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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역사 문화

거제도에 표류한 일본 공무 수행선의 조사 결과를 보고한 장계(狀啓)

작성자고영화|작성시간26.06.06|조회수28 목록 댓글 0

<거제도에 표류한 일본 공무 수행선의 조사 결과를 보고한 장계(狀啓)>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조선후기 대마도에서 부산 초량왜관으로 정기적으로 왕래하던 일본의 공무 수행선이 풍랑을 만나 거제도에 표류하여, 이를 구호하고 조사조치한 내용을 기록한 문건 2건을 이번 지면에 소개하겠다. 일본 선박이 표류해 조선 연안에 도착했을 때, 조선 정부는 인도주의적 원칙과 교린(交隣) 정책에 기반하여 체계적인 구호 및 송환 절차를 진행했다. 물론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의 구호와 송환도 상호 교린의 원칙에 따라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16711114일과 176721일에, 거제도에서 표류한 일본 공무 수행선의 조사 결과를 보고한 장계(狀啓) 2건은 모두다, 신속한 초동 조치와 구호, 이어 문정(조사)에 이어 초량 왜관으로 호송한 후, 최종 일본으로 송환하는 외교적 관례를 따랐다.

발견 즉시 초동 조치 및 구호 : 해당 지역의 수군(만호)이나 고을 수령이 발견 즉시 선박을 항구로 예인하고 생존자를 구조한다. 이어 표류민에게 의복, 식량, 식수 등 필요한 생필품을 넉넉히 제공하여 기력을 회복하도록 도운다. 그리고 문정(問情, 조사)을 실시해 문서로 남겨 상부에 보고한다. 통역관(왜학)과 관리들이 표류 경위, 인적 사항, 소지품(통행증, 서신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이를 통해 불법 침입 여부를 확인하고, 조사 결과를 중앙 정부에 보고하는 장계(狀啓)를 올렸다.

왜관으로 호송하여 인계 : 조사를 마친 표류민은 거제, 가덕도 등을 거쳐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호송된다. 왜관에 머물던 표류민은 대마도에서 오는 일본 측 선박에 태워 보내거나, 정기적인 사절단 편에 동행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낸다. 이를 표민순부(漂民順付)라고 한다.

사후 소홀한 점에 대해 행정적 책임을 물었다 : 표류민 보호를 소홀히 하거나 보고가 늦어진 관리(수령 등)는 곤장을 맞거나 파직되는 등 엄격한 책임을 물었다. 일본 측에서도 조선 표류민을 극진히 대접해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였으며, 양국은 이러한 협력을 통해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앞서 소개한 바가 있지만, 이러한 사건의 주요 사례를 보면, 1782년 거제 지세포 근처에서 대마도주의 사절을 태운 일특송사선(一特送使船)이 침몰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수군과 잠수군을 동원해 실종자 수색 및 화물 인양 작업을 도왔으며, 생존자에게는 식량과 의복을 제공하는 등 외교적 관례에 따라 사고를 수습했다.

 

이 문건이 수록되어 있는 사변일기(事變日記) 조선 시대 승정원의 임시 관직이었던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1723(경종 3)부터 1848(헌종 14)까지 약 125년간 기록한 공무 일기. 주로 국가의 중대한 사건인 '사변(事變)'이나 중죄인을 신문하는 '국옥(國獄)' 등을 날짜순으로 기록하였다.  일기는 남해안 지방의 왜선왜관조왜미변선(朝倭未辨船, 조선 배인지 왜선인지 판별할 수 없는 배) 등 일본에 대한 내용, 북방 변경에서의 청나라 관련 내용, 황당선 출몰  당대 ‘조선의 국경 관리 실태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차왜(差倭)의 외교 활동] 이러한 표왜선이 발생하면 일본 외교사절 차왜(差倭)가 대마도에서 건너와 이들을 자국으로 송환해 갔다. 차왜들은 대부분 태풍으로 동해에서 난파된 왜선(倭船)과 표류(漂流)하는 왜인(倭人)들을 조선에서 구조하고 송환해 준 일에 사례하고자 왔지만, 효종의 즉위 축하와 왜관 이건(移建)을 허락한 일에도 사례하고자 왔다. 조선에서는 역관이 그들을 문정(問情)한 후에, 접위관이 접대하였고, 그들이 귀국할 때 회례물목(回禮物目)을 주어 전송하였다. 또한 때론 통신사 사절단 방문을 미리 알려주기도 했으며, 조선통신사 일본 사행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번 장계(狀啓)의 출처는 승정원(承政院)에서 편찬한 사변일기(事變日記)인데 본래 창경궁 소재 구() 장서각에 소장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던 것을 1981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으로 이관되어 보존되고 있는 조선왕실 자료이다. 71() 필사본(筆寫本)이다.

 

1) 16711114거제도에 표류한 일본 배의 조사 결과를 보고한 장계(狀啓)

이 문서는 1671(현종 12) 1114, 삼도수군통제사 김집(金潗)이 조정에 올린 장계로, 경상도 거제도 옥포(玉浦앞바다에 표류해 온 왜선(일본 배)을 발견하고 조사한 내용과 조치한 상황 보고이다. 이 기록은 당시 조선 수군이 영해 감시망을 통해 표류하는 외국 선박을 신속히 포착하고, 규정에 따라 조사와 구호 조치를 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다.

최초 이 사건은 1671112일 오후 4시경(申時), 옥포진 망군이 호운도(呼雲島) 앞바다에서 정체불명의 큰 배 한 척이 양주암(楊洲巖, 거제도 옥포만의 곶) 쪽으로 표류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옥포만호 안준경(安駿慶)이 배를 타고 나가 확인한 결과, 능포(凌浦) 앞바다에서 일본 대선(倭大船)임을 확인하고 옥포항으로 예인하여 정박시켰다.

 

*표류 왜선박을 조사한 결과, 대마도(馬島)에서 부산 왜관으로 향하던 선박인데 공작미(公作米, 공무 수행에 필요한 쌀)를 싣고 오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탑승 인원은 총 58명으로, 교대 예정인 관리(별대관) 2, 종 왜인 2명이고 교대 예정인 서기 1, 하급 관리(하대) 9, 그리고 역부(일꾼) 4, 격군(노 젓는 사람) 40명이었다.

*표왜선(漂倭船) 구호 및 문정(問情)을 실시했다. 왜학(통역관정동기(鄭東起)가 배에 올라가 사정을 조사했다. 대마도 내에 별다른 이상은 없으며, 단순히 풍세가 좋지 않아 표류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거제부사 변성우(邊聖佑)에게 지시하여 관례에 따라 이들에게 땔나무, , 식량(柴水糧饌)을 지급하도록 했다. 이어 이 배를 초량왜관으로 인계하기 위해 다대포(多大浦)로 안전하게 호송한 뒤, 다시 상세히 보고하겠다는 내용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대마도에서 부산 왜관으로 가던 일본 공무 수행선이 풍랑으로 거제도 옥포에 표류했다. 탑승 인원은 관리와 사공 등 총 58명이다. 조선 수군이 발견해 안전하게 예인한 후, 굶지 않도록 식량과 식수를 제공하고 부산(다대포)으로 이송할 준비를 마쳤다.

 

**16711114거제도에 표류한 일본 배의 조사 결과를 보고한 장계(狀啓)**

1114, 통제사(統制使) 김집(金潗)이 이번 달 초3일에 작성된 장계(보고서)로 아룁니다. 당일 진시(오전 7~9)에 도착한 이번 달 초2일 신시(오후 3~5) 자 옥포만호(玉浦萬戶) 안준경(安駿慶)의 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달 초2일 신시쯤 본진(옥포) 옥산의 망군(초소병) 수군 김명필이 보고하기를, '조선 배인지 일본 배인지 알 수 없는 큰 배 한 척이 호운도(呼雲島) 앞바다로부터 나와 본진 경계인 양주암(楊洲巖)으로 표류해 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만호(안준경) 본인이 배의 정체를 탐색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이어 초2일 유시(오후 5~7)에 도착한 같은 만호의 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배의 정체를 탐색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간 경위는 이미 보고드린 바와 같습니다. 노를 재촉하여 본진 경계인 능포(凌浦) 앞바다로 전진해보니 일본 대선(倭大船) 한 척이 과연 표류해 오고 있었습니다. 당일 신시 말(오후 5시쯤)에 만나서 끌고 와 같은 날 유시에 본진 강구(항구 입구)에 정박시키고 수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함께 도착한 옥포 왜학(통역관) 정동기(鄭東起)의 수본(보고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달 초2일 유시에 일본 대선 한 척이 본진 강구에 정박하였기에, 즉시 가서 사정을 물었습니다. 이들은 신해년(1671)의 조항에 따라 이정암(以酊菴)에서 보내는 사신 선박이 다시 건너올 때 교대하기 위해 온 자들이었습니다. 교대할 별대관(관원) 2명과 종 왜인 2, 서기 왜인 1, 하대(하급 관리) 왜인 9, 역부(일꾼) 4, 격군(사공) 40명 등이 길잡이를 데리고 함께 타고 왔습니다.

사정과 표류 경위를 물으니, 왜인들이 말하기를 '섬 안(대마도)에는 별다른 일이 없으며, 공작미(公作米)를 싣고 가기 위해 우리 대선 한 척이 오늘 새벽 대마도를 출발해 곧장 왜관(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수지(水旨) 지역에 이르러 바람이 순조롭지 않아 이곳까지 표류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보고 내용에 따라, 해당 일본 대선 한 척에 땔나무, , 식량을 관례대로 찾아서 지급하라고 지방관인 거제부사 변성우(邊聖佑)에게 공문을 보내 지시하였습니다. 또한 이 일본 배를 다대포(多大浦)로 넘겨보낸 경위는 추후에 상세히 보고할 계획임을 우선 보고드립니다.(이상 내용을 예조에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雍正十二年甲寅五月十四日 / 사변일기(事變日記). 十四日 統制使 金潗 本月初三日成牒狀   啓當日. 辰時到付本月初二日申時成貼 玉浦萬戶 安駿慶馳報內今月初二日申時量本鎭 玉山 望軍水軍 金明必 進告內   倭未辨大船一隻自 呼雲島 前洋出來漂向于本鎭境 楊洲巖 了是如進告據同船   知次 萬戶 乘船下海是如馳報是白齊   于到付初二日酉時成貼同 萬戶 馳報內未辨船   知次乘船下海緣由已爲馳報爲有在果促櫓前進于本鎭境 凌浦 前洋則倭大船一隻果爲漂來是去乙當日申時末相逢領曳同日酉  本鎭江口止泊守護是如馳報是白齊一時到付 玉浦倭學 鄭東起 手本內今月初二日酉時倭大   一隻本鎭江口止泊是去乙就往問情則辛亥條以酊菴送使船再渡吹噓良中交代次別代官倭二人從倭二名交代次書記倭一人交代次下代倭九人交代役夫倭四名格倭四十名等指路引同騎出來爲有去乙探問事情及漂來緣由則同倭等言內島中別無他事而公作米載去次吾大船一隻今日晨朝自 馬島 發船直向館所爲如可到于 水旨 風勢不順漂到此處是如爲乎等以緣由手本爲臥乎味手本及馳報是白乎等用良同  大船一隻亦中柴水糧饌依例覓給之意地方官 巨濟府使 邊聖佑 處發關分付爲白乎旀同倭船越送 多大浦 緣由追于馳   啓計料緣由爲先馳      啓下禮曹]

 

 

2) 176721거제도에 표류한 일본 배의 조사 결과를 보고한 장계(狀啓)

이 문건은 사변일기(事變日記)에 수록된 수군통제사 이주국이 올린 장계로, 건륭 32(1767, 영조 43) 21 자 기록이다. 이 기록은 당시 조선 수군이 표류한 일본 선박을 구조하고 절차에 따라 조사 및 보급을 했던 실무 과정을 잘 보여준다

*내용인즉, 1767217일 오후 5~7시경(유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왜선 한 척이 거제도 호운도 앞바다에서 나타나 옥포(玉浦) 양주암 근처로 표류해 들어왔다. 옥포·조라포·지세포의 만호(지역 사령관)들이 군사를 보내 배를 확인하고, 10시경(해시)에 배를 옥포 강구로 안전하게 끌어다 정박시켰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옥포 왜학(통역관) 한윤희가 직접 가서 조사(問情)한 결과, 이 배는 왜관(부산 초량)의 관리들을 교대해주기 위해 오던 배였다. 요 인물로는 신임 관수왜(책임자), 서기왜, 의원왜, 통사(통역) 등 관리들과 격군(노 젓는 사람) 40명을 포함해 61명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예조에 올리는 서계(외교 문서)와 별폭(선물 목록), 동래 부산에 전할 문서, 그리고 진상품을 싣고 있었다.

*표류 원인과 대마도 상황을 살펴보면, 1767217일 새벽 대마도를 출발해 부산 왜관으로 향하던 중수지(水旨근처에서 바람이 맞지 않아 옥포까지 떠내려오게 된 것이다. 출발 당시 대마도에는 이 배 외에도 대선 3척이 더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조치하길, 통제사 이주국은 거제부사 이윤국에게 명하여 이들에게 관례대로 땔감과 물, 식량을 나누어 주도록 했고 또한 이 상황을 다대포 등 인근 부대에 알리고, 조정(예조)에 공식적으로 장계를 올려 보고했다.

결국 부산 초량왜관으로 가던 일본 교대 관리들이 탄 배가 풍랑으로 거제도 옥포에 표류한 것이며, 조선 측은 법에 따라 이들에게 식량을 주고 상황을 보고한 기록이다.

 

**176721거제도에 표류한 일본 배의 조사 결과를 보고한 장계(狀啓)**

건륭 32(1767) 정해 21사변일기(事變日記).

176721, 통제사 이주국이 이번 달 18일에 작성하여 올린 장계입니다. 당일 사시(오전 9~11)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이번 달 17일 술시(오후 7~9)에 옥포 만호 김정하, 조라포 만호 한상범, 지세포 만호 김귀한 등이 급히 보고하기를, "오늘(217) 유시(오후 5~7)에 옥포 옥산의 망군(초소병) 정병 김용업, 조라포 토병 성국명, 지세포 눌일곶 망군 정병 주원발 등이 보고하기를, '오늘 유시경에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는 배 한 척이 호운도 앞바다에서 나와 옥포 경계인 양주암 쪽으로 표류해 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해당 선박을 탐색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추가로 도착한 같은 날 해시(오후 9~11) 보고에서 해당 만호 등이 다시 보고하기를, "왜 대선(큰 배) 한 척을 당일 술시 말(오후 9시경)에 만나 끌고 와서, 해시(오후 10시경)에 옥포 강구 앞바다에 정박시켰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날 해시에 도착한 옥포 왜학(일본어 통역관) 한윤희의 수본(보고서)에 따르면, "당일 해시에 왜 대선 한 척이 정박했기에 직접 가서 사정을 물으니, 왜관을 지키는 왜인을 교대하러 오는 배였습니다. 배에는 신임 관수왜 1, 서기왜 1, 의사왜 1, 통사왜 1, 수행원 3, 하인 8, 격군(노꾼) 40명 및 교대할 별금도왜 1, 중금도왜 2, 소금도왜 2명 등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조에 보내는 서계와 별폭 각 1, 동래 부산에 보내는 서계 1건과 별폭 2건 및 진상품을 싣고 왔습니다. (대마도) 안의 사정과 표류하게 된 이유를 물으니, 그들이 말하기를 '섬 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으며, 우리가 탄 대선 한 척이 이달 17일 새벽에 대마도를 출발해 곧장 왜관으로 향했는데, 수지에 이르러 바람이 순조롭지 않아 당일 해시에 이곳까지 표류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출발할 때 대선 3척이 더 나오려고 바람을 기다리며 배를 정비하고 있었으나, 출발했는지 여부는 확실히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유로 보고서와 급보가 올라왔기에, 해당 왜선에 땔감과 물, 식량을 관례에 따라 나누어 주라고 거제 부사 이윤국에게 관문(명령서)을 보내 지시하였습니다. 또한 다대포에 이 상황을 전달하고, 장계를 정리하여 우선 급히 보고합니다. (이후 예조에서 국왕에게 보고하였으나 아직 회신은 없음)

[乾隆三十二年丁亥二月初一日 / 사변일기(事變日記). 初一日 統制使 李柱國 本月十八日成貼狀啓也 當日巳時到付本月十七日戌時成貼 玉浦萬戶 金鼎夏 助羅浦万戶 韓相範 知世浦万戶 金龜漢 等馳報內 玉浦玉山 望軍正兵 金龍業 助羅浦 土兵 成國命 知世浦訥逸串 望軍正兵 朱元發 等進告內今日酉時朝倭未辨船一隻自 呼雲島 前洋出來漂向于玉浦  楊洲巖 了是如爲乎等以同船探知次乘船下海是如馳報是白齊追于到付同日亥時成貼同万戶 等更報內倭大船一隻當日戌時末相逢領曳 亥時 玉浦 江口前洋止泊是如馳報是白齊追于到付同日亥時成貼 玉浦倭學 韓潤禧 手本內當日亥時倭大船一隻止泊故就往問情則館守倭交代船良中新館守倭一人書記倭一人醫倭一人 通事 倭一人伴從倭三名從倭八名格倭四十名及交代次別禁徒倭一人中禁徒倭二人小禁徒倭二名等禮曹了書契別幅各一度 東萊 釜山 了書契一度別幅二度及   進上物件載持同騎出來爲有去乙探問島中事情及漂風緣由則同倭等言內島中別無他事而俺等所乘大船一隻同月十七日晨朝自 馬島發船直向館所爲如可纔到 水旨 風勢不順當日亥時漂到此處是如爲乎旀同倭等又言內俺等發船時大船三隻出來次在於待風所治其舟楫矣發船與否未能的知是如爲乎等以緣由手本爲臥乎味爲等如馳報及手本是白置有亦同倭船亦中柴水粮饌依例覓給之意地方官 巨濟府使 李潤國 處發關分付爲白乎旀越送 多大浦 形止段追于馳   啓計料緣由幷以爲先馳   啓爲白臥乎事是白良厼 詮次   善啓向敎是事   啓下禮曹無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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