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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과 식물

태봉산성(胎封山城)

작성자이봉수|작성시간26.05.02|조회수695 목록 댓글 0

충남 부여군 홍산(鴻山)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90m의 산 정상에 위치한 산성으로 훼손되어 흔적을 찾기가 어렵고 항공사진을 근거로 판단이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성 내부의 전체면적이 200평 미만인 것으로 보아 보루로 보였고 성안에서 대규모 전투가 발생할 가능성이 낮은 성으로 이 지역에서 이몽학의 반란이 있었고 1576년에는 왜구들이 전투에서 패하고 산성의 북쪽 능선을 타고 서해바다 쪽으로 도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성은 공원으로 인테리어가 되었고 진입로에 의해 성벽의 서쪽부분이 일부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잘려나간 면으로 보아 성벽의 기단에만 돌을 놓았고 그 내부와 윗부분은 모두 흙을 쌓아 올렸다고 하는데 전문학자가 아닌 이상 확인하기가 어렵고 성벽의 윤곽은 뚜렷하지 않습니다. 성안에서는 민무늬토기조각, 삿무늬 토기조각, 백제 토기조각, 기와조각 등 여러 시대에 걸치는 유물들을 통해 볼 때 본격적으로 성의 기능을 한 때는 백제 사비천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있고 고려 후기 최영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찌른 홍산대첩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홍산관아. 동헌 건물 편액엔 제금(製錦)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기러기를 닮았다는 비홍산(飛鴻山) 자락 아래에 자리 잡은 홍산현(鴻山縣) 관아. 집홍루라 불리는 홍산 동헌의 아문(관아의 문)은 장뫼석에 기둥을 박아세운 누각은 2층 건물 위로 팔작지붕이 관아가 있습니다. 동헌 앞으로 뻗어 나온 큰길을 중심으로 홍산 읍내가 보이고 홍산의 중심이 보이는 이곳은 1596년 홍산을 뒤 흔들었던 반란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몽학(李夢鶴)(1)은 바로 이곳 홍산 동헌에 사람들을 모아 세상을 움직이고자 했습니다. 이몽학의 난은 부당한 삶을 올바로 되돌리고자 들고 일어난 서민들의 봉기일 수도 있고 하급 관리에 머무는 자신의 삶을 넘어 권세를 쥐고자 조정에 맞선 역모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평가가 엇갈리긴 하지만 이곳이 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여 뜻을 함께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당시의 관아는 20여 동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아문과 동헌 건물, 향방청, 객사 정도만 남아있어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게 합니다.

 

홍산 관아의 아문이었던 집홍루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의 고을을 통치하기 하고자 전국을 8개 도로 나누고 8도 아래 330여 고을을 크기에 따라 부, , , 현으로 나누었습니다. 고을의 크기에 따라 관리를 파견할 때도 직급을 달리했고 작은 단위의 현에는 현감(6)을 큰 규모의 현에는 현령(5)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이 일하던 사무소가 바로 관아로 당시 홍산현의 집무소가 동헌이었습니다

지금의 동헌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후 1871(고종8) 관청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전국에 걸쳐 관청 건물을 지어 정비할 때 건립한 것입니다그러나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기능을 상실했는데 홍산현 관아는 일제강점기 이후 홍산지서로 사용되다가 1984년에 부여군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했습니다.

 

홍산대첩(鴻山大捷,13767)

1376년 이곳 홍산에서 왜구(倭寇)(2)들을 물리친 것을 후손들에게 알리고자 1977년에 세워진 대첩비. 당시의 병력규모 등 자세한 기록이 없어 세부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고려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산 관아 뒤산에 태봉산성이 있습니다. 13767월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발호하던 왜구가 금강 상류를 통해 부여를 거쳐 공주까지 들어갔고 배를 타고 남해안 바닷가 마을에 나타나 식량만 빼앗던 왜구들이 차츰 대담해졌지요. 때마침 여름이라 불어난 강물을 이용해 금강을 거슬러 오르며 충청도 내륙에까지 노략질을 하고자 들어왔는데 왜구들의 규모가 커서 당시 지방군은 제대로 대적하지를 못했거나 망신을 당했던 겁니다

주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해 공주가 함락되었고 뒤이어 연산현(논산지역)의 개태사(開泰寺)에서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도 전사했다는 소식에 조정이 술렁이자 나이 육십에 이른 최영 장군이 출정을 자청하게 됩니다

 

고려사 최영전

보잘것없는 왜놈이 횡포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지금 제어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도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군사도 평소에 훈련하지 않았으니 또한 가히 쓰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뜻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사(宗社)를 편히 하고 왕실(王室)을 방위하고자 함이오니 원컨대 빨리 부하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여 주옵소서.” 

 

고려사 절요

至鴻山先據險隘, 三面皆絶壁, 唯一路可通.
홍산에 이르렀는데왜가 먼저 험준한 곳을 차지하여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였고 길 하나만이 겨우 통했다.


우왕은 그가 나이가 들었다며 말렸으나 최영은 굳이 출정하기를 거듭 요청하여 허락을 받은 장군이 휘하 부하들을 데리고 출정했는데 왜군은 이미 홍산 일대를 점령하고 있어 장군은 홍산벌이 내려다보이는 태봉산성에 진을 쳤고 왜구들의 모습을 살피니 공격과 방어에 유리한 곳에 웅거하고 있어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정면 돌파가 좋을 것이라 판단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왜구를 향해 돌격하면서 백발의 장군이 말을 몰아 달려오자 왜구들이 쏜 화살 하나가 장군의 입술에 박혔지만 말을 멈추지도 않고 왜구의 진지로 달려들면서 자신에게 활을 쏜 왜구에게 활을 쏴서 죽이자 그 당당한 모습에 왜구의 기세가 떨어지면서 뿔뿔히 흩어져 도망을 가기 시작했습니다고려사 최영열전의 기록에 왜구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자는 백발(白髮)의 최만호(崔萬戶)뿐이라고 할 정도로 최영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홍산대첩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왜구를 물리친 대승리였지만,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전까지 왜구에게 완전히 농락당하며 한반도 전역을 유린당하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육지에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된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 이전까지는 왜구가 여러 고을을 초토화시키고 있으면 지방군이 힘겹게 버티고 있을 때 뒤 늦게 지원 나온 정규군이 겨우 막아내는 실정이었지요. 육지에 상륙한 왜구는 먼저 온 내지의 왜구와 연계하여 거대한 규모가 되었고 개태사 전투에서 고려 관군이 무참하게 적에게 대패할 정도였습니다. 만약에 또 다른 대패를 당한다면 대규모의 왜구가 무사히 상륙하여 한반도를 유린하거나 한반도 남부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일본 본토에서 패한 남조조정이 아예 점령한 한반도 남부로 옮겨와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는데 나라관리를 잘 못하여 조선시대 임진년에 왜군이 침략하여 실질적인 식민지장책을 폈고 일제감점기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성씨와 문화까지 말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민족말살에 올인한 일본과 협력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던 매국노가 창궐했었는데 지금도 정리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잖아요? 그리고 일본은 지금도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사례는 여건이 되면 소개를 하겠습니다.

 

다시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홍산대첩은 왜구의 세력이 대거 집결하여 물 건너 온 왜구를 궤멸시킴으로써 동아시아 혼란기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고 거의 국가 영웅을 대하듯 하는 60줄의 최영에 대한 찬양은 장장 30여년간 왜구에 유린되어 온 고려 조정의 심정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한 일대 반격의 시점이 왜구의 아주 거대한 침략이 이루어진 순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어찌보면 극적인 전과로 보는 것은 대함대를 동원하여 여러 지점의 왜구들이 홍산지역에 결집했기 때문에 최영에게 박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홍산대첩은 장기적으로 보았을때 왜구의 세가 약해지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물론 왜구는 어느 한순간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이후 황산 대첩이 벌어진 후 즈음에도 침입 자체는 계속되었지만, 대함대를 동원했던 정규군 수준의 왜구의 힘은 분명히 지방 호족 정도의 활약으로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단기적으로도 홍산전투의 승리는 왜구의 공격에 있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태봉산성을 거점으로 한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은 최무선의 진포싸움,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고려 말기 왜구를 크게 격파한 3대 대첩으로 꼽힙니다. 당시 동북아시아 정세를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유럽까지 진출했던 대제국 원이 점차 쇠퇴하면서 홍건적과 같이 억눌려 있던 한족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와 남북조시대를 거쳐 기나긴 전국시대로 접어드는 혼란기에 쓰시마 섬을 근거로 하여 물고기를 잡던 일본인들이 해적으로 업종을 바꿔 활개를 치면서 한반도를 노략질의 대상으로 삼았던 겁니다. 이처럼 고려는 압록강 위와 남해안 바다건너 아래에서 치고 오는 무리들과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나가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1945년 해방 이후 전국적으로 그 원형을 제대로 찾아볼 수 있는 관아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라서 문화재청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해 나주, 제주, 김제, 고창과 거제 등과 함께 부여 홍산현 관아까지 6곳이 사적으로 지정하여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자취를 감출 뻔한 관아 유적들이 조선시대 지방행정과 건축양식 등을 경험하게 해주고 관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옛 도시 공간을 기억하는 답사지가 되어 역사를 바로 보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1)이몽학(李夢鶴,미상~1596)

왕족의 서얼출신으로 반란을 일으킨 인물. 당시 조선은 왜군의 침략으로 민심이 악화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이 터지자마자 왕인 선조는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신의주로 도망가서 민심이 흔들리던 시기로 이몽학은 충청도 무량사(無量寺,부여군 만수산)의 굴속에 잠입해 중들과 함께 깃발, 몽둥이 등을 만들면서 동갑회를 결성해 패거리들에게 계를 만들고 선전하며 동네 어귀 들판에 모이게 했고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에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라면서 "거역하는 자는 죽이고 순종하면 상을 받는다"고 해 모두 따르게 했으며 사족 자제, 무뢰배 등이 이몽학에게 많이 가담했다고 합니다. 홍산현을 습격해 점령했고 청양, 정산 등 6개 고을을 공격했고 군사가 수천을 넘자 한양으로 향하려 했지만 무리들이 질서를 잃자 통솔할 능력이 없어 홍주(홍성)를 공격했다가 홍가신 등이 저항해 함락하지 못했으며 퇴각한 이몽학은 덕산으로 향하면서 "김덕령, 홍계남 등이 합류해 한양으로 갈 것"이라 했지만 부하들이 그를 믿지 못해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고 이몽학은 부하들의 손에 목이 잘려 살해당하고 부하들은 의병들과 관찰사들한테 이몽학의 목을 바쳐 항복하면서 반란이 종결됩니다.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선조의 의심병이 도져 왜군과 잘 싸우던 이순신이 역모를 꾸밀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파직시키고 원균을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을 말아먹게 만들어 바다를 왜군에 내준 조선은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2)왜구(倭寇)

13~16세기경에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약탈을 일삼고 다니던 일본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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