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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과 식물

주계고성(朱溪古城)

작성자이봉수|작성시간26.06.20|조회수1,061 목록 댓글 0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지만 계획된 스케줄이 있어 무주에 있는 주계고성(朱溪古城)에 다녀왔습니다. 주계고성은 이제 발굴이 시작되어 당시의 윤곽을 볼 수 있는 정도이고 군부대가 주둔하던 관계로 개발이 안 되어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이라서 기대가 큽니다. 비가 오는 계절이라서 천막으로 덮어 놔서 성벽의 단면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의미가 있었고 관방유적지를 찾는 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움을 받았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행하는 나름대로의 치성(致誠)입니다.

 

1,500년 이전 전라북도 동부지역에 백제와 신라의 국경은 어디쯤이었을까요? 현재 무주 무풍면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시대 무풍현(茂豊縣) 무산성(茂山城)으로 지목되고 있어 당시 이곳이 신라 영역이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동서로 풍습과 방언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무주군 설천면 일대를 주목해 보면 아마도 이 지역에서 두 나라가 대치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중에서도 남대천을 따라 자리한 청량리와 장덕리 일대가 유력한 접경지역으로 지목되는데 이곳이 격전지(激戰地)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옛길 옆으로는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신라군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소천리 이남고분, 소찬리 유물산포지(遺物散布地)(1), 청량리 유물산포지와 같은 고분(古墳)들이 길옆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 국경을 방어하는 치소(治所)(2) 찾으려면 30km 정도의 협곡을 지나 금강과 합류하기 직전인 무주읍까지 가야 합니다. 남대천의 마지막 장애물인 ▲454 고지를 감아 도는 그곳. 신라 무산성과 남대천을 따라 마주보며 대치하던 백제의 주계고성(朱溪古城)이고 무주는 고대지명이 명확하게 남아 있는 곳 중에 하나고 접경지라는 지리적 중요성 때문인지 몰라도 여러 사서(史書)에 교차되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1145) 지리 진례군

“단천현은 본래 백제의 적천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아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주계현이다.”

 

신라시대의 지명 단천현(丹川縣)은 본래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이었고 고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서 지금의 주계현(朱溪縣)인데 지명의 공통점은 “붉다”라는 단어가 있다는 겁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백제와 신라가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남대천이 피로 물 들었다는 것이나 몇몇 논문이나 저서에서는 현실적인 학술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무주군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제철유적(製鐵遺跡)(3)은 120개소라고 합니다. 무주군의 남대천은 5세기 후반 가야(伽倻,42~562)가 전북 동부까지 확장하여 개척한 제철유적의 분포와 겹쳐집니다. 그리고 조선초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무주 적천(赤川)이 대덕산에서 나와 무주객사를 지나 금산으로 흘러간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의 남대천이 과거의 적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20여소에서 빗물과 함께 계곡물을 타고 철광석을 가득 품은 광석에서 나오는 철분의 붉은 물질이 적천(남대천)을 붉게 물들였을 것입니다.

 

▲협축식 북서성벽 추정 북문지. 성문의 기둥이 있던 기초부와 배수구가 보입니다.

 

가야, 백제, 신라가 산악지대인 전북 동부를 두고 치열한 공방(攻防)을 벌인 이유는 무기와 농기구 등을 만드는 전략자원이라 할 수 있는 철(Fe) 때문이었을 겁니다. 소백산맥을 가로지르는 통로의 입구인 무주읍에 축성된 주계고성(朱溪古城) 혹은 적천성은 교통로 통제와 지역지배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최적의 장소에 구축된 거점성이라는 겁니다.

 

주계고성은 둘레 840m 포곡식(包谷式)(4) 석축산성인데 성내에 뚜렷한 봉우리가 없고 북쪽 회절부가 언덕형태로 조금 높은 정도고 성벽이 성내보다 높고 지형변화가 많아서 장대지를 비롯한 내부시설물의 위치를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남대천에 접한 남동쪽의 평지가 수천 평이 넘을 정도로 넓은데 이곳에서 부재(部材)로 보이는 석재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골짜기에는 대형의 집수지(集水地)가 있어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데 무리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1910~1945)시절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북문과 서성벽 일부가 파괴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간으로 수십 미터의 동벽이 잘려나갔습니다. 북동쪽의 성벽 절개지(切開地)에서는 단면이 선명하게 노출되어 성벽의 내부구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쪽에는 군부대가 오랜 기간 동안 주둔간 주계고성을 훈련장으로 사용하면서 각개전투훈련용 참호를 만들면서 북동벽을 파손한 것으로 보이고 서쪽의 장대지(將臺地)로 추정되는 곳에는 초소가 들어서 있습니다. 곳곳에 방치된 군부대 흔적과 영점사격장 등이 남아 있어 성내 곳곳에는 1,500년 전 고대병사들의 흔적과 함께 겹쳐져 있어 훼손보다는 시간의 교차와 역사의 반복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군사지역으로 묶여 민간개발이 제한된 덕분에 온전한 성벽과 석축, 집수지 그리고 전투 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석환(石環)과 기와조각들이 잘 보전되었다고 보는데 오늘은 비피해를 막고자 천막으로 덮어 확인을 못했으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보는 것은 나중에 다시 볼 수 있으니까요.

 

▲북동쪽의 성벽 절개지(切開地)

 

축성형태는 서북 성벽은 급경사지에 협축(夾築)(5)으로 쌓았고 지형지물의 유리함이 적은 동북 성벽은 완만한 경사지에 토축과 석축으로 성곽을 올렸습니다. 동성벽은 민가가 들어서 있어 확인하기가 어려우나 남성벽과 이어지는 회절부에서 서성벽까지는 많은 양의 석축이 확인되는데 성벽의 높이는 7m 정도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럼, 산성의 축성은 누가 했을까요? 여러 여건을 미루어 볼 때 백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주계고성 북쪽의 대차리고분군은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대차리고분군은 2018년에 발굴 조사되었는데 정황으로 볼 때 주계고성이 있던 자리의 부속 고분군인데 이곳에서 11기의 석관묘에서 신라 토기가 무더기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신라고분군이지요. 석관묘의 구조와 출토유물을 보면 5세기말에서 6세기 초에 조성된 것이고 지표에서 가야시대 토기인 밀집파상문토기가 수습되었는데 백제가 474년 한성(漢城)을 상실하고 가야가 전북 동부로 진출했던 한반도 격변의 시기입니다. 진안 용담면 월계리의 산성에서도 신라고분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가야의 전북 진출 이면에는 신라와의 복잡한 역학관계가 있는데 이 문제를 풀어줄 단서가 2025년 주계고성 발굴조사에서 나타납니다. 영점사격장 남성벽 현장에서 백제 초축과 신라 개축의 흔적이 확인된 것입니다. 석축은 고대 성곽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으며 축성방식과 보축 흔적을 통해 국가별 시기별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운영되었는지 물증을 확보한 것이지요. 주계고성은 7세기 중엽 백제의 무산성(茂山城) 전투에 대한 단서 이외에도 5세기말 한반도에 큰 격변을 가져온 백제의 한성 상실 이후 가야의 이동과 신라의 역학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현장이라고 합니다.

 

▲ 집수지

▲ 주변에 암석이 많은 곳이고 성벽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나가며

 

무주는 바로 위에 충남 금산이 있습니다. 탄현(진산)을 지나면 곧바로 연산의 황산벌이고 백제의 수도인 사비(부여)까지는 평야지대입니다. 그리고 금강을 따라 물길을 내려가면 웅진(공주)와 사비에 닿을 수 있지요. 무주는 사비까지 직선거리로 70km라서 이곳 주계고성은 백제에게 있어서는 소백산맥을 넘는 공격의 시점 이전에 사활(死活)을 걸고 지켜야 되는 중요한 방어거점이자 최전방의 전초기지(前哨基地)었던 겁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성(據點成)이었기에 전사가 있을 것이나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1)유물산포지(遺物散布地)

유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지역

(2)치소(治所)

어떤 지역에서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3)제철유적(製鐵遺跡)

예전에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뽑아내던 시설이 있었던 곳

(4)포곡식(包谷式)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일대를 돌아가며 성벽을 쌓는 방식

(5)협축(夾築)

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축성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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