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수달(水獺) 진상> 고영화(高永和)
거제도의 '수달(水獺)'은 계곡이나 하천, 그리고 바닷가에 서식하며 천연기념물이다. 족제비과인 수달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 거제도에서 선조들과 함께 살아왔다. "1481년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 1530년 중종 때 신증동국여지승람, 1759년 여지도서에 수록된 거제부읍지(巨濟府邑誌,), 1864년 거제부읍지, 1899년 거제군읍지"에 기록된 거제의 토산품, 물산(物産)과 진상품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으니, 고려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 거제의 선조들은 수달을 잡느라 고충이 컸을 것이다.
예로부터 수달피(水獺皮) 즉, '수달 가죽'은 귀하여 고가에 거래되어 왔음이 각종 고문헌에 나온다. 그리고 몽고(원나라), 명나라, 청나라가 우리나라에 요구한 조공품은 물론이거니와, 국제 무역에도 인삼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원나라와 청나라는 수달피를 귀히 여겨, 각각 수달피 1천장, 수달피 3~4백장의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께서는 바다에서 물고기나 조개 등을 잡아먹는 놈은 "해달이(해다리)"라고 불렀고, 하천이나 계곡에 사는 놈을 "수달이(물달)"이라 불러 의아해 한 적이 있었다. 거제에서는 활동 지역에 따라 "해달" "수달"로 다르게 불렀던 것이다. 신라 때에도 우리 조상들은 수달을 잡아먹고 수달 가죽은 갖옷이나 옷깃 따위의 털붙이로 사용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주에 어떤 사람이 하루는 수달피 한 마리를 잡아서 고기는 먹고 뼈는 동산에 버렸다. 이튿날 그곳에 가보니 뼈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핏자국을 따라 쫒아 갔는데 수달피 뼈는 제 굴로 들어가서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놀라 이상히 여긴 그는, 감탄하고 주저하다가 출가하여, 이름을 "사랑과 자애를 깨달았다"는 뜻인, 즉 '혜통(惠通)'이라 고쳤다"라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