(鄭湛)에게 임무를 주고 목책을 설치하는 등의 방어태세를 갖춥니다. 2선을 맡았던 이복남은 살아남아 훗날 남원성전투(1597.8.13)(2)에 참전하여 전사합니다.

 

6군 고바야카와의 부장인 안코쿠지(安國寺恵瓊,왜승병장)가 159277일 새벽에 조총을 앞세워 공격하는 것을 조선군이 제1선에서 막아냈으나 아침에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면서 1선의 황박 부대가 밀려났고 2선의 이복남 부대가 맞섰지만 밀리자 고갯길 정상에 있던 정담에게 잠시 진을 물리자고 건의했으나 정담은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말한 뒤 산 정상에서 왜군과 전투가 이어졌고 지휘관인 정담이 직접 활을 쏴 적장을 맞힐 정도의 혈전을 전개하는 등 처절한 결전을 벌였으나 정담, 강운(姜運), 박형길(朴亨吉) 등이 전사하면서 웅치가 돌파당합니다.

 

웅치전투에서 승리한 왜군 안코쿠지는 도망가지 않고 잘 싸운 조선군의 충절에 경의를 표하며 조선군의 시신을 모아 길가에 묻고 표목(標木)에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조선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행위에 조의를 표함)이라 써 놓고 78일 웅치고개를 넘어 저녁 무렵 안덕원(安德院,전주 산정동일대)에서 전주성을 공격하고자 진영을 갖추고 전열을 정비합니다.

 

안덕원전투(安德院戰鬪)

 

6군이 남원 쪽에서 전주성으로 침공한다는 것이 거짓정보였음을 간파한 전라감사 이광은 남원으로 보냈던 동북현(화순)의 현감 황진장군에게 복귀를 명하자 황진이 급하게 부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살펴보니 웅치고개는 이미 왜군에게 털렸고 왜군은 전주성 앞의 안덕원에서 진을 치고 공격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남아 있는 조선군들은 패잔병이 돼서 전주를 어떻게 하냐고 걱정들을 하고 있고 전라감사 이광은 일찌감치 전주성을 이정란(李廷鸞,1592~1600) 의병장에게 맡기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갔으니 이정란은 얼마 안 되는 병력에게 성곽에 횃불을 세우고 병력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목숨 걸고 전주성을 지키고자 왜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횡진의 부대가 79일 새벽에 안코쿠지의 왜군진영을 급습(急襲)하여 대승을 거둡니다.

 

동북현감 황진 부대가 왜군진영을 급습하여 대승을 거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4.15~1598.11.19) 초기에 박진이 300여명의 부하들과 2만의 왜군을 맞아 낙동강 작원잔도(鵲院棧道,밀양 삼랑진,1592.4.19음)전투에서 무쌍을 찍었지만 왜군에 패했다더라. 김여물(金汝岉)탄금대(彈琴臺,충주 대문산108,1592.4.28음)전투에서 패했지만 용맹했고 신각이 해유령(蟹踰嶺,경기도 양주,1592.5.16음)에서 왜군을 70명 죽였다더라 하는 이야기만 있었지 왜군의 진영을 급습해서 승리한 전투는 없었는데 황진장군 휘하 수백명의 군사들이 수천명의 안코쿠지 왜군 진영을 급습하여 많게는 3천명까지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황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감은 정6품으로 지금의 군대로 보면 대위(중대장), 행정직으로는 면장 정도의 직급이라서 장계(狀啓)를 직접 작성하는 위치가 아니었고 고개에서 있었던 전투다 보니 전주성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역사서에는 하나같이 횡진의 무용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횡진의 무용담(武勇談)

 

1. 안방진의 임진전사, 호남절의록

 

진안을 석권했던 왜군이 전주성을 침공하려고 웅치를 넘어와 전투를 벌여 정담 이하 많은 병력이 전사하며 전열이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 다급한 시기에 황진 군대의 명쾌한 전승 소식은 하나의 희소식이었다.

 

2. 최수지라는 인물이 전주 부윤에게 올린 글

 

황진장군이 안덕원에서 일기당천으로 적병을 괴멸(壞滅)시켰다.

 

3. 무민공실기

 

황진장군이 전주감사 이광의 명에 따라 전주에 도착했을 때 왜적은 이미 안덕원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황진은 안덕원의 적을 쓸어버렸다.

 

4. 단조보감

 

동북현감 황진이 홀로 왜적 떼를 맞아 곧바로 내쳐 적장 한 놈과 왜군 3천명을 죽였다.

 

역사서의 기록에도 있듯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왜군이 쏘는 조총소리만 들어도 도망가기 바빴던 조선군이 왜군을 괴멸시켰다. 쓸어버렸다. 그리고 왜군 3천명을 죽였다는 내용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웅치전투는 왜군에게 패배했지만 안덕원전투(1592.7.9.음)에서는 황진장군의 부대가 안코쿠지의 왜군을 대파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710일 진산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안덕원전투까지 통으로 웅치전투라고 보면 조선군이 승리한 것이고 나눠서 보면 웅치전투 패배, 안덕원전투 승리입니다. 웅치전투에서 승리한 황진장군과 의병장 황박의 부대는 진산의 이치로 이동하여 왜군과의 전투에 참여합니다.

 

안덕원에서 철수한 안코쿠지는 금산성 본영에 있는 제6군 지휘관인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와 합류하여 1만여명 이상의 병력으로 720(음력)경 진산의 이치로 진군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방어선을 구축한 1,500여명의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지휘하는 조선의병이 왜6군의 본영인 금산성을 공격하자 최소한의 병력만 남아 있는 금산성을 빼앗기고 협공당할 것을 우려하여 전주성으로의 진군을 포기하고 금산성으로 퇴각합니다.

 

이치전투(梨峙戰鬪)는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에서 전라도 절제사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과 일본 6군 고바야카와의 왜군이 1592720일에 벌인 전투로 패배한 왜군은 전라도 공략을 실패하게 됩니다. 만일, 왜군이 웅치와 이치를 넘어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점령되었다면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고 수로까지 왜군에게 내주었다면 전황은 왜군에게 기울어져 조선은 망했을 겁니다. 1차진주성전투(第一次 晋州城戰鬪,1592.10.4~10.10)와 수군의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1592.7.8.)도 같은 맥락에서 전략적 의미가 큽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사수해 조선의 보급로를 유지하고 이순신의 수군과 권율의 육군이 부담 없이 왜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전라도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호남, 영남의 의병들에게 군수물자를 보급하여 전투를 지속할 수 있게 되어 조선을 지켜냅니다.

 

창렬사 앞에 세워진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이순신이 사헌부지평 한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남긴 글로 웅치와 이치전투의 승리로 전라도가 지켜져 조선을 살렸다는 내용.

 

나가며

 

비록 웅치전투에서는 조선관군과 의병들이 패하여 왜군들이 전주성 코앞인 안덕원까지 진출하였으나 황진장군의 탁월한 전투지휘로 안덕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왜군을 급습하여 대파했고 와해된 왜군이 진산으로 후퇴함으로서 전주성과 전라도가 지켜집니다. 이순신 장군이 1593년 7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3) 한덕승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곧바로 나라가 없어졌을 것이라는 글이 있는데 이것은 전라도가 임진왜란 당시에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매우 중요한 곳임을 언급한 것이고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이렇게 이어져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제 사견입니다만 임진왜란 7년 동안 조선인들이 살았던 굴곡진 삶이 소설이라면 소설가가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각의 전투에서 생사를 같이 했던 관군들과 의병들 이들의 부모형제들이 왜군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던 당시의 실상들. 왜군들에 의해서 민초들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하는 자료들을 보면 일본은 용서가 안 됩니다. 우리는 일본에게 그렇게 해 본적이 없습니다. 기록마다 다릅니다만 임진왜란 때 조선의 인구가 20~50(%) 줄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본인구의 절반을 죽여 본 적이 없고

우리는 일본 왜왕의 부인을 모욕감을 안겨 주며 불살라 죽인 적도 없고

우리는 일본을 35년 간 식민지배 해 본 적이 없고

우리는 일본의 문화유산을 도둑질해서 우리 것인 것처럼 포장해서 전시한 적이 없단 말입니다.

 

사이좋게 지내려면 가해자가 제대로 된 사과를 먼저 해야 되고 미안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그게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가 먼저 살인강도질 하느라 고생했다고 물 한 잔 줘야 합니까? 역사왜곡질을 대 놓고 하는데? 얼마 전에도 죽은 아베가 우리나라 죽이려고 경제조치를 했잖아요? 지금까지도 변한 게 없는데 헛소리를 대 놓고 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1)금산(錦山郡)

금산군은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으나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청남도로 편입되었습니다.

(2)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일~16일에 있었던 전투로 조명연합군 5,000여명과 남원주민 5,000여명이 남원성에서 공격해 오는 왜군 56,000명과 맞서 싸운 결과 왜군이 승리하였고 살아남은 성안의 병사들과 주민 모두가 왜군에게 학살당함. 남원성 앞에 순절한 관군과 의병 그리고 학살당한 주민을 포함한 10,000명을 추모하는 만인의총과 봉분이 있으나 봉분은 시신이 없는 묘입니다.

(3)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조선시대 중앙관청으로 언론활동과 관리의 부정에 대한 감사, 탄핵 등을 주로 담당했고 관리뿐만 아니라 국왕도 사헌부의 눈초리를 피해갈 수는 없었으며 조선의 많은 국왕들이 사헌부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고 지평은 정5품의 직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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