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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과 식물

발해(渤海) 멸망

작성자이봉수|작성시간26.01.15|조회수2,272 목록 댓글 0

발해 (출처 나무위키)

 

겨울철에 탐방하기가 곤란하여 교복입고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에 긴가민가했던 내용들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알아보고 홈페이지에 올려드리는 것은 시간 날 때 생각을 같이 해보자는 것이고 오늘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역사 중 멸망한 당시의 상황만 알아보겠습니다. 본 글은 황현필 선생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합니다. 발해(渤海)의 멸망에 관해서는 요(,거란)나라 역사를 봐야 합니다. 몽골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원(大元,1271~1368)나라 시기에 자신들이 점령했던 거란족의 역사인 “요사(遼史)”와 여진족의 역사 “금사(金史)”를 썼는데 거란족과 발해의 싸움은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무관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서술했을 겁니다. 요사의 결론은 발해는 그냥 전쟁에 져서 망했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거란족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제위916~926)가 만든 요(,916~1125)나라가 발해를 공격해서 멸망시킨 건 역사적인 사실로 봐야 합니다.

 

발해 멸망 당시의 상황

 

요나라의 거란군은 당시에 발해의 주요 교통로 중 가장 북쪽의 거란도(契丹道)(1)를 통해서 공격해 와 925년 12월 31일에 부여성(扶餘城,중국 창춘시 눙안현)을 포위한 후 3일 만에 함락시키고 부여성에서 500km정도 떨어진 발해의 수도 상경성(上京城)(2)으로 진군하자 상경성에 있던 군주(대인선,재위906~926)가 노상이라는 인물에게 군사 3만을 주고 막으러 보냈으나 요사(遼史)에는 노상의 군대가 무너졌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전투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1월 9일 거란군이 발해의 수도 상경성에 도착합니다. 상식적으로 거란의 기병이 500km를 6일 만에 이동해 왔다는 것인데 당시에 발해군의 3만과 전투를 했었다면 6일 만에 못 왔겠지요. 역사학계에서는 그 노상이 야율아보기의 거란군에게 항복했고 발해 병력까지 거란군에 합류하여 발해수도인 상경성을 포위하니 927년 1월 12일에 발해왕이 항복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합니다.

 

요사(遼史) 권2 본기

“대인선이 흰옷을 입은 채 새끼줄로 몸을 묶고 흰양을 끌며 관리 300여명을 데리고 나와서 항복했다.”

 

위 역사서의 내용은 요나라가 발해수도 상경성을 기습공격해서 무너졌다는 이야기지요.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소정방(蘇定方,592~667)이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정림사지5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부여)에 새긴 글귀를 보면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기벌포에 상륙하고 난 후 3일 만인 660년 7월에 당시 백제의 수도인 부여성이 함락했지요. 그리고 서울 송파구의 석촌호수에 세워진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내용을 보면 병자호란(1636) 때 청나라 오랑캐가 와서 한양을 점령하기까지는 8일이 걸렸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인 1592년 4월 13일에 부산에 상륙했던 왜장 고니시(小西行長,1558~1600)가 한양을 5월 3일에 점령했으니 20일 걸렸고 요나라가 926년 12월 31일에 부여성 앞에 나타난 후 1월 12일에 발해의 수도인 상경성을 점령했으니 10일 정도 걸린 겁니다.

 

당시에 발해가 약했는가?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 “처음에 발해왕(선왕)이 자주 학생들을 당나라의 대학에 파견하여 고금의 제도를 배우게 했다. 이에 이르러 발해는 해동성국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듯 멸망하기 100년 전만 해도 요동까지 차지하고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칭호를 들었던 발해가 왜? 쉽게 멸망했는가를 알아보려면

 

먼저, 발해의 기록들을 봐야 합니다. 1대왕 대조영(大祚榮) 고왕(재위,698~719) 2대왕 무왕(재위,719~737) 3대왕으로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문왕(재위,737~793) 그리고 4~9대까지는 약 30년 동안 6명의 임금이 바뀌다가 9세기 초반 선왕(宣王,재위,818~830) 때 고구려처럼 요동까지 발해의 영토로 만들면서 5경15부62주 지방제도까지 확립하고 해동성국이라는 칭호까지 들었지요. 그런데 선왕 이후에 발해가 멸망하기 전까지 약 100년간 발해의 군주들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그 기간 동안 발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발해의 국력이 약해질 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항상 발해에게 복속하지 않았던 흑수부(黑水部) 말갈과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고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 유민들과 다수의 피지배층이었던 말갈족으로 구성된 이원적 구성이었기 때문에 말갈족을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관련하여 역사서를 살펴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

“적국인(발해인)이 신라 북진지역으로 건너가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친해 소통하자고 한다.”

고려사(高麗史)

“921년 봄에 고자라, 여름에 아어한이라는 말갈추장들이 측근을 데리고 고려로 귀순했다.”

고려사

“발해장군 신덕, 예부경 대화균, 군노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 5백여 명이 투항해 오다.”

 

위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말갈족은 발해 복속(服屬)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발해가 멸망하기 전부터 대씨 성을 가진 왕족들이 고려 왕건(재위,918~943)에게 투항했다는 기록을 보면 발해가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10여 일만에 발해의 수도인 상경성이 요나라 거란군에게 함락되고 망한 겁니다. 그런데 926년에 발해가 멸망했는데 924년에 발해의 마지막 군주였던 대인선이 요동(遼東)(3)을 확보합니다. 그러니까 발해가 멸망하기 2년 전에 발해가 요동을 장악하고 요나라 요주(遼州)의 자사를 죽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발해가 망하기 2년 전만 해도 발해의 대인선은 능력 있는 왕이었으나 국력이 쇠약해지고 요나라(거란족)가 강해서 무너졌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요나라는 중국 중원(中原,황허강 중류지역)에 들어가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시안시 부근)까지 점령할 정도로 국력이 막강했던 전성기였습니다. 결국, 국력이 약해진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발해는 백두산 화산폭발로 망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만주의 패권국(覇權國)이었던 발해가 거란족에게 너무 쉽게 무너진 것이지요. 혹시 백두산 폭발이 원인이라고 하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실제로 큰 화산이 폭발하면 자연재해는 핵폭탄 몇 천배의 위력이라고 합니다. 그때 백두산이 폭발했다고 하니까 전근대시대의 국가입장에서는 재앙이었겠지요. 백두산 화산폭발로 발해가 혼란스러울 때 요나라의 공격을 받은 것 아니냐는 가설(假說)이 있습니다만

 

2017년 미국의 케임브리지대학의 연구팀이 발해가 멸망한 20년 후인 946년에 백두산 화산이 폭발했다는 것을 정확하게 밝혀냄으로써 발해 멸망과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구과학적으로 774~775년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감마선(Gamma ray)으로 지구 전체가 방사선에 피폭되어 나무의 나이테에는 775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백두산 근처의 오래된 낙엽송 하나를 발견해서 나이테를 조사해보니 775년부터 숫자를 세어가서 화산폭발로 나무가 죽었을 것이니 계산해 보면 정확하게 946년이 나온다고 합니다.

 

고려사(高麗史) 세가권제2 정종원년

“이해(946) 뇌성이 울리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일본의 고호쿠지연대기 946년 11월 3일

“밤에 하얀 재가 눈처럼 흩어져 내렸다.”

일본기략(日本紀略) 947년 2월

“이날 하늘에 소리가 울렸는데 마치 우레와 같았다.”

 

고려사와 일본 역사기록의 내용과 과학적으로 입증된 내용을 볼 때 백두산 폭발은 946년이 맞는 것으로 보아 백두산 폭발로 발해가 망했다는 설은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백두산과 발해수도 상경성은 가까운 위치라서 백두산 화산이 대폭발하기 전에 전조(前兆)가 있었을 것이니 나라가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아무튼, 946년에 백두산이 폭발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내용이고 만주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은 맞습니다. 발해부흥운동(渤海復興運動,926~1116), 정안국(定安國,938~985)이라든지 후발해(後勃海,929~1007)와 같은 부흥운동이 있었음에도 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좌절했을 겁니다. 당시 거란은 발해 땅에 동란국(東丹國,926~936)을 세웁니다. 발해 멸망 직전에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이 노상에게 3만 병력을 주고 거란군과 싸우라고 보냈더니 항복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그 동란국의 재상(宰相)이 되는 자가 바로 노상입니다.

 

그런데 동란국 역시 크게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주 땅에 살면서 발해의 피지배층이었던 말갈족, 여진족 역시 100년 동안에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12세기에 가서야아구타(完顔阿骨打,제위,1115~1123)가 금나라를 세운 것을 보면 10세기 946년 백두산 화산 폭발은 만주지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만, 발해 멸망과 백두산 화산 폭발은 관련이 없고 발해는 국력의 쇠락(衰落)과 왕족들의 내분 그리고 피지배층이었던 이민족을 다스리지 못하여 멸망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1)거란도(契丹道)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의 기록에 의하면 발해의 수도인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 중 부여부(扶餘府)는 거란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고 요나라의 태조가 발해를 공격할 때 부여성을 함락시킨 뒤 홀한성(忽汗城)을 공격한 것이라든가, 부여부에는 항상 날랜 병사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비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발해와 거란의 교통에는 반드시 부여부를 거쳐야 했습니다.

(2)상경성(上京城)

발해의 수도로 홀한성(忽汗城,흥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이라고도 했습니다. 발해진의 옛지명은 동경성이고 발해국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옛터라고 합니다. 756 발해 문왕이 중경(中京,충칭)에서 상경으로 천도하여 수도로 삼았습니다. 785년에서 794년에 수도가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지린성 훈춘시 팔련성(八連城))로 잠시 옮겨졌다가 성왕이 다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고 발해가 요나라에 멸망한 뒤, 태조 야율아보기는 그 땅에 동란국(東丹國)을 설치했으나 928(요나라 태종 천현 3) 동란국을 요양부로 옮기면서 완전히 버려졌고 버려진 상경성은 여진족이 차지합니다. 역사서에 따르면 동경성은 발해시기에 홀한성(忽汗城)이라 했고 동단국(東丹國,926) 시기엔 천복성(天福城)이라고 불렀으며 중화민국(中華民國,1912~1928) 시기엔 동경성을 동대와자라 불렀고 일제시대에는 동경성보(東京城保)라고 하다가 후에는 동경성가라 불렀으며 해방 후에는 세환진(世環鎭)이라 개칭했고 1956년에 동경성진(東京城鎭)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3)요동(遼東)

요하의 동부지역으로 오늘날의 만주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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