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탐방과 식물

서천읍성(舒川邑城)

작성자이봉수|작성시간26.04.26|조회수909 목록 댓글 0

▲ 동문과 성곽

 

 

오늘은 서천읍성에 다녀왔습니다. 충청도 서해방어의 최전선에 서천, 비인, 한산읍성이 있습니다. 서해에서 금강하구를 통하여 왜구들이 출몰하여 약탈이 극심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축성한 것이 서천, 비인, 한산읍성입니다. 해적질이 직업인 왜구들이 서해바다를 통하여 금강으로 들어오면 장항을 통하여 한산으로 들어오지요. 그리고 바닷가인 비인으로 직접 들어가 노략질과 살육을 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가면 조선군의 공격을 받으니 신속하게 노략질을 하고 도망가야 되는 형편이라서 해안가 마을이 주요 타깃(Target)이 되었던 겁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을 보면 고읍성(古邑城)이 영취산 산마루에 있었는데 세종(世宗,1418~1450) 때 그 지대가 외지고 막혔다고 하여 지금의 서천읍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 때 처음 축성되어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문종(文宗,1450~1452) 때 수축 후 성종(成宗,1470~1495) 연간에 다시 확장했다고 합니다.

 

치성(雉城)

 

흙으로 쌓아 만든 서천읍성은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군데군데 문을 만들어 바깥과 통하게 만든 성입니다. 1438(세종20)에 반포된 축성신도(築城新圖)에 따른 계단식 내벽1443(세종25) 이보흠(李甫欽)이 건의한 한양도성의 수직 내벽 축조기법이 동시에 확인되는 축성정책의 변천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적이라고 합니다. 충청도읍지 등의 문헌에 따르면 서천읍성에는 치성(雉城)1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현재까지의 조사결과 150m 였던 치를 90m의 간격을 두고 설치된 것은 왜구의 공격에 치밀하게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성벽은 둘레 1,645m 1,535.5m 잔존(93.3%) 높이는 3m로 현재는 동문터의 성벽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서천읍성은 조선 초기 세종연간(1438~1450금강하구를 통해 충청 내륙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돌로 쌓은 1,645m 규모의 연해읍성(沿海邑城)(1)으로 평지읍성과는 다르게 자연 지세를 활용하여 산지(山地)에 축성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읍성 훼철령(朝鮮邑城毁撤令,1910)으로 전국의 읍성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성 내부의 공해시설(公廨施設, 행정·군사 등의 공무수행에 필요한 시설)은 훼손되었으나 남문지 주변 등 일부를 제외한 성벽은 대부분 남아있습니다.

 

 

서천읍성은 서천읍 군사리에 있고 서쪽 능선부의 서문지와 적대 동쪽 능선부의 동문지 및 남서 성문지의 일원은 복원을 하였는데 북문지 일원과 주변 성벽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벽과 치 등 전체적으로 읍성윤곽이 남아 있었습니다. 1438년 9월 세종실록(世宗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최윤덕이 면천산성보다 서천성을 먼저 쌓기를 청하여 논란이 벌어지게 되는데 영의정 황희는 면천산성의 공사를 마친 후에 서천성을 쌓는 것이 좋다하여 그렇게 시행했는데 군인이었던 최윤덕의 주장은 면천산성의 내부가 험하고 크다는 이유로 읍성으로 개축하고 있으나 면천 밖에는 좌도만호, 파지도만호, 탄지도만호, 대진만호와 태안, 서산, 당진 등의 포구가 해문(海門)(2)에 접해 있어 적변(賊變)이 있더라도 가장 먼저 적의 침투를 받을 곳은 아니니 읍성으로 개축하지 말고 다시 살피는 것이 낫다. 그리고 서천성은 적로의 첫길목이고 이미 축조를 시작했으니 금년에 축조를 끝내게 하자는 주장이었지요.

 

세종 시절에 하삼도(下三道)(3)에 대한 대대적인 읍성 축조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왜구의 잦은 출몰에 대한 대처를 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입보처(立保處)를 산성에서 읍성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개진하면서부터입니다. 왜구의 노략질에 가장 피해가 심했던 하삼도부터 집중적으로 읍성축조가 시작되는데 세종 8년까지 한해에 17차례 축성을 하기도 했지요. 이후에는 왜구들의 침입이 줄어들어 세종 25년에는 왜구의 침범기록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산성은 적이 쳐들어오면 들판의 곡식과 우물 등 먹거리를 다 치우는 청야입보(淸野入保)를 한 후 적이 지칠 때를 기다려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치소(治所) 역활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나가며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악연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회만 있으면 우리들을 얕잡아 보고 밑에 두려는 근성은 변하지 않고 있잖아요?  역사문화 탐방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요즘 한국 남자와 일본 여성들의 결혼 비울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일본 여자들이 한국에 와서 있는 것은 한국 남자와 결혼하기 위한 경우가 많고 한국에서 살고 싶어 하고 미국의 여자들도 그런 추세라고 하지요.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양에서 음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의 시기라는 겁니다. 시위문화를 보면 예전에는 화염병과 몽둥이가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응원봉이 등장하고 분리수거를 위한 쓰레기봉투를 사용하여 시위현장에 오물하나 없고 젊은 여성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잖아요.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가 제일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과거 일제강점기시절의 일본이 우리를 폭력으로 지배했잖아요. 우리들의 성씨와 이름 그리고 한글도 뺏으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한국문화를 선호하고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서 오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요? 양에서 음으로 바뀌는 부분의 신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조상들이 생각하고 있던 세상흐름의 방향과 많이 달라요. 과학이라는 것이 완성이 되려면 내가 발견한 사실을 가지고 미래를 추측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추측이 안 되고 있어요. 이것은 서양과학의 한계입니다. 작은 분야에서는 맞지만 범위가 넓어지면 안 맞아요. 산업화 혁명이나 공장자동화와 같은 것까지는 강한 힘을 발휘했지만 복잡한 세상, 인간문제에는 안 맞다는 겁니다. 인문과학, 역사과학들도 모든 것은 과학이라고 소위 말하는 좌파들이 주장을 많이 했으나 과학이라면 예견이 가능해야 하는데 못하잖아요. 인문은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문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소위 말하는 과학철학은 서양철학인데 모든 걸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아니라는 것이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사기꾼만 만들고 있지요.

 

아무튼, 상대방이 침범하려는데 국방력이 약하고 방비책이 없으면 당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대들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민초들만 힘들어지니 나라를 지키는 보험인 국방력은 차고 넘쳐도 이상할 게 없는 겁니다.

 

 

(1)연해읍성(沿海邑城)

조선초기 세종연간에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지방행정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해안 요충지에 축조한 읍성

(2)해문(海門)

육지와 육지 사이에 끼여 있는, 바다로 이어지는 통로

(3)하삼도(下三道)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