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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역사 문화

거제섬(巨濟島)의 역사(歷史)와 거제민의 삶. 4편 2015년

작성자고영화|작성시간25.04.20|조회수68 목록 댓글 0

5. 봉건(封建) 조선시대 거제현(巨濟縣

                                                                    2015년 작성.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1) 거제현(巨濟縣)의 환도(還島)와 독립 지방행정 복구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 회군과 사전(私田)개혁을 통하여 정치·경제적 실권을 장악하였고 정몽주(鄭夢周) 등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공양왕(恭讓王)의 선양(禪讓)을 받아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거제현은 아직도 거제 본섬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갈수록 거제현 및 그 속현 등도 그 독립적 존립기반이 크게 위축되어 갔다. 거제 명진현(溟珍縣)은 진주(晋州) 임내(任內)인 영선현(永善縣)에 붙어살았는데 본조(本朝, 조선) 정종(定宗) 원년 1399년(기묘)에 강성현(江城縣)과 명진현(溟珍縣)을 합하여 진성현(珍城縣)이라 이름 하였고, 거창현은 본조 태종 1414년(갑오년)에 거제(巨濟)와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으로 일컫다가 1415년(을미년)에 거창현으로 환원하여 현감을 두고 있던 실정으로, 거제현과 3속현의 위상과 역할이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더욱이 명진현이 진성현(珍城縣)에 병합된 연유는 진주의 남쪽 변방인 영선현으로 옮겨온 명진현의 땅이 협소하고 백성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거제와 거창을 병합하여 제창으로 삼은 두 지역의 병합은 거제현이 거창에 오랫동안 붙어살았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인위적인 병합은 거제현과 그 속현의 독립적 행정단위로서의 존립과 거제 현민들의 독자적 자립의지를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병합된 거제 현민들의 불만이 따랐다. 이는 거제현이 병합된 이듬해인 1415년 태종 15년 3월 계해에 처음 하교하기를 “각 고을[官]을 병합한 것을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니, 종전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이어서 거제(巨濟) 등 8개 읍(邑)을 다시 세우는 조치를 취한 데서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거제 현민들은 정치 지배층에 대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킴으로써 거제현의 독립위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 원종 1271년 인근 내륙지방으로 옮겨간 이래 그들의 생활터전과 독립적 행정 단위를 아직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강성현과 병합한 명진현은 태종대까지 분리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명진현의 인구가 적고 땅이 협소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당시 거제도 등과 같은 남해 연안지역의 섬들이 왜구침략의 최일선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거제 현민들이 환도(還島)하지 못한 연유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제 현민들은 조선왕조의 통제를 무릅쓰고 왜구의 침략이 진정된 틈을 이용하여 개별 분산적으로 거제섬으로의 입도(入島)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 세종 즉위년(1418년) 8월 병신에는, 거제 섬은 왜적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근년 이래로 왜적의 침략이 좀 가라앉았음을 틈타 거제현민들이 나라의 구실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갔으며, 이미 360여 호(戶)가 거제섬으로 옮겨가서 기름진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거제현민의 거제섬에로의 입도(入島)조건은 왜적침략의 약화였으며, 그 규모는 360여 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인리(人吏)와 관노비(官奴婢)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그 호수의 규모는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에 기록된 세종대 거제현의 호수(153호), 인구(423명), 현 수호군(縣守護軍 103명, 이상의 수치는 진성의 명진현 인구를 제외함)과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본 지리지의 호수보다 더 많다. 또한 세종실록(世宗實錄) 권7, 세종 2년(1419년) 윤정월 병신에는 경상도내의 거제(巨濟)·남해(南海)·창선(昌善) 3개 섬에 개간한 토지가 모두 1,130결이나 되었고, 이들 섬에는 부근의 각 고을 인민들이 몰래 들어가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세종 즉위년에 파악된 360여 호의 규모 속에는 거제현민 이외 거제 주변지역의 남해연안 군현민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 2년까지 거제도에는 많은 농토가 개간되어 농업 생산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세종 2년(1419년)까지 거제도를 비롯한 남해연안의 섬지역이 개간될 수 있었던 연유는 태종대 이래 세종 즉위년까지 왜구 격감현상과 함께 세종원년(1419년)에 이루어진 이종무의 대마도(對馬島) 정벌의 성공에 기인한 것이었다.

경상도 관찰사 하연(河演, 1376~1453)의 글에서도 거제섬 환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호성 첨추(僉樞, 첨지중추부사, 정3품 무관. 거제현령)를 격려하며 (거제도로) 보낸다.(賀寄李僉樞 好誠 幷小序 時李公疑行巨濟縣令)’라는 내용 中에, “대마도 정벌이 끝난, 1419년(세종2년) 세종과 태종 두 임금께서 거창군에 있던 거제현을 거제도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거창 진주에 있는 거제현민을 8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주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문종실록> 7권, 문종1년(1451년) 5월 6일 기록에 따르면, 세종 4년(1422년) 환도(還島) 직후의 거제현 치소(治所)는 수월리(水月里)로 목책을 설치하였으나 현민들의 거주와 농업생산에 있어서의 입지조건, 그리고 군사적 지형조건 등에서 불리하였다. 그래서 세종 7년(1425년) 2월에는 거제현의 치소를 그 조건상에서 유리한 고읍(古邑, 고려시대 읍치)으로 옮겨가는 방안이 검토·의결되어, 가을부터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고읍의 읍성은 세종실록(世宗實錄)권30, 7년 10월 신사에서 사월포(沙月浦)에 위치하는 것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지금의 사등(沙等)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종8년 1426년부터 사등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22년 후 세종30년 1448년 완공했다. 이후 문종 즉위년 1450년 9월에 개축을 건의하였으나 불허되었다.

 

문종실록(文宗實錄) 권4, 문종 즉위년(1450) 10월 무술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분(鄭)이 치계(馳啓)하여 사등의 사월포에 있던 거제의 읍성은 낮고 좁으나 고정부곡은 지세가 넓고 평평하며 골짜기가 깊고 은밀하며 또 우물과 샘이 있어 경작할 수 있고 주거할 수 있는 땅이 많아 유리함으로 읍성을 옮겨갈 것을 제안하여 수용되었다. 이 조치에 대하여 문종 원년 5월 계묘의 기사에서는 거제현 사람이 상언(上言)하여 이전부터 반대하였으며, 해당 관서도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박가대(博加大)·일기주(一岐州)의 왜인이 거제를 침략한다는 글을 접함으로써 이전문제를 재론하여 고정리의 이전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 때 고정리로의 이주 반대명분은 인리(人吏)와 관노비(官奴婢)가 이미 토착하여 번성하며, 새로운 영선(營繕)에 따른 민생(民生)의 불편을 제시하고 있으나 그 현실적 이유는 이주에 따른 인리(人吏)들의 재향 토착적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데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반대 주도층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주의 배경은 논의과정에서 제기된 고정부곡의 거주와 농업생산 기반에 있어서 지형적 조건과 함께 거제도 각 포(浦)의 중앙을 연결하는 요충으로써 해상교통의 거점이라는 조건, 국방상의 방어전략지라는 조건이 유리하여 영구한 터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2, 경상도(慶尙道), 거제현(巨濟縣), 성곽(城郭)에 인용되어 있는 이보흠(李甫欽)의 기문(記文)에는 문종대에 시작된 고정의 읍성축조에 경상하도(慶尙下道)의 백성 20,000여 명을 동원하였고, 영천군사(永川郡事) 정차공(鄭次恭), 진주 판관(晋州判官) 양연(楊淵), 곤양군사(昆陽郡事) 최성로(崔性老), 청도군 사(淸道郡事) 이의(李椅), 사천 현감(泗川縣監) 장오(張俉), 진해현감(鎭海縣監) 김한진(金漢珍)에게 공역을 분담하여 감독하게 하였으며, 거제 현령 이호성(李好誠)에게 관사와 부고(府庫)를 세우도록 하였다고 한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거제현, 읍성에는 고정리(古丁里)의 읍성 석축이 문종(文宗) 즉위년 1451년 11월부터 축조가 시작되었으며, 단종 원년 1453년 9월 축성 감독으로 김순이 파견되어 성 밖의 해자를 구축했고, 고정리 읍성(고현성)으로의 이주는 1455년에 이루어졌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경상도, 거제현, 성곽에는 읍성이 석축이며, 둘레가 3,038척, 높이가 13척, 성안의 샘이 셋, 못이 둘이라 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고정리의 읍성은 문종연간에 축조가 일단락되었으며, 관사와 부고(府庫), 집 40여 간, 둘레 3,000여 척, 높이 13척, 샘 3, 못 2곳과 같은 규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거제현은 국방상의 안정, 거주의 편리성, 농업 및 어업생산력의 발전기반, 해상교통의 원활성을 확보함으로써 거제지역의 영속적인 발전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으며, 고정리 現 고현(古縣)이 1644년 거제면 서상리로 옮겨가기 전(前)까지 거제지역의 행정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거제현(巨濟縣)의 수군 7진영과 군사 방어시설

거제도는 일본과의 실질적 조선의 최후 방어지(防禦地)이자 적을 막기에 긴요한 요해처였다. 거제현은 남해 연안지역이 왜구침략의 최일선에 노출됨에 따라, 조선초기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수군의 창설 뿌리는 고려말기 1374년(공민왕23년) 왜구의 습격 이후 재창설된 수군에서 기원한다. 이때 연안지역에 수군을 모집하였고 공양왕 3년에는 3정1호라는 원칙을 기본골자로 시행하였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육군과 같이 16세~60세까지 1개월 근무씩 1년 6개월 복무하게 하였다. 조선 태조 6년(1397년) 각도의 연해거점에 15개에 진을 만들고 첨절제사로 하여금 군대를 통솔케 하였으며 1398년엔, 만호 천호 백호의 수군품계를 만들었다. 태조7년(1398년) 9월 정종 즉위 교서를 통해 전국적인 차원에서 수군창설이 이루어지게 된다. 태종 때에는 수군도절제사를 두었으며 세종2년(1420년) 병마도절제사로 바꾸고 1421년에는 수군도안무처치사를 두어 수군의 군무를 맡게 되었다(수군절도사,수군첨절제사, 만호). 임진왜란부터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신설되어 이순신 장군이 초대 통제사를 맡게 된다.

 

거제도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중기까지는 거제현령(수령)이 수군을 함께 통솔하며 근해를 지켰다. 거제현령이 왜구와 수군전(水軍戰)을 치르다가 전사하는 기록이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이후 고려말기 가라산방어소(다대포)가 송변현에 설치되었던 것은 고려말 몽고의 일본 침략과, 대마도 정벌 時에 기착지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거제도 수군은 고려말기 공민왕 때부터 해운 교통로인 진해만과 견내량을 통과하는 세곡선과 연해 어선을 보호하고자 벌써 견내량과 영등포(장목면)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각종 고문헌에서 이를 전하고 있다.(통영 삼천진 가배량진, 고성 소비포 사량 당포, 진해 제포 등. 당시 통영 남쪽 섬, 미륵도를 포함하여 모두 거제도 관할 지역이었고, 당시 미륵도에 삼천진과 가배량진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후 태종4년(1404년) 견내량에 거제도의 공식적인 최초의 만호(萬戶)진영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견내량진은 세종1년 1419년 이종무의 대마도 2차 정벌 후 폐지되었다. 또한 태종11년(1411년) "가배량도만호(세종때 수군도안무처치사, 1488년 성벽축조)"가 설치되었고, 1466년 이후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바뀌어, 이후 임진왜란을 맞이했다. 세종6년(1424년) 오아포(수군도안무처치사)․영등포․옥포 등이 거제현을 관장하였고, 1430년(세종12)에 오아포에 수군 주진을 두고, 영등포(1418년 목책, 1490년 성벽 축조)와 옥포(성벽 축조 1488년)에 만호를 두었다. 세종26년 1444년 지세포만호(성벽 축조 1457년)를 두었다. 단종1년 1453년 조라포 수군만호(1490년 성벽 축조, 1664년 옥포조라 이동)를 설치하게 된다. 1470년 성종원년 거제도를 빙 둘러 여러 제진이 구축되어 해상을 방어케 하였다. 이후 조선중기 거제 7진은 ‘옥포, 지세포, 조라(일운면 구조라), 장목포, 영등포(장목면 구영), 율포(장목면 율천, 1450년 수군진 설치, 1530년 이전 성벽 축조), 오아포(가배량은 1603년 진영 설치)’이었다. 조선후기부터 옥포, 지세포, 조라포, 영등포 가배량에는 만호가 관리하고, 율포보에는 권관이 장목진에는 별장이 관장하였다. 1711년에 거제현이 거제도호부로 승격 되면서 거제면 죽림포에 거제부사 직할 수군진이 만들어지면서, 8진영이 되었다. 거제8진은 장목포, 영등진(1756년 둔덕 학산), 가배량, 율포(남부면), 지세포, 옥포, 조라(옥포 동편), 죽림포이다.

 

○ 위의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조선전기 거제지역의 군사 조직을 살펴보자.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1393년) 5월에는 거제 병마사(정3품, 수군절도사)가 존재하고 있었다. 세종 2년(1420년) 윤 정월에는 백성들이 거제 등지의 섬에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방어를 하며, 또한 부근 항구에 있는 병선으로 백성을 수호하게 하였다. 세종 3년(1421년) 2월에는 경상도 우도 수군도절제사의 건의를 수용하여 도내에 사는 만호(萬戶)나 천호(千戶)를 역임한 사람으로 배 타는데 익숙한 자와 한량(閑良)을 뽑아서 모두 거제도로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다. 특히 세종 4년(1422년) 2월에는 이 이전부터 거제지역에 시위군과 배타는 군사 및 영전(營田)이 있었으며, 이 때에 이르러 영전을 개혁하여 환도(還島)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짓게 하고 그 조세를 면제하며 또 병선 66척으로 지키게 함으로써 거제현의 복구와 함께 군사방어 능력도 강화시켜 갔다. 아울러 세종 4년(1422년) 12월에는 경상도 관찰사의 의견을 수렴하여 방어가 심히 긴요한 거제현의 현령을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사람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세종 7년(1425년) 2월에는 거제현의 사람과 물화가 크게 성할 때까지 거제현의 수호군(守護軍)을 종전 100명에서 200명으로 증강하고, 그 200명은 부근 각 고을의 신백정(新白丁)을 육군과 상호 교환하여 정속시키고 4번으로 나누어 부방(赴防)하도록 시행하였다.

 

세종 13년(1431년) 7월에는 경상도 감사가 올린 거제도 외곽인 율포의 전토(田土)는 하청 가이슬포에 사는 사람들이 경작하게 하고 옥포(玉浦)·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에게 수호하도록 하였으며, 세종 26년(1444년) 8월에는 경상도 관찰사·도절제사·수군처치사 등에게 거제 등의 고을에 대한 왜적방어를 철저히 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세종 30년(1448년) 12월에는 거제현은 방수가 긴요함으로 백성들의 전세를 현창(縣倉)에 바로 바치게 하여 군수(軍需)의 비축으로 삼았다.

 

이처럼 세종 대에는 대 왜구(對倭寇)정책과 관련하여 거제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군사 수의 증강, 군비의 확대, 조직체계의 재편, 강화 등과 같은 형태로 군사 방어체계를 크게 강화·확립시켜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거제현의 오아포는 수군 도안무 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 수군도절제사)가, 영등포는 수군만호가, 옥포는 가배량 도만호와 견내량 만호가 각각 수어하는 체계로 편제되어 있었다. 특히 대마도 정벌과 거제현의 복구과정에서 거제현의 군사적 기능 및 현민의 보호가 재인식되어 군사력 증강은 보다 확대되어 갔다. 세조연간에는 전국의 방위체제를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재편 강화하면서 거제현의 군사체계도 변화되어 갔다. 세조 원년(1455) 9월에는 거제진이 사천진, 세조 3년(1457년) 10월에는 창원진에 각각 속하고 있었다. 이 해에 이미 거제현의 중요한 각 포에 군사와 병선 및 성보가 갖추어져 있었는데 영등포·옥포·지세포·조라포·오아포가 그것이다. 세조 4년(1458년) 2월에는 거진(巨鎭)을 설치하였고, 세조5년(1459년) 7월에는 거제현 수군의 주진(主鎭)을 거제 가배량(오아포)에 두었고, 제포(지금의 진해 웅천)에 거진(巨鎭)을, 9개포에 제진(諸鎭)을 두었다.

 

거제의 각 포가 세조 5년(1459년) 7월에는 제진체제(諸鎭體制)로 재편되어 갔다. 거제수군의 주진은 오아포 등지, 제진은 옥포·지세포·영등포·조라포 등지에 설치되었다. 그 규모와 이후의 연혁변화 등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2, 경상도, 거제현 진보 등을 비롯한 지리지나 읍지 등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거제지역은 세조 13년(1467년) 군사 요충지로서 특수지역에 설치된 유방군(留防軍)이라는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거제지역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재확인하게 한다. 1469년 이후 주진체제가 폐지되고 영(營)으로 바뀌면서 거제섬도 재편과정을 겪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관방조(關防條)에는 “영등포는 현 동쪽으로 하청리과 거리는 42리이며 군병강(軍兵舡) 7척․무군병강(無軍兵舡) 6척․기강군(騎舡軍) 7백명, 옥포는 연초리와 15리 120보에 있으며 군병강 10척․기강군 1천명․무군병강 6척, 지세포는 현 남쪽 내에 있으며 관청과는 30리60보이며 군병강 12척․기강군 천60명․무군병강 5척, 조라포는 현 남쪽으로 명진리와 관문(官門) 30리50보이며 군병강 8척․기강군 6백명․무군병강 3척, 우수영은 현의 남쪽으로 오아포에 있으며 관문 35리80보이며 군병강 21척․기강군 2천1백2십명․무군강 10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성종 16년(1485) 3월에는 영마다 보루를 설치하여 군사 방어시설을 강화시켜 나갔다. 현재까지 거제지역에서 확인되거나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읍성(邑城), 관방성(關防城·營·鎭·堡), 산성(山城)은 거제지역이 왜적방어의 관문이었으며, 왜구침략에 대한 거제사람들의 피해와 방어의지를 알려 주는 역사·문화적 흔적이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 왜군이 남해연안 지역에서 장기 주둔을 목적으로 쌓은 왜성(倭城)도 그 당시 거제지역이 군사적 해상 요충지였으며, 거제 지역민들이 왜군의 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3) 거제현(巨濟縣)의 토산품과 진상품

조선시대의 부세는 전세(田稅)와 신역(身役), 그리고 진공(進貢)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공물은 군현 단위로 그 지방의 산물과 토지 결수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하여 민호가 공납하는 토산의 현물로서 호를 대상으로 부과하였다. 공물 내용을 보면 농업생산물을 비롯하여 가내수공업품, 해산물, 과실류, 광산물 등 천연산물이 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거제도의 토산품(물산)과 더불어 거제읍민의 고된 부세 부담이 된 진공(進貢)현황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각종 사료 기록에 전하는 토산품(土産品) 물산(物産)를 몇 차례에 걸쳐서 정리하고, 다음으로 현물납으로 이어진 진상(進上)과 공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거제는 예로부터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어자원의 보고(寶庫)를 지녔으므로, 일찍부터 수산물과 과실 등이 중앙 및 지방 관부에 상납되었다. 더욱이 서해의 안면도 및 변산반도 일대, 서남해의 완도와 더불어 다수의 봉산(封山)을 보유한 까닭에 산림 자원과 연관된 임산물의 산출도 적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성책(成冊)을 비변사에 보고하는 도내 송전(松田)이 20 고을에 170곳이었는데, 거제 한 고을에서만 무려 45곳이었다.

거제부(巨濟府)의 주요 산물(産物)을 열거해 보면 어물류는 전복과 홍합을 비롯하여 문어, 청어, 대구어, 해삼과 전어, 조기와 농어, 낙지 등과 해조류로는 미역과 김, 가사리, 우뭇가사리 등을 들 수 있다. 18세기 중엽 이전에는 이 외에도 상어와 준치, 숭어와 홍어 그리고 수달(水獺)까지도 등장하고 있었다. 과실로는 유자와 석류, 비자 등이 자생하였고 천문동과 맥문동의 한약재와 표고버섯과 갈분(葛粉)이 많이 났다. 이 외에도 무성한 수풀 속에서 弓삭木(활, 창 등을 만드는 나무)이 반출되고, 흑우(黑牛)와 사슴이 사육되었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진상품 내지는 공납물로 봉건사회가 끝날 때까지 올려졌다. 그리고 19세기 중엽과 말엽의 두 시기를 대비하여 검토해 보면 상납 시기와 품목별 물량의 차이만 다소 나타날 뿐, 품목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조선시대 거제도 진상품과 물산(物産)>
(가) 18세기 진공(進貢)품목 / 거제부읍지(巨濟府邑誌, 1759년) 여지도서(輿地圖書)
천문동, 맥문동, 해의(김), 생청어, 생록(말리지 않은 녹용), 단인복, 표고버섯, 녹용, 건전어(말린 전어), 백문어, 생복식해(전복 젓갈), 건복(말린 전복), 홍합, 해삼, 유자.[天門冬 麥門冬 海衣 生靑魚 生鹿 短引鰒 蔈古 鹿茸 乾箭魚 白文魚 生鰒食醢 乾鰒 紅蛤 海蔘 袖子(柚子)]

(나) 19세기 후반 거제도 진상품
① 진상품 : 전복(22貼 2串/ 8첩 7곶 5개), 마른 홍합(11斗 7두/ 9두 7도 8홉), 마른 해삼(11두/ 5두 8도), 생청어(31마리/ 25마리) 그리고 소금에 약간 절인 생복(280개/ 127개)이 주된 것이었고, 표고버섯(4斤 5兩/ 4근 6냥)과 돗자리(草席)(6立/ 5립),十冬音(1枝/〃)이 어우러졌다.

주로 순영에 삭선(朔膳)이나 물선(物膳)으로 상납하였지만, 왕대비전이나 중궁전의 탄일 물선으로 오르기도 하였다. 흑우와 생청어는 황간현과 창원부에 올려졌는데, 후자는 특히 종묘천신(宗廟薦新)에 받들어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일성록(日省錄) 순조 5년 정월 19일. 실제로 거제 앞 바다에서 해독(海毒)이 발생하여 홍합을 채식(採食)한 석격(船格)이 치사하고, 천신(薦新) 진상물인 생복(生鰒)을 건복(乾鰒)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또한 별회곡(別會穀)으로 바꿔 무납(貿納)한다고 하나 결국은 만호에게 부과되기 마련이었다.

이 외에도 7진보에서는 별도로 통영에 물납이 이뤄졌다. 36把半(파반) 길이의 망자(網子,그물)와 대곶(大串,대꼬챙이) 2同, 표고 버섯과 천문동, 맥문동, 백복령(白茯령), 산약(山藥) 등의 약재와 유자와 잣, 그리고 궁삭목과 산유자목, 갯동백나무 등이 그 물종이었다. 가배량진의 경우에는 전어(4마리), 문어(2마리), 조생 미역(30꼭지), 김(每戶 3홉 5작식)을 거두어 거제부에 수납(輸納)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더러는 부민(府民)들에게 급가(給價)하여 거두어 들였다 하더라도, 추가액수가 늘어나 온전하게 실가(實價)에 이르기는 어려웠다.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아온 그들에게 끊임없는 현물납의 부과는 늘 생계의 위협을 초래하는 잠재적 요인을 안고 있었다.

② 7진보 통영 물납 : 36把半(파반) 길이의 網子(그물)와 大串(대꼬챙이) 2同, 표고버섯과 천문동, 맥문동, 백복령(白茯령), 산약(山藥) 등의 약재와 유자와 잣, 그리고 궁삭목과 산유자목, 갯동백나무 등. 가배량진의 경우에는 전어(4마리), 문어(2마리), 조생 미역(30꼭지), 김(每戶 3홉 5작식)을 거두어 거제부에 수납(輸納) 함.

<조선시대 거제도 토산품(土産品) 각종 기록물>

(가) 조선초기 세종실록(世宗實錄)권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에는 거제현의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 개간 토지)이 709결이며 논이 조금 많다고 한다. 토산생산품은 벼·조·콩·메밀이며, 토공(土貢)은 대구·문어·생포·미역·우무·표고버섯·세모이다. 바닷물을 끓이는 염소(鹽所)는 4곳으로 둘은 모두 현 동쪽에 있고 하나는 현 서쪽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현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李荇)1506년 거제 상문동 유배] 1530년 작성.
【토산】 『구증』 옻[漆]ㆍ활과 창ㆍ수달(水獺), 왜닥[倭楮] 유자도(柚子島)에 심는다. 문어ㆍ전복[鰒]ㆍ조개ㆍ홍어ㆍ청어ㆍ미역ㆍ대구[大口魚]ㆍ유자ㆍ석류ㆍ표고[香蕈]ㆍ꿀[蜂蜜]ㆍ산무애뱀[白花蛇]ㆍ지황ㆍ해삼ㆍ모래무지[鯊魚]ㆍ전어. 『신증』+ 준치[眞魚]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농어[鱸魚]ㆍ낙지[絡締]ㆍ소금ㆍ치자. [+대[竹]ㆍ녹용(鹿茸)ㆍ김[海衣]]

(다) 물산(物産) 거제부읍지(巨濟府邑誌, 1759년) 여지도서(輿地圖書)
漆(칠, 옻) 弓槊(궁삭,활 재료나무) 水獺(수달) 倭楮(왜저,산닥나무) 種柚子島(종유자도) 文魚(문어) 蝮蛤(복합) 紅魚(홍어) 靑魚(청어) 大口魚(대구어) 柚(유자) 石榴(석류) 香蕈(향심,표고버섯) 蜂蜜(봉밀,벌꿀) 白花蛇(백화사,산무애뱀) 地黃(지황) 海蔘(해삼) 沙魚(사어,모래무지,상어) 箭魚(전어) -舊增옛날에는 眞魚(진어,준치) 石首魚(석수어,조기) 秀魚(수어,숭어) 鱸魚(농어) 絡蹄(낙제,낙지) 鹽(소금) 桅子(외자,치자)

(라) <거제 토산품> 1750년대 해동지도
삭(槊 창). 수달(水獺). 왜저(倭楮 닥나무) : 종 유자도(種柚子島). 수어(秀魚 숭어). 문어(文魚). 전어(錢魚). 청어(靑魚). 홍어(洪魚). 석류(石榴). 지황(地黃). 해삼(海參). 유(柚 유자). 백화미(白花米). 석수어(石首魚 조기). 봉밀(蜂蜜 벌꿀). 곽(藿 미역). 대구어(大口魚대구). 사어(鯊魚 모래무지, 상어). 복합(鰒蛤 전복, 백합조개). 외자(桅子 치자나무). 향심(香蕈 표고버섯). 진어(眞魚준치). 노어(鱸魚 농어). 낙제(絡蹄 낙지). 염(鹽소금)

(마) 토산(土産) 거제읍지 1864년 대동지지
대, 옻, 왜저, 유자, 치자, 석류, 표고버섯, 벌꿀, 녹용, 김, 곽(미역), 해삼, 전복, 문어 등 어물 15종, 궁삭, 수달.[竹漆倭楮柚桅榴香蕈蜂蜜鹿茸海衣藿海蔘鰒 文魚等魚物十五種 弓槊水獺]

(바) 토산(土産,특산물)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1899년
흑우 궁삭(활) 유자 석류 봉밀(벌꿀) 치자 천문동 맥문동 표고버섯 갈분(칡) 문어 전복 백합조개 청어 미역 대구어 해삼 전어 석수어(조기) 노어(농어) 낙지(絡蹄) 소금 김 우뭇가사리.[黑牛 弓槊 柚石 榴 蜂蜜 栀子 天門冬 麥門冬 蔈古 葛粉 文魚 鰒蛤 靑魚 藿 大口魚 海參 錢魚 石首魚 鱸魚 絡締 塩 海衣 加士里牛毛]
그 외 삭(槊 창). 수달(水獺). 왜저(倭楮 닥나무) 종유자도(種柚子島). 수어(秀魚 숭어). 전어(錢魚). 홍어(洪魚). 지황(地黃). 백화미(白花米). 사어(鯊魚 모래무지, 상어). 진어(眞魚준치). 염(鹽소금) 등이 있었다.

(사) 19세기 거제부 주요 산물 : 전복 홍합 문어, 청어, 대구어, 해삼, 전어, 조기, 농어, 낙지, 미역, 김, 가사리, 우뭇가사리, 유자, 석류, 비자, 천문동, 맥문동 한약재, 표고버섯, 갈분(葛粉), 弓삭木이 반출되고, 흑우(黑牛), 사슴, 인삼(2錢 6分)과 天門冬(2냥), 맥문동(麥門冬)(4냥), 흑우(5마리)

 

<조선시대 거제부(현) 진상품 토산품[土産品, 물산(物産)]> 기록 上.

품 목1481

 
1530


1759 18641899비 고

옻(漆),칠 ①1481년 성종때 동국여지승람 자료.
 
②1530년 중종때 신증동국여지승람(이행(李荇) 거제 상문동 유배, 거의 정확한 기록).
 
③1759년 여지도서에 수록된 거제부읍지(巨濟府邑誌,)
 
 
④1864년 거제부읍지
 
 
⑤1899년 거제군읍지


활과창,궁삭(弓槊)

수달(水獺)

왜닥(倭楮),왜저

유자(柚子)

문어(文魚)

전복(鰒)

조개(蛤), 홍합, 백합 

홍어(紅魚) 

청어(靑魚) 

미역(藿)

대구(大口魚) 

석류(石榴)

표고버섯(香蕈)蔈古

벌꿀(蜂蜜)

산무애뱀(白花蛇)  

지황(地黃) 

해삼(海蔘)

모래무지(鯊魚,沙魚) 

전어(箭魚) 

준치(眞魚)   

조기(石首魚)   

숭어(秀魚)   

농어(鱸魚)   

낙지(絡締)   

소금(鹽)   

치자(桅子)  

+대(竹)    

+녹용(鹿茸),사슴  

+김(海衣)  

가사리    

우뭇가사리(加士里牛毛)    

비자    

천문동(天門冬)     

맥문동(麥門冬)    

갈분(葛粉)    

흑우(黑牛)    

인삼    

백화미(白花米)    

돗자리(草席)    

열두름(十冬音)물고기나 나물을 짚으로 두 줄로 엮어 진상하는 것.

위와는 다른 별도의 7진보 물납 중에 포함되지 않는 물품
網子(그물), 大串(대꼬챙이), 표고 버섯, 천문동, 맥문동, 백복령(白茯령), 山藥 등의 약재, 유자, 잣, 궁삭목, 산유자목, 갯동백나무


 

 

4) 거제(巨濟) 목장역사 및 구점(驅點)

거제도 목장은 1012년 고려 현종 3년, 칠천도에 목장을 처음 설치한 후 조선말기 거제목장이 폐쇄될 때까지 약 900년간 목장을 운영하였으니 거제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크다. 조선 말기까지, 거제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도가 큰 순서는, 첫째 바다를 통한 선박건조와 거제 7진영 수군 및 해안방위와 전쟁의 1300년 역사. 둘째 거제도 유배자(유배문학 포함)관련 800년 역사. 셋째 거제도 목장(고려~조선말기 약900년)의 역사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조선초기에는 거제 7목장을 두었으나 단종 즉위년 1452년부터 거제부 목장 9개소 설치, 4개포구 영전을 설치하였다. 거제 7목장은 "산달도, 구천동, 탑포, 구영등, 장목포, 구조라포, 지세포"이며, 이후 1678년 숙종 4년 기록 중 거제목장 9개소는 "칠천도, 가조도, 산달도, 구천동, 탑포, 구영등, 장목포, 구조라포, 지세포" 목장이다(대동여지도, 신동국여지승람). 조선말기에 거제7목장(牛馬場)이 통폐합 되었다.

특히 조선전기 거제시 상문동 삼거리, 동부면 구천동 마을은 당시 거제읍치였던 고현성과 가까웠던 지리적 위치로 인해, 구천동 목장의 ‘구천점마소(九川點馬所)’가 있었다. 이에 거제도목장의 총감독관이었던 경상우평사(慶尙右評事, 정6품 외반직)이 점마소(點馬所)에 거주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당시에 말의 말굽을 보호하던 ‘편자’, 안장의 ‘등자(鐙子)’ 등을 만들던 대장간도 보유하고 있었다. 1500년대 기록에 따르면, 거제 말(馬)은 갈기가 검은색이고 몸통은 자흑(紫黑)색의 털을 가진 자류말(紫騮馬)과 빛깔이 검은 가라말(加羅馬)이 주종을 이루었고, 가끔은 흰점이 있는 말도 있었다한다. 해마다 서울로 수십 마리씩 보냈고 목장 운영을 위해 인근지역에 말을 팔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때는 거제도 전체가 거대한 목장지였음을 말해주지만, 거제민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일반 거제민의 가장 큰 고초는 3년마다 실시되는 목장의 구점(驅點, 국마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현장 감사)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정기적으로 시행해야 할 일이지만, 구점의 역(役)에는 백성들이 몇 백 몇 천의 인원이 동원되어 농번기나 흉년에는 그 고역이 상당했다. 거제도에 분산되어 있는 목장 관리와 목자들의 경비는 고스란히 거제민의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초기에는 각 목장을 7진영에다 분담하여 그 역할을 나누기도 했으며 부역(역사)하는 날수가 최소 10일 이상이나 되었다. 당시 가라산 목장의 구점 때에는 옥포, 지세포, 고현에서 각기 수백 명의 장년들이 동원되었다.

 

() 거제7목장 구점(驅點)금지 1645. <조선왕조실록>

다음은 거제 7목장은 구점(驅點)하지 말 것 등을 청하는 사복시(司僕寺)의 계(啓)이다. 구점은 목장에서 기르는 국마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현장 감사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정기적으로 시행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현장 감사를 중지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인조 23년(1645) 8월 10일. 아뢰기를, “여러 도(道)의 목장(牧場)에서 식년〔式年 : 자(子)·오(午)·묘(卯)·유(酉)년〕마다 말을 점열하는 일은 마정(馬政)에서 큰일이니 참으로 정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말을 휘몰아다 숫자를 점고 하는 것은 실로 큰일이어서 휘모는데 들어가는 군사가 백 천 명일뿐만 아니라 본관(本官)이 홀로 담당하지 못해 반드시 전결(田結)의 다소에 따라 각 고을에 나누어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내의 마장(馬場)이 한두 곳이 아니기 때문에 분정(分定)하는 일이 산골이나 바닷가 외딴 고을을 물론하고 한 도 안에 두루 미쳐, 원근에서 양식을 싸들고 왕래하는 이외에 머물러 역사하는 일수가 적어도 10일이나 보름이 되고 많으면 수십 일이 더 되며, 심지어 목장에 목책을 두르고 크고 작은 새끼줄을 치며 풀을 베어 쌓는 갖가지 일로 본관의 온 경내 백성이 밤낮으로 오래 종사하여 쉬지 못합니다. 말을 점열하면서 사복시(司僕寺)의 원역(員役)과 차원(差員)이 거느린 사람과 목장에 들인 후 감목관(監牧官) 일행의 여러 날 동안의 주전(廚傳)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목장을 설치한 곳도 아주 외딴 언덕이거나 혹은 산골짜기나 바닷가여서 모두 인가와 아주 떨어진 곳이므로 각 행차의 상하가 오래 머물 장소에는 반드시 온돌(溫堗)이 있는 임시가옥(假家)을 지어야 하는 등 온갖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 목자(牧子)들의 살과 뼈를 깎아 별도의 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다 아뢸 수 없습니다. 평소에도 이런 폐단이 있음은 알았으나 막중한 마정(馬政)의 일을 때로 점열하지 않으면 성장한 말을 헛되이 버리고 번식되어도 흩어지기 때문에 3년마다 한 번 점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제 큰 흉년을 당해서 백성들의 시체가 골짜기를 메우게 되어 비록 마음을 오로지 써도 제대로 구휼할 겨를이 없는데, 더군다나 이 말을 휘모는 일은 나뭇잎이 진 후에 포구(浦口)를 출입하기 때문에 얼어붙는 진흙에 발이 빠져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반드시 상하게 되므로 더욱 불쌍합니다. 본시(本寺 : 사복시를 말함)의 뜻 역시 이와 같으나 자신이 유사(有司)가 되어 해마다 으레 행해야 하는 일이니만큼 감히 마음대로 정지하기를 청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들이 모여 헤아려 보았는데 이와 같이 기근이 든 때에는 마땅히 「정(靜)의 길(吉)」을 준용하여 성인께서 「사람을 귀히 여기고 가축을 천히 여긴다.」는 뜻을 본받기를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금년의 점마는 임시로 정지하기를 특별히 분부하시어 굶주린 백성들의 약간의 폐해나마 없애는 것이 마땅할 듯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종2품 이상의 고위관리인 비변사(備邊司)가 왕에게 아뢴 내용으로, 큰 흉년이 들었으니 3년마다 실시되는 목장 감사를 잠시 유보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 속사정을 살펴보면 당시 목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비변사는 조정에서 목장들의 목마실태를 현장에서 감사하는 점마(點馬)가 「목자(牧子)들의 살과 뼈를 깎아 별도의 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다 아뢸 수 없을 정도」로 민폐가 심한 일이라고 왕에게 고하고 있다.
그리고 한겨울에 시행되는 이 일로 목자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고하고 있다. 「말을 휘모는 일은 나뭇잎이 진 후에 포구(浦口)를 출입하기 때문에 얼어붙는 진흙에 발이 빠져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반드시 상하게 되므로 더욱 불쌍합니다.」 점마는 목자로서 당연히 치러야 할 일이다. 그런데 감사를 받는 동안 그 목자들이 감독관들의 체재(滯在)를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다는 것이다. 방목을 하므로 무성한 풀과 나뭇잎이 모두 진 후인 한겨울에야 말들을 한 곳에 모아 점고를 할 수 있으므로, 그 일 또한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모진 일이라고 고하고 있다. 그 폐해가 얼마나 컸으면 관리인 비변사조차도 ‘목자들의 뼈와 살을 깎아’라고 표현했겠는가.

 

() 거제도 목장 역사 기록물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거제현의 목장’편에는 구천동(九千洞, 둘레 119리 250보, 말 1,115필), 산달도(山達島, 둘레 15리 7보 2척, 소 89두), 칠천도(漆川島, 둘레 51리 60보, 말 176필), 한산도(閑山島, 둘레 54리 100보, 말 173필), 용초도(龍草島, 둘레 32리, 말 58필), 영등곶(永登串, 둘레 50리 170보, 말 67필) 등이 있으며, 염분(鹽盆)에는 사목리(沙木里, 사등), 오양포(烏壤浦), 산달포(山達浦), 한다포(閑多浦: 명진), 명진포(溟珍浦), 산촌포(山村浦), 오비포(吾非浦: 연초), 가이포(加耳浦), 하청포(河淸浦), 사외포(絲外浦:하청), 황포(黃浦)가 있다고 적고 있다.

<여지도서 경상도 거제> 칠천도 가조도 목장
① 칠천도목장 : 거제읍치에서 동북 60리, 섬 둘레 45리, 바다에 있고 흑우 49척, 매년 5척식 황간현으로 보내며, 분양말 2필을 매년 7월에 받아 오고, 이듬해 3월 본사 상부로 보낸다. [漆川島牧場 在府東北六十里周四十五里海中黑牛四十九隻每年五隻式牽送黃澗縣分養馬二匹每年七月受來翌年三月上送本寺] / 칠천도 : 거제 읍치에서 동북 50리, 바다에 있고 섬 둘레가 51리, 목장이 있다. [漆川島 在府東北五十里海中周五十一里有牧場]

특히 칠천도 목장은 거제읍치에서 동북 60리, 섬 둘레 45리, 바다에 있고 흑우 49척, 매년 5척식 황간현으로 보내며, 분양말 2필을 매년 7월에 받아 오고, 이듬해 3월 본사 상부로 보낸다. 1663년 5백 20여 두(頭)였고, 1745-1765년에는 칠천도(제향흑우소방목장)와 가조도(제마소방목장)에 목장을 설치하였고 칠천도에 제형흑우 49마리, 가조도에 목마 77마리 방목했으며, 목자군이 칠천도에 111명, 가조도에 93명이 있었다.


② 거제가조도 : 암말 수말 64필내 매년 봉진말 2필, 10월6일에 흥선목장에서 말을 끌어오며 길러서 다음해 4월 일 원래 관청 상부로 보낸다. 가조도는 말을상곶(고성현) 남쪽이며 백성의 사유지가 있다. [巨濟加助島(거제가조도) 雌雄馬六十四匹內每年封進馬二匹十月初六日自興善牧牽來喂養來年四月日上送本寺 加助島(가조도) 在末乙上串南有民田]. 가조도는 말과 소 특히 흑우(黑牛)를 길렀으며 감독관이 파견 관리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주인(여객주인)은 목장을 운영하기 위해 전답에서 수세를 받았다.

() 조선전기 거제도 목장의 운영 상황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27년 1445년 “거제현(巨濟縣)의 명진포(溟珍浦)에는 목장을 쌓아 아천(鵝川) 성황당(城隍堂)을 거쳐 가라산(加羅山)에 이르면 3천 필은 놓을 수 있습니다.”하여 탑보와 가라산에 목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다음해 세종28년 1446년 경상도 거제(巨濟) 가라산(加羅山) 목장 제1소는 거제 현사(巨濟縣事)로, 제2소는 지세포만호(知細浦萬戶)로, 제3소는 옥포만호(玉浦萬戶)로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조12년 1466년 2월21일에는 병조에서 각도(各島)에 국마를 방목케 할 것을 건의하는데, "거제(巨濟)의 조음도(助音島=가조음도=가조도)는 80여 필 방목하라. 청컨대 자원에 따라 국마(國馬) 암수를 주어 방목하게 하고, 각기 수호하여 3년 뒤에 암말 10필마다 어린 숫말[雄馬] 한 필을 세공(歲貢) 으로 바쳐서 국용(國用)을 삼게 할 것이며, 이 밖의 작은 여러 섬에 스스로 점령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들어주소서.”하여 시행하였다. 일운면 구조라진은 거제도 7목장의 수세 상납을 관장(임진왜란 전까지)하였고 이후에는 진주의 창선도 목장에서 이를 관장하였다. 산달도 목장은 조선 세종 때부터 목장을 설치하여 운영 중이고, 조선후기에는 통영 둔전도 있어 한산도 통제사의 소속 수군들의 관리 유지에 이를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16년(1485년)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목장(牧場)은 많으나, 물과 풀이 모자라서 말을 기르기에 맞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신이 지나온 거제현 구천장(九千場, 구천동)·영등장(永登場, 구영등)으로 말하면 말은 많이 번식하였으나, 우장(牛場)에서 기르는 소는 들짐승과 같아서 밭을 갈 수 없고 희생(犧牲)에도 쓸 수 없으므로, 실로 쓸데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장 중에서 물과 풀이 넉넉한 곳은 말을 놓아기르고, 그렇지 않은 곳은 그 목장을 폐지하여 목자군(牧子軍)을 다른 역(役)에 차정하면, 국가에 무익하지 않겠습니다.”하였다.

 

5) 거제현과 3속현의 성씨(姓氏) 일람(一覽)

나말여초 이래 거제지역에 대를 이어 살아가면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던 유력한 씨족, 또는 거제를 본관으로 하면서, 향리들이 모여 고을의 사무를 처리하던 읍사(邑司)를 구성하였던 거제현의 토성(土姓)은 주로 고려시대 거제지역의 인근 군현의 토성에서 이속되어온 내성(來姓)과, 여말선초 이래로 거제현의 향리가 부족하여 이를 보충내지 열읍간(列邑間) 조정한 결과 옮겨와서 형성된 속성(續姓), 그리고 거제지역 촌락지배의 성단(姓團, 씨족 집단)으로서 거제현의 성립 시에 참가한 읍내(邑內)의 인리성(人吏姓, 아전)과 함께 토성이 된 백성성(百姓姓), 토성이 확정된 후에도 거제현의 관내(管內)에서 독자적인 구역을 보유한 채 임내(任內)와 병열해 있던 촌락의 성단인 촌성(村姓), 그리고 거제현의 세 속현인 아주현, 송변현, 명진현과 그 하부단위인 향(鄕)·부곡(部曲)의 토착 지배적인 성씨집단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도서명(거제현 성씨열람)주읍·임내의 읍명 또는 성격거제현 토성(土姓) 촌성(村姓)(속성(續姓)지명
경상도지리지거제현鄭, 潘, 朴, 尹, 曹, 孫(6)
村姓(朴, 白)
아주현田, 文, 葛, 曹, 촌성(曹)

송변현朴, 孫

명진현



하청부곡河, 曹

죽토부곡

말근곡

연정장曹, 申

덕해향



고정부곡



세종실록지리지거제현鄭, 潘, 朴, 尹, 촌성(朴, 白),
백성(孫, 曹)
來姓(羅), 續姓(辛,영산), 李(고성)
아주현申, 文, 葛, 曹

송변현朴, 孫

명진현任, 曹, 韓, 許, 河續姓(申, 아주)
하청부곡金, 宋

말근곡

연정장曹, 申

덕해향

고정부곡

 

위의 내용에 따르면 우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거제현의 백성성으로 분류된 손(孫)·조(曹)의 성씨집단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토성으로 분류되어 있어 거제현의 경우는 토성과 백성성이 동일한 이족(吏族) 성씨집단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 지리지의 토성에는 정(鄭)·반(潘)으로 기재된 순서가 반·정으로 바뀌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세종연간에서 성종 연간에 이르면서 거제현에 있어서 토착 성씨집단의 세력판도가 변화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종연간에 우세하였던 정씨집단이 성종 연간에는 반씨 집단으로 변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표>에 기술된 이들 성씨집단은 내성(來姓, 다른 고장에서 들어온 성씨)과 속성(續姓, 지역의 유력 성씨)을 제외하면 나말여초 이래로 조선전기까지 거제지역의 토착세력이며, 내성과 속성은 고려시대와 여말선초에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와서 향리의 역할을 한 세력집단이다. 이들 성씨집단 가운데 고려말 이래로 중앙의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경우는 반씨(潘氏)와 아주 신씨(申氏)가 있다. 반씨는 고려말 폐행(嬖幸)으로 출세한 거제사람 반복해(潘福海)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반익순(潘益淳)은 우시중(右侍中), 그의 조부인 반부(潘阜)는 고려의 사절로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일본에 갔으며, 문형(文衡)을 주관하여 좋은 인재를 등용했다. 거제반씨 가문이 대일 외교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은 거제지역이 대일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일본의 사정에 밝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반제로(潘悌老)는 조선 태종 때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은 감찰(監察)까지 되었고 이 가문은 안동지방에 이주하여 재지 사족(在地士族)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권지 호장(權知戶長) 신영미(申英美)를 시조로 하는 아주신씨(鵝洲申氏)는 거제에서 거창으로 나가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5대에 상주(尙州)로 이주하였고, 6대 때에 다시 의성지방으로 옮겨 갔으며, 이곳에서 족세(族勢)가 번성하여 조선후기에는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거제를 비롯한 연안 도서지역의 토성집단은 본관지를 떠나 다른 군현으로 전전함에 따라 본관지에서의 자기 성장의 기회를 놓쳤지만 거제 반(潘)씨와 아주 신(申)씨는 후일 영남사림파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배출하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조선초기 거제현은 최전선 변방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양반 계급보다 양인(농·어민)이 99.9%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거제현은 지주나 자작농보다 소작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받아내는 전형적인 변방 고을이었다. 또한 거제현민들은 세금 수탈, 사등성·고현성 등과 관방성곽 석축에 동원되는 부역과, 거제 7진에 부여되는 병역의 의무로써 수자리 살던 수군 군역의 의무를 짊어지고, 일본과의 외교적 부대경비까지 부담해야만 했던 양민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6) 15세기 조선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

거제도는 고대 한국∙중국∙일본의 해상교통로의 요충지(要衝地)로써 다양한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넘쳐나는 곳이었다. 특히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일본과의 무역은 기원전부터 이어온, 거제도를 경유한 해상로(海上路)를 이용했는데, 전라남도 남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경남의 마산(합포), 웅천(진해), 김해, 부산포 등에서 출발해 거제도의 다대포⋅지세포⋅아주동(옥포) 등지에서 배를 정박한 후에 해상의 일기를 살핀 후, 쓰시마 난류(쿠로시오 지류)를 타고 대마도 해안에 이르는 바닷길이었다. 여말선초 공식적으로 20여 차례나 이루어진 일본 외교사절단(外交使節團) 중에 두세 차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거제도를 경유하여 대마도로 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무역, 김해 가야국의 일본 항해길, 몽고의 일본정벌, 여말선초(麗末鮮初) 3차례 대마도 정벌 모두, 거제도 해상을 경유해서 대마도로 향하였다. 고려말기부터는 가끔씩 부산포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연중 동해로 흐르는 대한해협의 쓰시마 난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대마도 도착이 어려워, 거제도의 아주현이나 지세포까지 해상 연안을 따라와서 일기를 살핀 후에 대마도로 향했다. 그래서 조선초기 통신사(사절단)의 대마도 항해 길의 출발지(出發地)나 기착지(寄着地)로 거제도가 이용되었다. 또한 15세기 거제도는 섬을 빙 둘러 수군7진영이 구축되고 계해조약(癸亥條約)의 체결로 대마도 왜선들의 문인(文引)을 확인하고 어세(漁稅)를 받기에 이른다.

대마도(對馬島)로 가던 일본사절단이, 대마도 항해 길의 출발지(出發地)나 기착지(寄着地)로써 거제시 지세포(知世浦) 또는 구조라, 다대포 항구를 이용한 시점은 고려말기부터였으나, 조선통신사가 본격적으로 출발지나 경유지로 이용한 시기는 15세기였고 항구는 지세포였다. 당시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을 ‘(조선)통신사(通信使)’,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했다. 16세기 초 삼포왜란 이후(以後)부터 일본사절단은 동래현 부산포를 이용해 곧바로 일본으로 향했는데 이는 선박의 기능과 축척된 항해술의 발전이 한몫을 했으며 또한 육지에서 일본으로 가는 가장 빠른 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 여말선초(麗末鮮初) 조선통신사(회례사) 파견

'외교통신(外交通信)'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報聘使),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에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으나 이 사행(使行 사신행차)은 도중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고, 그 뒤 1429년(세종 11) 박서생(朴瑞生)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 일본 교토(京都) 쇼군에게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였는데 이것이 실제로 시행된 최초의 통신사(日本通信使)라고 할 수 있다. 기록上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으로 가는 일행을 ‘통신사‘라는 호칭을 처음 쓴 것은 고려시대 1375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장군에게 왜구 금지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할 때였는데 그때는 명칭만 통신사였을 뿐, 그 조건과 목적을 갖추지 못했다.

 

고려 말기의 여일(麗日) 관계는 여원연합군의 정벌과 왜구의 침구(侵寇 침략과 노략질)로 인해 지극히 위태로웠다. 당시 1292년(충렬왕18) 몽골에 의해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태복윤(太僕尹) 김유성(金有成), 원나라의 조양필(趙良弼)이 선유사(宣諭使)로, 곽린(郭麟)은 서장관(書狀官, 문서의 기록을 담당)으로 일본에 갔다. 이 때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집권하던 시기로서 동정(東征)한 데 원한을 품고 구류되어 있다가 모두 일본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김룡(金龍)과 김일(金逸)을 금적사(禁賊使)로 보냈는데, 일본 조정은 애매한 태도를 취했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일본 막부와 고려 정부의 협조는 어느 정도 접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우왕(禑王) 원년에는 나흥유(羅興儒)를 파견하였고, 1377년(우왕3)에는 안길상(安吉祥)을 보내었으며 같은 해에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길상은 병사하였고, 나흥유와 정몽주는 구금되었다가, 1378년 7월에 정몽주(鄭夢周)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던 윤명, 안우세 등 수백 인을 데리고 귀국하니 성공적인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여일관계에 있어서의 사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가 될 것이다. 이후 같은 해 10월에는 이자용(李子庸)과 한국주(韓國柱)를, 5년에는 윤사충(尹思忠)을 보내어 보빙(報聘 답례 방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의 일본통신사들은 때로 평화교린의 상황에서 사행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목숨을 담보로 하였다.

 

○ 조선전기 통신사 일행은 일본과 대마도 호위선단을 제외 한, 상사(上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수행원, 격군을 포함 100 여명에 2~4척의 선단으로 꾸렸는데 조선후기에는 400 여명에 6척의 선단이나 되었다. 실제로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는 바닷길에 난파의 전례가 자주 발생하는 대마도까지, 예상할 수 없는 바람과 파도 때문이었다. 또한 호위를 맡고 있는 대마도주 왜인들과 막부장군들의 수하들이 사신을 응접함에 있어서 언제 돌변할지 몰라 매우 염려되었으며 특히 왜국의 음식과 풍토병은 너무나 두려운 존재였다. 조선중기까지 대마도에서 출발하여 돌아오는 길에 도착한 우리나라 남해안 항구는, 당시 쓰시마 난류와 바람의 방향 등이 주(主)요인으로 작용하여, 남동해안 여러 지역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거제도, 웅천(제포), 가덕도, 다대포, 부산포, 울산 등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역사서에 자주 전한다.

 

○ 조선 건국 후에는 1394년(태조 3) 5월28일 일본회례사(日本回禮使) 김거원(金巨原)이 중(僧) 범명(梵明)과 더불어 사로잡혀 갔던 본국인(本國人) 5백 69명을 거느리고 왔고, 1394년(태조 3) 10월11일 최용소(崔龍蘇)가 일본회례사(回禮使)로 일본 구주(九州)에 파견되어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이미카와(令州了俊)에게 왜구를 토벌하여 양국의 우호를 도모하자는 국서를 전하고, 이마카와가 차견(差遣)한 승려 종구(宗俱)와 함께, 1395년(태조 4) 7월10일 피로인 570여 명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1408년(태종 8) 3월 14일 일본 통신관(日本通信官) 부사직 박화(朴和)가 본국(本國)에서 잡혀간 사람 남녀 백여 인을 추쇄(推刷)해 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1410년(태종 10) 4월 14일 사직(司直) 박화(朴和)가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지좌전(志佐殿) 원추고(源秋高)가 형부 대랑(刑部大郞)을 보내어 호송(護送)하고, 예물(禮物)을 바쳤다. 1409년(기축년) 2월에 박화를 지좌전에 사신으로 보냈으니, 붙잡혀 간 남녀(男女)를 구(求)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1413년(태종 13) 12월1일 통신관(通信官) 검교(檢校) 공조 참의 박분(朴賁)을 일본에 보내기 위해 경상도 도관찰사에게 명령하여 호피(虎皮)·표피(豹皮) 10장과 잣[松子] 10석을 주어 보내게 하였다. 다음해 1414년 2월1일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 박분(朴賁)이 경상도 지경에 이르렀으나 통신행렬을 중지 시켜 되돌아오게 했다.

 

1419년 대마도 정벌 후 일본통신사 기록을 살펴보면, 세종 2년(1420년) 윤1월 15일 일본에서 사절을 보낸데 대한 답례로 1420년(세종 2) 10월8일 일본국회례사(日本國回禮使)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를 임명, 10월25일 일본회례사(日本回禮使) 인녕부소윤(仁寧府少尹) 송희경(宋希璟)을 답례로 보내게 된다. 이때에는 부산을 출발하여 돌아올 때는 제포(웅천)에 도착하여 김해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1422년(세종 4) 12월 20일, 일본 회례사(回禮使) 박희중(朴熙中)과 부사(副使) 이예(李藝) 등이 길을 떠나니, 각각 옷 한 벌씩과 모관(毛冠)·갓[笠]·신[靴]과 약품을 내리고, 서장관(書狀官)인 봉례랑(奉禮郞) 오경지(吳敬之)와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 등에게 각각 모의관(毛衣冠)·갓·신을 내렸다. 1423년(세종 5) 10월13일 일본국회례사(日本國回禮使) 서장관(書壯官) 봉례랑 오경지(吳敬之) 등이 돌아왔다.

 

1424년(세종 6) 2월 7일 일본 회례사(回禮使)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박안신(朴安臣)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등이 배사(拜辭)하였다. 10월 7일 일본 회례사(回禮使) 박안신(朴安臣)이 거느리고 간 선군(船軍) 중 사망한 16명의 초혼제도 또한 지내게 했다. 1428년(세종 10) 11월26일에는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박서생(朴瑞生)이 임명되었고 12월7일 일본통신사 대사성(大司成) 박서생(朴瑞生),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서장관 전 부교리(副校理) 김극유(金克柔)가 일본의 대내전과 소이전에 물건을 보내게 하였는데, 1429년(세종 11) 12월 3일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서 돌아와서 일본 국왕 원의교(源義敎)의 답서(答書)를 바쳤다. 일본국(日本國) 통신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고득종(高得宗)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윤인보(尹仁甫) 등이 1439년(기미년) 8월에 선편(船便)으로 출발하여 1440년(세종 22) 경신년 5월에 돌아왔다. 특히 이예(李藝)는 사신으로 다녀온 총 40여 차례 대부분을, 거제도를 경유하여 대마도와 큐슈 등지를 다녀왔다. 1419년 이종무 대마도정벌 時 통역관 및 보좌관으로 다녀온 후부터 거제도 지세포를 출발지로 이용하니 이후부터 통신사 일행들은 자연스레 거제도를 경유하게 되었다. 1442년(세종 24)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신하를 서장관으로 삼아야 했는데, 신숙주(申叔舟)가 뽑혔다. 일본에 이르자,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써 주어 모두가 감탄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통신사 일행과 함께 쓰시마(對馬島)에 들러 무역 협정인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었다. 1443년(세종 25) 계해년에, 일본국 통신사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 부사 대호군 윤인보(尹仁甫), 종사관(從事官) 훈련원 주부(訓鍊院注簿) 신숙주(申叔舟)가 동년(同年) 2월에 선편으로 출발하여 동년 10월에 돌아왔다고 되어있다. 조위(曺偉)의 서형(庶兄) 조신(曺伸)은 역관으로 동행하였고 이 후 2차례 더 일본을 다녀왔다.

 

1459년(세조 5) 8월23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을 일본국(日本國)의 통신사(通信使)로 삼고, 행호군(行護軍) 이종실(李從實)을 부사(副使)로 삼고, 선군(船軍) 한을(韓乙), 종부시 주부(宗簿寺注簿) 이근(李覲)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예물(禮物)을 가지고 수미(秀彌)와 더불어 일본국(日本國)에 함께 가도록 하였다. 10월 8일 새벽에 1백여 인이 세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일본 국왕(日本國王) 사신(使臣)의 배 2척과 대마도(對馬島) 왜선(倭船) 2척과 함께 거제도 지세포에서 출발하였다. 그 뒤 일본에서 풍랑을 만나 폐몰하였다. 1475년(성종 6) 을미년에는 일본국 통신사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배맹후(裵孟厚)라고 되어 있고 1477년(성종 8)에는 일본국 통신사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 배맹후와 부사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 채수(蔡壽)는 차출되어 행장(行裝)을 갖추었으나 모두 보내지 말라는 전교를 받았다.

 

1476년(성종 7) 7월 26일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김자정(金自貞)이 중추(倭中樞) 평무속(平茂續)·첨지(僉知) 피고여문(皮古汝文)·호군(護軍) 원무기(源茂崎), 특송(特送) 조국차(助國次)와 지세포(知世浦)를 출발하여 대마도의 서북쪽에 있는 사수나포(沙愁那浦)에 도착했다. 돌아올 때는 부산포를 거쳐 왔다. 1479년(성종 10) 기해년에는 일본국 통신사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형원(李亨元), 부사 대호군 이계동(李季仝), 종사관 김흔(金訢), 조신(曺伸) 등이 차출되어 길을 떠났으나 정사(正使) 이형원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병에 걸려 돌아오다가 지세포(知世浦)에서 죽자 일행을 모두 되돌아오게 하였다. 1487년(성종 18) 3월 26일 대마도(對馬島) 선위사(宣慰使) 정성근(鄭誠謹)이 사조(辭朝)하니, 명하여 대접하게 하였다. 6월 10일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정성근(鄭誠謹)이 와서 복명(復命)하자,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정성근이 아뢰기를, “신(臣)이 5월 초2일 진시(辰時 오전7~9시)에 배를 출발하였는데, 그날 바람이 순조롭기 때문에 포시(晡時 오후 4시경)에 대마도(對馬島) 땅에 이르렀습니다.”했다.

 

◯ 조선초기 일본으로 가는 사절단은 서울(한양)에서 출발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약 7개월~11개월가량 걸렸다. 사신의 행차 길에는 많은 수의 수행원과 수많은 화물이 동반되었고 바다의 뱃길도 순탄치 않아 항구에서 대기하는 날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전기의 경우 한일관계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왜구의 노략질 문제였고, 조선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마도주나 막부장군에게 통신사를 파견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의 표면적 이유는 왜구 금압의 요청과 우호관계 유지를 위한 장군습직 축하 등 주로 정치·외교적인 목적에서였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파견되는 일본국왕사의 주(主)임무는 동(銅)을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쌀·콩·목면을 구해가는 경제적인 목적이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을 가져가는 문화적 목적이기도 했다.

 

() 일 무역에 대한 계해조약(癸亥條約) 체결

고려 말부터 왜구가 우리나라 연안을 약탈하는 등 침입을 일삼자 1419년 그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한 뒤 조선은 통교를 중단하였다. 이에 왜구들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고, 대마도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의 금압을 서약하면서 통교를 간청하였다. 1426년 조선은 그들의 간청도 있고, 또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무역을 허락하는 한편, 삼포와 서울에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그곳에 한해서만 왜인들의 숙박과 무역을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마도주에게 입국증명서(圖書•書契•行狀•文引)를 만들어주어 입국하는 왜인은 이를 소지하도록 하였으며, 사송선(使送船)과 무역선(세견선)도 그 수를 제한하였다. 또한 1438년 대마도주의 세견선(歲遣船)에 대하여 25척씩 나누어 삼포에 도착하게 하는 균박법(均泊法)과 윤차적으로 머무르게 하는 삼포윤박법(三浦輪泊法)을 실시하였다. 입국 왜인의 수는 제한하여 그 크기에 따라 대선 40인, 중선 30인, 소선은 20인으로 규정하였으며, 증명서 없이 왕래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이렇게 조금씩 교류를 완화하는 정책을 펴 나갔는데, 1443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과 이예(李藝) 신숙주(申叔舟) 등의 사절단이 귀환 길에 대마도주 소사다모리(종정성宗貞盛)와 세견선(歲遣船) 등 무역에 대한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였다. 내용은 세견선은 50척으로 할 것, 삼포에 머무르는 사람의 체류기간은 20일로 하며 상경자(上京者)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은 50일로 한해 이들에게 식량을 지급할 것, 좌선인(坐船人)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한할 것, 고초도(孤草島)에서 어획하는 자는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의 문인(文引)을 받아 어세(漁稅)를 낼 것 등이었다. 왜인이 개항장에 도착한 후부터 본국으로 귀환시까지 비용은 조선측이 부담했는데, 그 접대비용과 세역미두가 너무 많아 재정긴축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긴축정책은 앞서 마련된 법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예외취급이 너무 빈발해서, 왜인들은 이를 위반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등 모순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이후 삼포왜란(三浦倭亂)의 원인이 되었다.

 

신숙주(申叔舟)의 조어금약(釣魚禁約) <해동제국기종(海東諸國記終)>에 의하면, ‘대마도 사람으로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도주(島主)의 도서(圖書)와 문인(文引) 3통을 받아서 지세포(知世浦 거제도)에 도착하여 문인을 바치면, 만호(萬戶)가 문인을 다시 만들어 준다. 고초도(孤草島)의 정해진 곳 외에는 아무데나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하며, 고기잡이를 마치면 지세포(知世浦)에 돌아와서, 만호에게 문인을 돌리고 세어(稅魚)를 바친다. 만호는 도주의 문인에 회비(回批)하여 인(印)을 찍어 돌려줌으로써 서로 증거로 삼는다. 만약 문인이 없는 자이거나, 풍랑을 감내하지 못한다 핑계하고 몰래 무기(武器)를 가지고 변방 섬에 횡행하는 자는 적(賊)으로서 논죄(論罪)한다’하였다.

 

계해약조로 인하여 대마도인들이 거제시 지세포에 어세를 납부하고 남해안의 평화로운 조업은 실제로 약50년 간 정도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1467년 이후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각 지역 군웅들의 할거와 쟁투가 뚜렷해지는 격동의 시대가 되었다. 이후 100년 가까이 지속되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막이 열리면서 변방의 주민을 통제할 힘을 잃게 되었다. 1493년 경상감사 이극돈(李克墩)의 장계에 따르면, “1485년 을사년에 왜의 소선 11수(艘)가 마지막으로 세를 바쳤을 뿐이고, 그 뒤 각 년(各年)에는 한 사람도 문인을 받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계해약조는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 조약을 개정할 때까지 대마도주와 형식적이고 유명무실하지만 실효적 조약으로써 남아 있었다.

 

당시 거제시 지세포에는 전사(傳舍) 즉, 관원(官員)을 대접(待接)하여 묵게 하는 객사와 관청, 세관(稅關), 객주(客主), 그리고 여행객(旅行客)의 여독(旅毒)을 풀고 향락을 맡아하던 기방(妓房)과 의원(醫院) 등을 모두 갖추게 된다. 지세포(知世浦)에 거류(居留)하는 왜인들도 생겨났고, 선박을 수리 건조하는 조선소는 물론, 전선(戰船)이나 어선, 선박의 정박지(碇泊地)에 시설물이 들어섰으며, 더불어 수군(水軍)들이 수자리 살던 마을이 곳곳에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조선정부의 사신이 파견될 때마다 통신사(通信使) 영빙선(迎聘船)인, 일본막부 신사(信使)의 배들과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왜선(倭船)들이 드나들곤 했다. 그리고 일본을 향해 떠나기 전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바닷가에서 반드시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조선전기 세조에서 성종 시기에 그 항구의 성대함이 마침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후 왜인들의 계해조약의 위반사례가 많아져 조금씩 쇠퇴의 길을 걷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삼포왜란이 일어나고 일본통신사가 부산포를 이용함에 따라 자연스레 쇠퇴⋅소멸하였다.

 

7) 거제도의 항거왜인(恒居倭人)과 삼포왜란

조선시대 거제지역민의 사회·경제적 생활모습과 함께 또 하나의 요소를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조선시대 거제지역에 살았던 왜인문제와 그들의 생활모습이다. 건국 초기부터 조선의 대왜구(對倭寇)·대일(對日)정책은 교린의 원칙에 따라 사신을 파견하거나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왜구의 금지를 꾀하는 한편, 출몰하는 왜구를 직접 회유하기도 하였다. 투항 왜구에게 벼슬, 토지, 가옥 등을 제공하여 향화(向化)시키게 되자 조선 태조 말년에는 투항 귀순한 왜구가 많았다. 이들 투항 귀순왜구를 항왜(降倭), 투화왜(投化倭), 향화왜(向化倭)라고 지칭하였으며, 거주를 희망하는 왜인을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과 교역을 원하는 흥리왜인(興利倭人), 또는 상왜(商倭)에게 무역을 허락하였다. 또한 표류민 송환이나 진화를 바친 왜인, 양국의 외교교섭에 있어서 특별한 공적이 있는 왜인, 특수한 기능이나 예능을 보유한 왜인은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 하여 벼슬을 주어 회유하였으며, 성(姓)을 주고 이름을 바꾸는 것을 허락하여 내국인과 구분하지 않고 거주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일본의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던 정치세력의 사신이라는 명의로서 내조하는 것을 허락한 왜인을 사송왜인(使送倭人)이라 하였다.

그런데 투항 왜인의 수적 규모가 확대되면서 그에 비례하여 폐단도 발생하였다. 왜인들의 경제적 점유비중이 증가하였고, 조선인과의 교환(交歡)하는 자도 발생하였으며, 군사기밀을 일본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에 태종대에는 왜인들을 통제하여 흥리왜인(興利倭人, 두 나라를 왕래하는 왜인)에게 일정한 포소(浦所)에서 무역하도록 제한하였다. 조선 태종은 만호(萬戶)가 주둔하는 부산포와 내이포(제포)를 개항하여 입항을 한정시켰다. 그러나 왜인들의 불만과 요구가 확대되고 그 폐단이 계속 일어나므로 부득이 태종 18년(1418)에는 염포와 거제도의 가배량에도 항거왜인을 제한적으로 거주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종 18년(1418년) 이후 거제도 동부면의 가배량 등지에도 일정한 거주지를 설정하고 제한된 범위내에서 왜인들이 생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태종 18년 3월에는 병조가 경상도 수군도절제사에 의하여 계장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는 좌도(左道) 염포 이외 우도(右道) 가배량에 각각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항거왜인을 모조리 찾아내어 안치·거주하여 살도록 하자는 건의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윤영세(尹永世)씨가 소장하였던 매기록(梅記錄)에는 조선 태종 18년 4월에 가배량에 왜상인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포(浦)의 민(民)들이 놀랐다는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이로써 태종 18년에는 거제 가배량 지역에 항거왜인이 존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사(高麗史) 권41, 공민왕(恭愍王) 18년 가을 7월 신축에 거제(巨濟)·남해현(南海縣)에 귀화한 왜인(倭人)들이 거주하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거제섬에는 이미 고려말부터 귀화 왜인들이 거주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도 이들이 거주하면서 생산활동에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世宗) 초기 상왕(上王)인 태종(太宗)의 주도로 대마도(對馬島) 정벌이 단행됨으로써 거제도의 항거왜인도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 5년(1423년) 10월부터는 이미 개항된 부산포와 내이포 두 곳의 내왕을 허용하였고, 세종 8년 1월에는 대마도주의 간청에 따라 염포까지 개항하여 3포(三浦)가 개항되었다. 이 시기 이후 항거왜인이 거제현에 다시 돌아 와서 거주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세종 8년 1월 계축에는 대마도의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거제도에 있는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짓고 생활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으며, 내이포, 부산포 이외 좌우도의 각지 항구에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건의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좌랑(佐郞) 신기(愼幾)가 답서를 보내어 거제도의 농토 요청건을 거부하고, 부산포와 내이포 및 염포의 3포에서만 무역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또한 세종 10년 5월 기사에는 대마도의 좌이문대랑(左衛門大郞)이 조선의 예조에 글을 보내어 거제도 밖의 작은 섬에 사람을 보내어 보리를 심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우리 측은 거제도의 밖에 경작할 땅이 없다 하고 계달(啓達)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세종연간에는 대마도 왜인이 농업과 교역을 명분으로 거제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수차례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거절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대마도(對馬島) 정벌이후 세종연간에는 거제도에 항거왜인이 존재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다. 대마도 왜인이 거제지역에서 항거하기를 원했던 연유는 거제지역이 대마도와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으며, 해상교통의 거점이라는 점과 함께 농업 및 해양 수산물의 생산기반이 유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세종대의 3포 개항이후 성종(成宗)을 거쳐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 왜인들의 왕래가 빈번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였다. 아울러 항거 왜인(恒居倭人)들도 규정을 위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조선에서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세종 20년에는 왜인의 불법 행위를 막기 위하여 왜관과 왜막(왜인의 집)의 주위에 이중으로 장벽을 두르고 서쪽과 북쪽 두 곳에 문을 만들어, 상주하는 문지기에게 왜인의 출납을 감시케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세종 25년에는 세견선(歲遣船)을 1년 50척, 세사미(歲賜米) 200석으로 제한하였으며, 조선에서 발급한 도서(圖書)나 대마도주가 발행한 도항증명서인 문인(文引)이 없는 경우는 입국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의 폐단은 제거되지 못하고 있었다. 왜인들은 거래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나 항해에 필요한 순풍을 기다릴 때 또는 선박 수리 등의 여러 이유를 들어 체제기간을 연장하다가 마침내 3포에 집을 지어 정착하는 왜인도 많았다. 1497년(연산군 3년)에는 부산포 왜인들이 해구 내면(海口內面)의 공·사유(公私有) 어장(漁場)과 채취한 해산물을 멋대로 점거·탈취하였으며, 제포 왜인은 금산(禁山)의 소나무 목재를 마음대로 벌목하고 녹도 만호(鹿島萬戶)를 살해하였으며 돌산(突山) 목마군(牧馬軍)의 의복, 식량과 함께 진주(晋州)에서 조운해 오는 왜료(倭料)를 탈취하는 등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아가 감찰(監察) 박전(朴詮)의 상소에는 「근년 이래로부터는 쇄환하는 법이 폐지되고 호수(戶數)의 약속이 해이해져 알이 자라남이 점차 번성하여 호수의 많기가 그 얼마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강한 것을 믿고 악한 버릇이 생겨 날로 방사(放肆)하게 커져서 항상 우리 백성과 더불어 스스로 그 강용(强勇)함을 자랑하여 언어가 불공하고 서신의 사연도 패만(悖慢)합니다. 변장(邊將) 보기를 노예와 같이 할 뿐만 아니라, 자주 변방의 백성을 해치며, 민가를 불살라 없애고 민재(民財)를 위협하여 노략질하여 마을에서 자행하니 그 형세가 장차 막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 조정에서 복육(覆育)하는 은혜가 이미 두터워도 시랑(豺狼)과 같은 한없는 욕심은 날로 부족하여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음이 있으면 표독하고 사납게 치장하여 기탄하는 바가 없으니 신은 등창 때문에 배가 터지는 걱정이나 꼬리가 커져서 제어하기 어려운 근심이 먼 날에 있지 않고 가까운 날에 있을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여 3포에 있어서 항거왜인과 흥리왜인 등의 피해가 극에 달하고 있으며, 장차 제어하기 곤란한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그럼에도 조정은 적극적인 대비책을 마련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종 5년(1510)에는 소위 삼포왜란이 발생하였으며, 거제지역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지에 위치하게 된다.

 

1510년(중종 5년) 4월 초4일에 대마도의 대관종병부소보성친(代官宗兵部小輔盛親)이 왜선(倭船) 1,000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의 북단인 영등포(永登浦)로 침입을 기도하였다. 영등포는 부산포에서 웅천을 연결하는 해상항로의 중간 기착지로서 진이 설치되어 있던 해안의 군사 요충지였다. 영등포 군민(軍民)이 단결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래서 같은 달 병신일에 왜구는 병력의 반을 주물도(主勿島, 이물도,이수도)에 주둔시켜 거제현을 계속 공격하고, 나머지는 웅천·부산포 등지로 이동시켰다. 주물도의 왜구는 4월 초5일 왜선 5척과 왜적 100여 명이 영등포의 남쪽에 위치한 하청리(河淸里)에 상륙하였으나, 거제현령 오세한(吳世翰)이 매복 병력으로 적을 살상하고 노략질 당한 현민들의 기물을 되찾았다. 또한 4월 13일 왜적 20여 명이 조라포 등지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이내 거제도 해안은 왜구의 거점지가 되었다. 결국 조선군의 승리로 삼포왜란이 진압되면서 거제지역도 회복되었으나 그 인적·물적 피해는 상당하였다. 그런데 삼포왜란에서 거제지역민이 관군과 연합하여 전선에 참여하고 있었고, 이는 거제지역민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지역적 수호의식의 실천이었다. 삼포왜란 이후 조선과 대마도(對馬島)의 관계는 단절되었으나 왜인의 요구를 수용하여 다시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하고 교류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조약의 기본내용은 삼포거주의 금지, 세견선과 세견미의 축소 등을 규정하여 삼포왜란 이전보다 왜인에게 불리하였다. 이에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고 있었으며, 1523년(중종 18년) 4월에는 왜적이 거제를 비롯하여 남해·욕지도까지 남해연안 섬지역을 대규모로 침입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종 39년(1544) 9월에는 왜선이 고성 앞바다 사량(蛇梁)을 침략하는 사량왜변(蛇梁倭變)이 있었고, 명종 10년(1555) 5월에는 전라도 영암을 침략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발발하였다. 또한 16세기 후반에는 조선과 일본의 국내사정이 크게 변화함으로써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전면적인 일본의 침략이 예고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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