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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경남 유배문학

거제도 유배문학의 개괄

작성자고영화|작성시간25.11.09|조회수72 목록 댓글 0

<거제도 유배문학의 개괄> 영화(高永和)

 

☞차례 : 1) 거제도 지역문학사 서술의 전제와 과제

2) 거제도 문학 작품의 범위

3) 거제도 유배문학의 이해

4) 거제 유배객의 생활

 

1) 거제 지역문학사 서술의 전제와 과제

거제도의 유구한 역사는 한 마디로 "주변부(변방), 해양성(섬과 바다)"인 '주변적 인식'이나 '변방적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역문학사라면 "적어도 지역적 정신과 지역적 삶의 원리가 적용된 문학"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역사의 지하수’라는 말이 있다. 지역문학사에도 이러한 복류(伏流)하는 역사가 우리들의 인식 저편에서 약동하고 숨 쉬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지하수'를 퍼 올리는 인식이 없이는 지역문학사의 순수성이 배제·축소되고 그 인식방법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또한 모든 스토리텔링은 역사의 두께와 비례하며 귀결된다. 그 지역의 근·현대문학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유동문학, 한문문학 등 근·현대문학 차원의 갈래 체계로 진입하기 이전의 문학적 자산과의 영향 관계를 바탕으로 인식했을 때에 단절적 인식을 극복하고 지역의 정체성은 물론 근·현대문학에 해당하는 작품에 와서 어떻게 정서적으로 변동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지역의 정체성 구현을 위한 지역문학사 인식의 첫 걸음은 참신한 시각과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의 한계이다. 내 것만 보고 남의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기 것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자폐성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또 상투적 지역성에 편승하여 진부해진다면 내재적 자기모순을 발견할 수 없음은 물론, 배타적 지역문학의 울타리에 갇혀 폐쇄적 지역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지역문학이란 그 지역의 삶의 모습, 그 지역 사람들이 살아왔던 역사와 그 속에 숨 쉬고 있는 정신을 그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역문학사 인식과 서술의 과제는 기존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지역문학사의 특수성과 독립성을 어떻게 퍼 올릴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거제의 문제인식은 ‘섬과 바다’라는 공간 인식을 근간으로 하는 것과, 고대로부터 계속되어진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수난사적 인식이다. 또 “일반사를 지방에서 증명하기 위한 역사”나 ‘중앙을 의식한 역사’가 아니라 ‘땅에 새겨진 역사’, ‘땅 속에 묻힌 역사’, ‘땅과 함께 전해져 온 역사’를 ‘지방의 향기와 함께 전하는 것’이며, ‘인간성을 우선’ 하는 것이 지방사라고 하가·노보루는 말하고 있다. 거제 지역문학만이 안고 있는 절실한 문제를 찾아내는 일과, 거제지역 공동체의 정신적 근간을 바탕으로 그 문제를 논의하고 환류시켜 발전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지역문학사 연구에서는 그 지역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밝혀내지 못하게 되면 변별성을 잃게 되고 동어반복적인 논의로 말미암아 탄력성을 잃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거제 지역문학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특수성과 독자성을 통해서 거제 지역문학의 본연의 모습을 거제 지역 공동체를 바탕으로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거제 지역문학사의 탄력성과 다양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거제적인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예기(禮記) 제통(祭統)편에서 ”선조에게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후손이 알지 못하면 밝지 못한 것이다.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다면 어질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 땅의 선조가 남긴 자취는 오늘을 사는 후손된 사람이면 마땅히 알아야 후손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리라. 역사는 단지 과거의 사실만은 아니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오늘날의 것임과 동시에 우리가 삶을 개척하면서 전망하고 있는 미래의 것이기도 하다.

 

2) 거제 문학 작품의 범위 거제도 고전 문학작품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아야 할지,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거제인이 창작한 작품은 모두 거제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외지인이라 할지라도 거제적인, 향토적 요소가 있는 작품은 거제문학의 정수(情粹)에 들어간다."고 정리할 수 있으며, 그리고 거제 지역문학을 "거제사람에 의해, 거제의 역사와 거제 사람의 생활을, 거제방언에 의해서 형상화한(된) 작품"이라는 식의 개념은 상당히 무리가 따른다. 그러므로 이런 좁은 의미의 제한적인 울타리는 거제도 고전문학 범위 설정의 난맥상이 발생할 수 있다. 거제문학으로서의 변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요건은 주변성 개념으로 잠정적으로 설정하고 주변성을 드러낸 작품을 거제문학의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조선시대 거제도 지역의 고전문학에 대하여, 첫째로 조선조 사화 당쟁과 관련하여 관각문인 지식인들이 거제에 유배되어 온 유배인의 작품, 둘째로 거제도에 부사(현령), 만호 등 관인의 자격으로 입도한 사람의 작품과 거제유람(방문)을 통해 지은 작품, 셋째로 순수하게 거제에서 출생하여 여기에서 교육을 받고 과거에 급제하는 등으로 거제에 뚜렷한 문학적 발자취를 남겨 놓은 인물들의 작품과 거제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요, 설화, 만담 등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처럼 거제지역에서 이루어진 문학이라는 개념도 도입해야 한국전쟁기에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학 활동 등이 20세기 거제문학사에서 다루어질 수 있으며, 나아가 거제 고전 문학사를 서술할 경우 조선시대의 유배문학도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21세기 거제문학사는 21세기에 거제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문학을 중심으로 거제도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문학을 포함하여 그 서술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재차 지적한다. 만약 거제 지역문학사가 실증에 그쳐 한국문학이라는 중앙의 역사적 사실을 거제지역에서 검증하는 것이 된다면 이는 단순히 거제라는 지역을 빌린 것일 뿐이며 중앙문학사의 부록으로 전락하는 동시에 중앙의 하청에 불과하게 된다. 유구한 거제역사에서 항상 문제시되고 있는 '변방' 주변에서 거제의 독립성 특이성을 되찾아, 반도의 끝자락에서 땅과 바다를 한꺼번에 공유하며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일반 서민들의 자부심을 일깨우는 계기를 삼아야함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3) 거제도 유배문학의 이해

유배문학은 시대별로 내용에 차이가 났다. 조선 전기에는 결백을 호소하고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부각시키는 특징이 나타난다. 정철(1536~1593)의 ‘사미인곡’이 대표적인데 자신의 결백을 과시하기 위해 임금에 대한 충정을 내보이고 님이 계신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픈 염원을 표출한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궁핍한 생활이 그려진다. 기한(飢寒)이 뼛속까지 스며도 경개(耿介ㆍ대세에 휩쓸리지 않고 지조가 굳음)의 뜻을 잃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배가 고파 책장을 넘길 힘조차 없었던 분도 계시지만, 근신과 반성은커녕 좋은 구경을 하고, 이름난 기생과 만나 맘껏 즐기고 놀아 방탕하기까지 한 분도 계신다. 유배지의 생활은 유배인의 지위나 신분, 정치적 입지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잘 나가는 사대부, 조만간 중앙 정계 복귀 가능성이 높고, 형제나 친족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 여유 있게 지냈다.

 

거제로 유배 온 분들은 대부분 극한의 상황에서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았고 살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절망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며, 환경적인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의 정신적 의지에 따라 삶의 빛깔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존재와 삶이 지니는 가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살고자 희망하는 자의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또한 삶을 수용하는 단계가 아니라 자신의 색채로 채색하기 위해 희망차게 걸어가는 인간의 자유와 존귀함을 알려주고 있다. 운명이 나에게 다가오면, 그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자신의 삶이 되도록 만들었다. 유배를 당한 사람에게 있어서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이 있다. 자신의 가슴에서 느끼는가가 문제다. 여태껏 선비의 도도함과 고고함으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은 유배생활로 인해 가슴에 와 닿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선비와 관료의 기본 덕목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문학은 크게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2개의 시기로 나누는데 보통 1894년 갑오개혁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그러나 거제도의 문학은 그 보다 더 시간이 흐른 1920년 전후로 구분 지을 수 있다. 통영 거제의 현대 작품은 이 시기 이후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 당시 아직까지도 거제도 관련 고전 한문학 작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거제의 고전 문학 중, 아름다운 거제의 형승(形勝), 경치를 읊은 작품은 언제나 읽어도 거제민의 가슴에 환희를 준다. 반면 거제에 유배 와 울적한 삶을 살았던 이방인의 시각에서 거제를 노래한 시는 그리 상쾌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인 작품도 우리 거제 고전문학의 한 부분이라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고전문학을 번역하고 발굴하다 느낀 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작품들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제도의 뛰어난 풍치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거제시 역사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거제도라는 지역에서 창작한 고전문학(한문학 구비문학 한글문학) 작품과 거제도 출신으로서 다른 지역에서 읊은 모든 문학 작품을 총칭하여 ‘거제도고전문학’이라 칭한다. 현재 거제도 고전문학 작품은 유배문학 1400 여편, 거제출신 한문학 약1160 편, 거제관리 또는 유람 時 거제형승을 읊은 작품 약100 편 정도의 한문학 작품이 있고, 거제민요 약 400 편, 거제설화 250여 편으로 분류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거제도고전문학 중에 한문학(漢文學) 문집(文集)은 현재까지 거제출신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의 동록집(東麓集) 약 240편과,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 1764~1845)의 곡구집(谷口集) 약 400편이 있고,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의 『명계유고(明溪遺稿)』에 약 460편이 실려 있다. 유배인의 유배문학은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의 유헌집(遊軒集) 약 700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해도록(海島錄) 약 170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죽천집(竹泉集) 약 240편이 대표적인 한문집(漢文集)이다.

 

거제도 한문학을 특성에 따라 2부분으로 나눈다면, 첫째로 도입(島入)한 관리나 선비, 거제학자•문인이 지은 한문학이다. 이들 작품은 거의가 거제도의 경치를 밝고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분들을 소개하면 "김안국, 이정, 이범, 정이오, 김종직, 조현명, 이학규, 홍성민, 성해응, 송처검, 이근, 차좌일, 김창협, 신위(申緯), 권반, 감경인, 하연, 강석규, 하진, 김세렴, 황준량, 김려(金勵), 허침, 주세붕, 이광윤(李光胤), 안덕문, 하겸진, 윤주하, 정혼성(鄭渾性), 정종한(鄭宗翰), 윤도원(尹道元), 김계윤(金季潤), 김병욱(金秉旭) 등이 있다.

둘째로 유배자(現 유배자 명단 500여 명)의 작품이다. 정서(鄭敍), 이행(李荇), 정황(丁潢), 김진규(金鎭圭), 홍언충(洪彦忠). 이유원(李裕元), 조병현(趙秉鉉), 심광세(沈光世), 홍무적(洪茂績). 이윤(李胤) 김세필(金世弼). 한충(韓忠). 정백창(鄭百昌). 송시열(宋時烈). 남구만(南九萬). 황경원(黃景源), 김창집(金昌集), 류희량(柳希亮), 최숙생(崔淑生), 이려(李勵), 윤광소(尹光紹), 오희길(吳希吉) 등이 있다.

 

유배 작품은 널리 알려진 바, 자신의 신세와 임금에 대한 충정,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거제민의 실상과 풍경을 노래했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배문학은 총 1400여 편에 이른다. 그 밖에 거제 기생(기녀) 도화(桃花), 가향(可香), 소옥화(小玉花), 이아(梨娥),신월(新月), 옥매(玉梅)의 시가 몇 수가 남아 있고, 한글편도 전해지고 있으나, 그 작품수가 많지 않아 소개만 한다.

 

유배문학에 대하여 살펴보자. 거제로 유배 온 유배객들은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주요사건들과 관련된 주요 인물이나 주동자들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기록되어 있지만, 연루된 자나 친인척들의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경상감영, 각 진영, 지역 관청에서 보내온 많은 형사 잡범도 포함되어 상세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배문학은 개인적 정신과 시대적 정신이 절실히 반영된 것으로 대체로 시대적 정치적 갈등 속에서 정치적 밖으로 밀려나 현실복귀의 재진출을 꿈꾸며 그들의 사상과 염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유배지에서 사대부들의 고민과 회환이 담겨있고 당쟁에서 패배했던 실상과 작가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또 유배자들은 교훈과 자연의 풍류보다는 불우한 자신의 현실을 타계하고 다시 영화의 벼슬길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의 강구가 급선무였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읊은 시를 보면, 첫째로는 때늦은 후회라든가 이후 벼슬길에 대한 욕망 그리고 신념이 많이 나타나고 있고, 둘째는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회상이, 그리고 험난한 유배 생활은 물론 거제도의 자연과 지역에 관한 소개로 나눌 수가 있다. 척박한 거제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잠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외로운 학자들의 작품을 통해 그 마음속을 헤아려 보자. 그 역시 학자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속 깊은 동생이었고, 올바른 스승이었다. 이런 유배작품들을 통하여 치열하게 살아간 한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면서, 우리 거제도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조선 산업과 관광지로 변했지만 거제도는 변방이었고, 유배의 땅이었다. 예로부터 거제에 전해오는 말이 있다. "열두 당을 피해서 살거라." 그 많은 유배자들을 본 거제민들이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거제도가 대표 유배지로 눈독을 들인 것은 고려왕조였다. 당시 전국 연결 도로망, 즉 역원 중에 가장 멀리 있었던 곳이 거제 오양역이라, 고려초기에는 가장 멀리 유배를 보내고자하는 죄인은 거제도로 보내던 것이 1912년까지 이어져 왔다. 거제도로서는 불쾌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약 800년간 이어온 유배자들은 죽거나 풀려날 때까지 자기 땅에서 쫓겨난 슬픈 이방인이었다. 세상 밖 거제로 유배 온 당사자들에겐 감당하기 힘든 고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제인들에게는 당대 최고 지식인들로부터 육지의 문화와 사상, 정신을 직접 배워 상대적으로 낙후된 거제의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촉매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거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 각종 죄인의 유배지중 하나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거제 최초 유배기록(고려사절요)으로는 승통(僧統)정(승통탱)·1112년). 왕수 부여후(1112년, 예종7). 부여공(夫餘公) 수(燧)(1112년, 예종7)가 왕위 계승권 다툼에서 밀려 거제도(거제현)로 유배 온 것이 잔존 기록상 최초이다. 또한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과 거제부읍지에 따르면, “태조 초기 거제(巨濟)에 유배된 왕씨들은 날을 정해서 육지로 나오게 하여 주(州)와 군(郡)에 안치해서 고생하지 않게 하고, 그 중에 재간이 있는 자는 선택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에 왕씨 중에 거제에 있던 자들을 완산(完山)ㆍ상주(尙州)ㆍ영주(寧州)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고, 이어 왕강(王康)과 왕승보(王承寶)를 불렀다. 그리고 거제도 둔덕기성은 "읍치 서쪽 30리에 위치하며 석성이고 둘레 1002척 높이 9척 내 못 1개이다. 대대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 조선초기(태조때) 고려 종성 왕씨들이 유배 온 곳이다."

 

대표적인 유배인으로, 고려시대 1157년(의종 11년)에 유배문학 효시 작품인 ‘정과정(鄭瓜亭)곡’을 지은 정서(鄭敍) 정사문(鄭嗣文)이 동래에서 거제로 이배되어 거제에서 13년 귀양살이를 했다가 1170년 10월 말 복권되었다. 그해 8월 30일 무신난 이후 의종이 9월 말 거제도 둔덕땅(둔덕기성)으로 피난왔는데 모친(공예태후)덕분으로 수많은 백관과 가솔들을 거느리고 전하도에서 뱃길로 견내량에 도착, 학산, 오량 뒷편을 거쳐 우두봉 정상에 도착했고, 둔덕기성을 증축했던 역사가 있다. 그 이후로는 1506년 연산군 12년 이행(李荇), 1548년~1560년 정황, 1679년 3월~1680년 5월 송시열(宋時烈), 1689년 김진규(金鎭圭), 1712년 김창집(金昌集), 1881년 이유원(李裕元) 등이 있었다. 가장 마지막 유배자의 기록(독립기념관 소장 기록)은 일제초기 조성환(曺成煥, 1875년∼1948년, 독립운동가)이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郞)가 중국동북지방(만주)을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 체포되어 거제도에 1년간 유형(流刑)되었다. 유배지를 정할 때 보통 중앙정부에서 결정해서 보내지만 거제현(거제부)로 확정되면 거제관아에 도착한 후, 거제읍치에 수용했으나 인원이 초가하면, 다시 거제 여러 지역(수군진영)으로 할당해서 보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유배는 기록상 1912년까지 계속되었고, 고려초기부터 조선초기까지는 견내량 오양역 부근과 사등면 둔덕면에 대부분 안치되었으며(일부 가라산 방어소), 그 후로는 고현에 수십 명이 왔고, 1664년부터는 거제면 읍치 부근으로 대부분 정배되었다. 그리고 귀양인이 너무 많을 때에는 지방관이 관리할 수 있는 거제 7진영에 나누어 배치했다. 조라, 지세포에 유배 온 기록도 찾을 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배지 문화’가 있었다. 한양 땅에서 조선 팔도로 귀양살이를 떠난 사람들은 좌절을 떨치고 일어나 유배지에서 학문을 연찬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시(詩)·서(書)·화(畵)·서한 등으로 위대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특히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떠난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1548~1560년까지 고현동에서 귀양살이 했던 정황 선생은 고현 서문골 거제향교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경남 전 지역에서 제자들이 몰려와서, 거제유생과 함께 거제 최초로 유학의 붐이 일었다고 제자들의 문집에서 전한다. 또한 송시열, 김진규 선생께서는 거제면 반곡서원 터에서 후학을 양성하여 1704년 그의 거제제자들이 반곡서원을 창립하기에 이르고 18세기 초엽, 마침내 거제 유학교육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유배문화의 재조명 작업은, 사람이 살아온 섬으로서 무한한 인문과학적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쾌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배문화의 재조명 작업과 같은 인문과학적 접근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배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거기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무엇보다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있다. 그래서 인생의 격랑을 헤치고 나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감동과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유배 기사가 5,860여 건 나온다. 이 가운데 빈도수가 많은 유배지가 40여 개이고 5위까지는 모두 섬이다. 빈도 건수 1위가 제주도 81회, 다음이 거제도 80회로 2위이나, 문헌상, 유배자(명단이 전하는) 수로는 제주도 약 300여 명 거제도가 500여 명으로 단연코 1위이다.

 

거제로 유배 온 유배자는 현재까지 500여 명의 명단이 발굴되어 있으나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고려시대는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질 않고, 또한 조선시대에는 주요사건들과 관련된 인물이나 주동자들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 기록되어 있을 뿐, 연좌된 자들의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경상감영, 각 진영, 지역 관청에서 보내온 많은 형사 잡범은 상세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광해군 9년(1617년) 경상도 관찰사 윤헌의 장계(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거제현에 정배된 자 중에 도망간 자가 168명이나 된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그때까지 유배자 확보 명단이 98명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부터 1617년까지 18년 동안 도망간 자의 수가 168명이나 된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제로 유배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총 유배자 수가 1,500명이 넘는다.

 

현재 유배자 명단 500여명을 분석해 보면 왕은 고려 의종 1명이고 왕자나 대군은 7명이며, 무인으로서 각 수군진영에 충군으로 유배 보낸 자는 약 33명이다.

제주도보다 유배인의 숫자가 많은 이유가 무얼까? 이는 중요하고 높은 관직이 아닌 사람을 유배 보낼 때에 굳이 바닷길이 멀고 위험한 제주도까지 보낼 이유가 없었고, 남해나 진도보다 많은 이유는, 더 큰 섬으로서 고을수령이 현령이 아니라 부사가 관리하는 큰 고을이기도 했지만, 거제도에는 단위지역 당, 가장 많은 수군 진영이 있어 관리가 용이 했고, 또한 유사 시에 무인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유배문화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이유는 우선 거제도의 자주적인 문화가 아니라는 회의감 때문이다. 또한 유배 때문에 거제도 이미지가 나쁘게 각인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한몫을 한다. 그러나 유배인은 거제 출신은 아니지만 거제도와 이해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로 넓게 거제인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고려시대 정서와 조선시대 정황은 13년을 살았고 또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배로 인해 거제로 왔던 분들이 최소 1,000여 명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거제도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낸 문화가 바로 ‘거제 유배문화’인 것이다. 그리고 유배는 가혹한 형벌이라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내용에는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 유배는 염치와 명분의 상징이었고 자기 완성의 공간이며 자기 성찰의 기회였다. 유배 때문에 거제도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이라는 염려는 기우일 뿐이다. 거제 유배문화는 분명히 거제도의 또 다른 자산이다. 특히 인문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4) 거제 유배객의 생활(The geoje's living of banishment)

(1) 지리적 특성과 문화

거제도(巨濟島)는 크고 아름답다.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으로 해안선만 900리에 달하며 60여 개 섬을 알처럼 품고 있다. 조선 초기 이행(李荇)은 거제를 “나무들은 빽빽이 우거지고 맑은 물은 콸콸 쏟아진다. 항상 구름이 머물러 있고 천년의 아름다움 간직했구나.”라고 했다. 거제도는 전형적인 반농반어촌의 특징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예로부터 농사는 물론이거니와 고기잡이, 각종 해산물 등을 채취하며 살아왔다.

사면이 바다인 환해천험(環海天險)의 거제섬은 왜구가 눈앞에 놓여 있었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요해처(要害處), 즉 적을 막기에 긴요한 용반호거(龍蟠虎踞)의 땅이었다. 계속된 이민족의 침탈(異民族侵奪)과 지배층의 피압(被壓迫階級)은 이 땅 거제민에게, 세상 사람들을 경계하도록 만든 계세관(戒世觀), 잦은 자연재해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자강불식(自强不息), 이에 이웃끼리 서로 돕고 서로 구원(救援)하는 호조호원(互助互援) 정신이 유달리 강했다.

옛 거제는 넓은 바다를 품에 안고서, 집에 대문이 없어 폐쇄적이지 않고 마음이 넓고 자유로워 상상력이 풍부한 유전인자를 가질 수가 있었다. 거제민의 정신은 "자강(自强), 수분(守分), 강인(强忍), 호조(互助), 절검(節儉), 근면(勤勉), 조강(粗剛), 실리(實利), 대망(待望), 동락(同樂), 개척(開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다에 갇힌 섬은 고독하다. 거제사람들은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다는 절박함을 갖고 살았다. 그 섬에서 태어나 바닷바람을 맞으며 성장한 섬사람에게는 독특한 정서가 있었다.

거제 섬 출신들은 어려서부터 거친 바닷바람과 태풍을 맞으며 수평선 저 너머의 세상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졌다. 거친 바다와 빈궁한 삶은 미래의 행복, 곧 영생(永生)으로 이끌어 주리라고 바라는 이상향(理想鄕), 즉 바다 밖의 상세향(常世鄕)이 있다고 믿었다. 때로는 해신(海神)이 바다를 건너 와서 이 땅을 구원해 주리라 소망한다. 아주 옛적 선조들이 험한 바다를 헤치고 왔듯이 고해(苦海)의 현실인 세상에 넉넉한 즐거움이 충만한 정토(淨土, 彼岸)의 세상이 되길 기원했다.

거제는 고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교역에 의존해 살아왔다. 우리나라 남부해안 지역과 제주도 대마도 이끼섬 큐우슈우 등지로 왕래하여 재정이 풍부하였고 여러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다양성과 역동성이 넘쳐난 곳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1128년 중앙정부가 해상족 거제민 820명을 육지로 강제 이주한 사건과 1271년 삼별초의 침입으로 약 1,000여 명을 육지로 소개한 이후부터 섬의 풍속이 점점 다양성을 잃게 되었다. 이후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조선후기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또 다시 거제 특유의 풍속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대에는 육지와 같이 남녀의 구분이 엄중하지 않았으며 남녀의 의복 또한 간편․화려하고 세속적이었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남녀 가사노동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이러한 역사의 토양아래 거제 섬의 여자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억세며 노동에 능숙해졌다. 무속이 행해지는 일도 육지보다 몹시 현저하고 무당의 수도 매우 많았으며, 주술과 각종 신들이 난무하는 다신사상(多神思像)의 고장이었다. 유난히 노래와 춤을 좋아했던 거제민의 현재 전하는 민요의 내용과 사설은 그 바탕이 대부분 조선후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 육지로부터 들어온 유행민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거제민요는 부요(婦謠)가 대다수를 차지하며, 풍부하고 그 질이 빼어나다. 남요(男謠)는 특별한 일, 즉 '상여소리', '뱃노래', '달구질노래' 등에서만 찾을 수가 있다. 이는 노래할 기회가 여인들에게 더 많이 주어진 점도 있지만 세세하고 차분한 여인들의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거제도는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바다를 관장하는 신에 대한 제의가 어민들의 중요한 신앙으로 존재한다. 풍어와 안전한 항해 길을 기원하는 것이다.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신앙형태로 '공수서', 신당' 등의 제의 장소가 거제 곳곳에 있었다. 마을 공동으로 주관하는 '풍어제'와 개인적인 '뱃고사'는 어부들 자신이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 또한 육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성주신앙이 강하여, 어떠한 제사 때에도 주(主) 제사상 왼편에 작은 '성주상'을 차려 가택신(家宅神)께 예를 올렸는데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다. 집안의 복을 지켜주는 구렁이, 두꺼비 등을 해하지 않는 업신앙이 유별났다. 두꺼비가 지네와 싸워 주인을 구한다는 설화와 집안 창고와 재물을 지켜주는 큰 구렁이 이야기는 우리네 주위에서 여러 가지 설화 형태로 전해지는 업신앙의 한 형태이다.

 

(2) 거제도 1506년 유배객의 일상

택지 이행 선생은 죽장을 들고 짚신을 신고 세 칸 띳집에서 살았다. 노복이 있었으며, 집주인은 궁핍한 할미였다. 말을 한필 샀고, 자진 최숙생도 말이 있었다. 직경 홍언충은 채소밭을 가꾸는 임무를 맡았으며, 이행은 양치는 일을 했다. 이행을 지키고 감시하는 병졸은 술을 좋아해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했으나 최숙생의 병졸은 규칙대로 행하는 융통성 없는 감시자였다. 홍군미는 유자도 대숲에 주로 은거했으며, 당시 유배자는 자신의 가솔 한명 이상은 데리고 귀양살이 했다. 처자식은 유배형에 처해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형제와 부친은 연좌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행의 맏형은 이행이 유배 중에도 관리로서 승승장구했다. 거제도는 변방이라, 이 당시 야간통행 금지가 있어 어둑하면 야경꾼이 소라나팔을 부르면서 그 시간을 알렸다. 새벽에는 통행 해제 시간에 맞추어 소라나팔을 불렀는데, 대부분 그 소리에 맞추어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3) 거제도 유배자 상황(the situation of an exile to geoje)

유배지가 결정되면 조정에서는 죄인을 호송할 책임자를 배정했다. 당연히 호송책임자는 유배인의 지위 고하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정2품 판서 이상의 대신은 의금부 도사가, 종2품 참판 이하에서 정3품 당상관까지는 서리가, 정3품 당하관 이하는 나장이 호송했다. 관직자의 경우는 국가에서 말을 지급받아 타고 갈 수 있었고, 노비도 거느릴 수 있었다.

 

호송책임자는 최종적으로 유배지에 도착한 날짜를 확인하고, 거제현령(거제부사)에게 인계하는 일에 더 역점을 두었다. 유배인이 도착한 뒤에는 해당 도의 관찰사가 죄명과 도착날짜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고 형조에 장부를 비치했다.

유배인이 거제도에 도착하면 거제현령이 도착한 날짜와 호송 책임자에게 문서를 인계받은 후에 유배인의 배소를 결정했다. 보통 관내 유배인이 적을 경우에는 유배인을 위한 초가집에 따로 수용했으나, 조정의 큰 일로 인해 한꺼번에 많은 분들이 오면, 매일 보고 관리가 가능한 거리 內, 집이 두 채인 집안에 한 채를 사용토록 했다. 이행 선생은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거처를 잡은 것 또한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고도 인원이 초가하면 거제관내 7진영에 배분하기도 했다. 특히 지세포 진영에 1623년 정규(鄭逵), 1628년 유현립(柳顯立), 유옹립(柳顒立), 유명립(柳命立). 옥포 조라 진영에 1628년 박영택(朴永澤) 등이다.

 

승정원일기,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해사록 등의 고도서 기록을 살펴보면 일운면 지세포(知世浦)에는 인조 1년, 1623년에 전 대사간 정규(鄭逵, 정묘 1567생)가 인조반정 후에 지세포(知世浦)로 정배(定配)되었고 인조 6년 2월 16일(무신년) 유현립(柳顯立)이 ‘巨濟 知世浦 定配’되었다는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온다. 두 분 다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배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1636년 인조 14년 9월 6일 해사록 저자 김세렴(金世濂)의 도서에서 살펴보면 유현립의 지인(知人)인 김세렴이 일본 통신부사로 가면서 거제 지세포(知世浦)에 유배되어 있는 유현립에게 연통을 보낸다. 유현립(柳顯立)은 반가운 나머지 부산포에 자신의 종 막송(莫松)을 거제(巨濟) 지세포(知世浦)에서 부산으로 보내어 예를 올리고 환송케 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정규(鄭逵), 유현립(柳顯立) 두 분 모두 지세포만호의 관할 하에 유배생활을 했지만 가족 친지 지인들과의 연락은 대체로 자유롭게 행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 1628년 인조 6년 5월 26일 도경유(都慶兪)에게 巨濟의 유옹립(柳顒立)을 지세포 위리(圍籬)한 곳으로 가서 봉표(封標)하고 올라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금부의 장계가 있을 정도였다. 유배자가 자기 구역에 들어오면, 해당 관아에서는 거처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유배자의 신분 또는 향후 정계복귀 가능성에 따라 그 대우가 많이 달랐다한다. 특히 유현립은 오랜 지세포 유배생활 동안 지세포만호로 부터 편의를 다 제공 받았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의 신체적 자유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정규 유현립 등은 현령과 만호 모두 같은 양반이라는 신분과 육지의 지식인이라는 동류의식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자유는 허용되었다. 하지만 평민이거나 파렴치한 죄목으로 유배당한 사람들은 거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죽거나 도망치는 일이 허다했다.

 

특히 거제도는 위리안치 유배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원래 집 주위를 빙둘러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는 것이 맞으나,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그런 배소는 없었고, 형식상 집 사립문 주위에 몇 그루의 탱자나무를 심어 위리안치된 유배객임을 알리는 수준이었다. 조선말기로 가면서 당쟁의 격화로 인해 중앙정부의 중요인사는 몇 겹의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배소에서 위리안치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조병현(趙秉鉉) 1847년~1848년, 김문현(金文鉉) 1895년 등이 이에 해당한다. 거제도 내 집단 배소지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는 오양역과 둔덕기성, 조선초중기에는 고현만 일대, 1644년에서 1912년까지는 거제면 외간리와 동상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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