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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역사 문화

거제도 인구변화

작성자고영화|작성시간25.04.10|조회수501 목록 댓글 0

<거제도 인구변화>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거제인구통계는 1913년까지는 한산도 용호도 등 부속도서를 포함한 것이고, 1953년 거제군 복군부터 현재까지는 現 거제시 관할지역 인구통계이다. 조선시대 거제도인구는 옛 문헌 자료마다 그 차이가 크나, 전체적인 인구 변화추이는 대체로 잘 파악할 수 있다.

거제도는 조선시대까지 군역의 기피, 사노비 누락, 육지에서 도망 와 숨어 살던 사람, 해상유민 등, 정확한 인구집계가 사실상 불가능 했으며, 일부 수군진영의 수군과 유민은 제외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 청동기시대는 약 1500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거제도 內, 패총과 고인돌의 분포, 그 크기로 추정할 수 있다. 연초 하청지역과 둔덕 사등지역이 인구밀집 지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5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거제도 內, 둔덕사등의 거제현, 아주옥포지세포의 아주현, 거제면 명진현, 남부동부면 송변현 지역이 각 지역 중심지로써 그 역할을 했다.

 

2) 983년 고려성종 기성현(岐城縣) 사등 거제치소 이후로 해상교역의 부흥 속에 1018년 거제현(巨濟縣) 인구가 약10000명이 되었다. 이 당시 고려개경 정부에서 고을 현縣의 승격 근거로써 인구 10000 명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후 1272년 거창군 진주 등, 육지로 옮겨가면서 인구감소가 크게 일어났다. 이 후에 몽고의 일본 침략과 맞물러 고려말기 송변현에 수군진영 '가라산방어소'가 설치되면서, 거제도에는 다시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유민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했다. ( 태조1년 1392년 고려 왕씨들 둔덕기성 유배 당시, 이들을 통제 관리한 관리는 견내량 수군만호였다).

 

● 참고 : 또 조선초기 경상우수영을 거제도에 설치된다. 태종11년 1411년, 가배량(加背梁, 통영)·견내량(見乃梁) 등지의 만호로 하여금 옥포(玉浦)로 옮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그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하는 곳이 여덟이니, 고성(固城) 가배량(加背梁),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도만호가 수어한다. 병선 22척, 군사 1천 1백 22명이었다. 거제(巨濟) 영등포(永登浦)에는, 병선 8척, 군인 7백 20명이 있었고, 1404년 견내량(見乃梁),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병선 20척, 군사 9백 40명이다. 1418년 당시 오아포 수군절도영에는 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 주둔했다. 조선태종 때 거제도 수군인원만 3000 여명이 넘었다. 수자리 살던 수군이 대부분이라 그 가족을 헤아리면 엄청난 인원이 거제도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경상우수영의 거제도 설치와 수군진영 구축, 거제현 이설로 1500년경, 약 10000명 이상의 인구수를 갖게 되었고, 임진왜란 전까지 꾸준한 인구 증가가 일어났다. 그러나 임진왜란 동안 급격한 인구감소를 겪은 후에, 이후 약 100년 동안 육지로부터 10000명 이상의 이민자와 수군장정이 들어오면서 1680년 이후 거제인구수가 20000명을 넘게 된다.

 

3) 1664년 거제읍치 거제면 이전 時, 13,558명(관청 집계 수).

4) 1707년 거제유림 신수오 선생 장계 자료, 거제인구 25000명 민호 5900호(승정원일기).

5) 1750년대 초기(해동지도) 거제인구 총23304명(남:10728명, 여:12576명). 6개면 8진영.

6) 1790년대 말(지승지도, 여지도) 총 24734명(남:11540, 여:13194).

7) 1800년대초(여지도) 총25220명.  1832년 거제읍지, 총30,023명(남:14,822 여:15,201).

9) 1880년 31,281명. / 1941년 97,727명. / 1956년 105,048명. / 1990년 144,233명. / 2000년 176,028명. / 2010년 1월 225,903명. / 2016년 2월 총256,646명, 남자 135,741명, 여자 120,905명이다.

 

규장각기록에는, 조선초기 세종 때 거창에서 복귀한 거제인은 군정(軍丁) 103명, 주민 153세대 인구 423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거제 전체 인구통계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고려말기부터 육지에서 이주한 유민 수천 명이 거제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거창군에서 환도하기 전에 설치된, 거제도 수군진영인원(약 3000명)도 제외한 것이었다. 또한 이후 거제7진영이 설치되고 뭍으로부터 유입되는 유민이 증가하여 숙종(1674년~1720년)때 주민 6641세대 인구 32,108명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서에는 18세기 중엽까지 5천 수백여 호의 원호(元戶)에 2만 4천여명이라 전한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엽에는 원호 6,981호, 인구수 30,023명으로 불어나서 자료마다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며, 이후로는 6,600여 이상의 호와 3만 명을 웃도는 인구수가 지속된다. 단, 19세기 말엽에는 행정 개편과 관하 군진(8진영)의 폐지가 이뤄지면서 급격한 감소세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잦은 왜란과 바닷가 어촌의 특징인 '여초현상'으로 성비 불균형이 극심했다.

 

근현대 6.25전쟁 중, 거제인구는 주민 10만 명, 피난민 약15만 명, 포로 17만 명 등, 한때 약42만 명이나 되었다. 이후 1985년부터의 인구증가와 '남초현상'은 조선경기 활성화에 기인한 것이다.

 

● 참고 : 고려시대 거제치소는 사등면 사등성 일대인 것으로 확인된다. 우선 고려사절요에는 1226년1월 고종13년 거제현령 진용갑(陳龍甲)이 왜가 침구하여 사도전(沙島戰)이 일어나, 적 2급을 참살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사도(沙島)는 고현(古縣) 동쪽에 있다. 거제읍지 편에는 고려 고종(高宗) 때에 왜적(倭賊)이 침입하자, 현령 진룡갑(陳龍甲)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사도에서 싸웠는데 적이 밤에 도망쳤다. 그리고 거제부 청구요람 고지도에도 사등 앞바다 '사두도(蛇頭島,沙島)'를 진용갑이 싸워 이긴 섬으로 표기하고 있다.

 

거제현 치소 북쪽 섬에 왜구가 침입했다는 당시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 거제현 치소는 사등성임이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1422년 거창군에서 다시 환도(還島) 했을 때에도 옛 치소로 돌아왔으나 여러 형편이 좋지 않아 고현(고정리)로 치소를 옮겼다고 한다.

 

/ 거제도 본섬의 명칭도 사도도(沙都島), 상도(裳島), 거제도(巨濟島)로 바뀌었다. 1690년 거제면 동상리 김진규 선생은 그의 문집에, 당시 거제도 본섬을 '상도(裳島)'와 '거제도(巨濟島)'로 병기하여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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