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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과 식물

청주읍성(淸州邑城)

작성자이봉수|작성시간26.04.19|조회수1,243 목록 댓글 0

▲ 복원된 성곽

 

청주읍성은 청주시 상당구에 있고 조선시대 청주목(淸州牧)(1)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2)을 지키고자 축성했습니다.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남석교(南石橋)(3)가 청주의 육거리시장 지하에 원형을 보존한 채 100년 가까이 묻혀 있습니다. 남석교는 너비 4.1m, 길이는 80m로 돌기둥을 세운 뒤 화강석을 대청마루 놓듯 이어놨고 정월 대보름 답교(踏橋)놀이 장소로 유명했었다고 합니다.

 

망선루(望仙樓)

 

병마절도사영문 정곡루(正鵠樓)

 

청주읍성 내 청주관아 터(청주중앙공원)에 위치한 청주압각수는 나무 높이 20.5m, 흉고 8.5m에 수령은 약 900년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로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잎 모양이 오리의 발을 닮아 붙여진 별칭이라고 합니다. 1390(공양왕2) 목은 이색(李穡) 등이 무고로 청주 옥()에 갇혔을 때 큰 홍수가 났는데 압각수에 올라 화를 면했다고 하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이 이들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했다며 석방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청주읍성은 외세와의 전투보다는 내부적인 반란과 역모에 관련되어 수난을 겪었던 읍성입니다.

 

▲ 900년 된 은행나무

 

나가며

산성(山城)을 포함한 관방유적(關防遺蹟)과 문화재는 그 시대의 전투상황 등을 통하여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라고 봅니다. 산성 돌과 토축에 녹아 있는 민초의 애환과 생존을 위한 전투를 통하여 지금의 우리들이 있는 것이고 평지읍성의 경우 적의 숫자가 많으면 방어하는데 불리하니 행정업무를 보고 근처 가까운 곳에 산세가 험하여 적이 접근조차 어려운 요충지에 산성을 축성해 놓고 비축물자를 비축했다가 전시에 청야작전을 전개하면서 민군이 산성으로 입성하여 적과 대치했던 것은 당시에 병력과 물자가 부족했던 실정에 맞는 전술이었고 산성이 있는 곳에는 약초와 식용식물이 지금도 대를 이어가고 있음은 살아 있는 우리역사의 일부라고 봅니다.

 

 

(1)청주목(淸州牧)

조선 시대 충청도 서부에 위치한 청주 지역을 관할하던 목으로 청주시 역사문헌에 따르면 1658(효종9) 청주목에 사는 한 천민이 주인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청주목에서 서원현(西原縣)으로 강등된 적이 있고 1667(현종 8)10년의 기한이 지나 다시 청주목으로 복구되었으나 1681(숙종7) 624일에 청주 사람 박상한(朴相漢)이 역모를 일으키는 바람에 청주는 다시 서원현으로 강등되었고 당시에 충주도 충주현으로 강등되어 충청도의 도명이 공청도(公淸道)로 바뀐 상태였는데 충주는 727일에 충주로 복구돼서 도명이 충홍도(忠洪道)로 바낀 후 8년이 지난 1689(숙종15)이 되자 다시 청주목으로 복구되었고 도명도 충청도로 복구되었습니다. 1732(영조8) 이인좌의 난이 발발해 청주가 함락되자 청주 양반이 많이 호응하여 반란의 거점이 되었다며 서원현으로 다시 강등하였다가 1740(영조16)에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이후 1777(정조1)에 역적의 고향이라고 서원현으로 강등하고 충청도를 공청도로 고쳤다가 1786(정조10)10년의 기한이 지나 다시 복구되었다가 1804(순조4)에 대역죄인 한해옥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또 서원현으로 강등되었고 도명도 공청도로 바꿨습니다. 1813(순조13)에 복구하였으나 1826(순조26)에 청주 사람 정상태, 박형서 등이 홍경래의 난과 관련한 유언비어를 살포한 죄로 또 다시 서원현으로 강등되고 공청도로 바꿨다가 이후 헌종 대에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1862(철종13)에 다시 서원현과 공청도로 강등하였다가 1871(고종 8)에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2)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

2품의 병마절도사가 군사업무를 주관하던 곳으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1층 가운데 대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했습니다. 기둥은 높은 네모진 화강석 주초위에 세워 대문의 정중함과 안정감을 두었습니다. 2층은 우물마루를 깔고 누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는데 닭벼슬난간(鷄子欄干)을 설치하여 아름답게 장식 하였습니다. 원래는 충남 해미현에 있던 것으로 청주의 중요성이 확대되자 군제를 개편하여 1651(효종2)에 이곳으로 이전했고 과거에는 정곡루(正鵠樓)라는 현판이 없었는데 호서읍지와 청주읍지에 정곡루라는 명칭이 발견되어 현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3)남석교(南石橋)

남석교(南石橋) 출처 : 다이제스트, 타임스탬프

 

신라 558 진흥왕때 수선 기록이 전하는 조선에서 가장  4m폭에 80m 길이의 남석교. 청주읍성 남문과 청주 일신여고에서 제일교회 앞을 흐르던 무심천 물길에 놓인 3 26  다리로서 1930년대 일제는 읍성을 파괴됐으나 석교는 육거리 땅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남석교가 매몰돼 있는 곳이 육거리시장 일대입니다. 청주읍성 남문 밖에 있던 남석교는 조선시대 이전의 돌다리로는 국내에서 가장 길지요. 고려시대 축조설이 가장 유력하고 남석교가 땅속에 묻힌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입니다. 남석교 밑으로 흐르던 무심천이 1906년 대홍수로 다리 바닥에 흙이 쌓이자 일제는 1932년에 제방공사를 하면서 남석교를 흙으로 묻어버린 것이지요. 예로부터 남석교에서는 정월대보름에 건강을 기원하는 답교놀이가 행해졌는데 일제가 도시정비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민족문화를 말살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고 다리 밑이 토사로 채워져 허물지 않고 매몰시켜 원형이 살아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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