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方 廣 佛 華 嚴 經
第四會
修因契果生解分
差別因果周
夜摩天宮 如來放兩足趺光 功德林菩薩 入菩薩善思惟三昧 十行法門
二十一, 十行品
제21 十行品 39
1. 공덕림(功德林)보살이 삼매(三昧)에 들다 39
2. 부처님이 가피를 내리다 39
(1) 가피(加被)의 인연을 말하다 39
(2)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하는 일을 말하다 40
(3) 가피의 상(相)을 보이다 41
① 말의 가피 41
② 뜻의 가피 41
③ 몸의 가피 41
3. 공덕림보살의 열 가지 보살행 42
(1) 보살행의 근본을 말하다 42
(2) 열 가지 행의 이름을 열거하다 42
(3) 제 1 환희행(歡喜行) 43
① 보살은 모든 것을 다 베푼다. 43
②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베푼다. 43
③ 보시의 행을 밝히다 44
④ 깨달음으로 회향(廻向)하는 보시(布施) 46
⑤ 보시의 인(人)과 법(法)이 다 공(空)함 46
⑥ 인(人)과 법(法)이 공(空)한 이익을 밝히다 47
⑦ 법의 보시를 행하기를 원하다 47 (4) 제 2 요익행(饒益行) 48
① 계(戒)를 가지는 행(行)을 밝히다 48
② 섭율의계(攝律儀戒) 49
③ 섭중생계(攝衆生戒) 50
지난 시간에
攝衆生戒
若或從事인댄 無有是處니라
菩薩이 自得見佛已來로 未曾心生一念欲想이어든 何况從事아
若或從事인댄 無有是處라
보살이 부처님을 뵈온 후로는 일찍이 잠깐도 탐욕 생각을 내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하물며 실제로 그런 일을 생각도 안 냈는데 바깥에 행동이 있을까보냐.
그 대목까지 했죠?
오늘은 거기에 이어서 화엄경 제 44강째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바로 붙어 나오는 부분들입니다.
爾時에 菩薩이 但作是念호대 一切衆生이 於長夜中에 想念五欲하며 趣向五欲하며 貪着五欲하며 其心決定하며 耽染하며 沈溺하며 隨其流轉하며 不得自在하나니
그때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나니, '일체 중생이 오랜 세월에
長夜中이라고 하는 게 우리 유명한 게송처럼 이런 게송이 있죠.
뭡니까?
大明도 不能破長夜之昏이라.
저 태양도, 大明도 능히 파할 수 없다.
長夜, 아무리 밝은 부처님의 광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長夜라는 말 자체가
늘 해 뜰 날이 없고 늘 캄캄한 그런 무명 번뇌를 얘기하는 거죠.
不能破長夜之昏이라.
무시무명에 뒤덮인 그런 캄캄한 혼침은 깨울 수가 없다, 이런 얘기가 있고
慈母도 不能保身後之子라.
앞에는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長夜, 그러니까 그런 무명의 캄캄한 밤을 깨울 수가 없는 것이고
자비가 아무리 넘친다 하더라도
자비로운 어머니가 계신다 하더라도
身後之子는 不能保라.
不能保身後之子라, 죽은 자식은 어떻게 살릴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얘기를 우리 흔히 이렇게 얘기하죠.
千佛이 出世라도 也無救爾處이리라.
천 명의 부처님께서 천 분의 부처님께서 탄생하셔가지고
중생을 제도하시더라도 그대를 구할 길은 없다.
인연 없는 중생은 그렇다는 얘기를
우리 흔히 이제 禪家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죠.
여기서 長夜中이라고 하는 거는
총체적으로 중생들이 오랜 세월 속에서
한 번도 욕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시무명으로부터 캄캄해가지고
번뇌에 얽혀 있는 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계속 이어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이제 중생이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죠.
거기 대목들이 8 가지 대목을 이렇게 나눠놨는데
첫 번째는 오욕심을 생각하고
생각을 일으키면 거기 가려고 발걸음을 옮기겠죠. 그죠?
오욕으로 향해서 나아가고 취향하고
나아가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가서 만나보면 딱 달라붙어가지고 탐착해가지고
아교처럼 오욕에 붙어서 떨어지지를 안하네.
오욕을 탐착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마음을 결정해가지고
그 다음에
오욕에 물들고,
耽染탐염해서 싫어하지 않는 거에요. 그 다음에
沈溺침익한다고
홀~딱 빠져가지고 도박에 빠지듯이 빠져가지고
그리고 오욕을 따라서 어떻습니까?
隨其流轉이라.
그 경계를 따라가지고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그냥 고! 고! 이렇게 푹~ 빠져 있는 거죠. ㅎㅎ
마약 중독되듯이 隨其流轉이라.
그렇게 돌고 돌다보니까 어떻습니까?
드디어 자유자재를 잊어버리고
자재함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생각생각에 얽혀가지고 거미줄처럼 얽혀가지고
無有出期라, 벗어날 기약이 없다는 거죠.
欲破不能이라, 아~무리 오욕락을 벗어나고자
欲破하고자 하지만, 破해보고자 하지만, 어떻습니까?
벗어날 길이 없다. 불가능하다.
이 얘기를 거기까지 해놨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남에게 권하는 대목이 이제 나옵니다.
我今應當令此諸魔와 及諸天女와 一切衆生으로 住無上戒하고
내 이제 마땅히 이 마구니와 천녀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 다 함께 그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위없는 계율에 머물게 할 것이고,
그러면서 그냥 머무르라 하면 잘 안 머무니까 어떻게 합니까?
계율 공덕에 대해서 또 설명을 합니다.
住淨戒已하야는 於一切智에 心無退轉하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며 乃至入於無餘涅槃케호리라
청정한 계율에 머문 뒤에는 온갖 지혜에서 一切智에서 마음이 퇴전하지 아니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내지는 무여열반에 들게 한다.
戒定慧 三學을 그래서 우리 흔히 三無漏學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죠.
여기서는 乘空天上은 戒爲善梯라 하는
사미율의에 나오는 대목들이 있죠.
집착 없는 저 천상 세계를 올라가는데 있어서는
戒爲善梯라,
계가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좋은 사다리가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梯 제 : 1. 기대다, 의지하다(依支--), 2. 사다리, 3. 새싹, 4. 실마리, 5. 오르다)
여기서 饒益行에서는 뭘 지금 얘기하고 있습니까?
攝律儀戒 攝衆生戒 攝善法戒
이와 같이 근본 三聚淨戒로써 三無漏學을 대표적으로 얘기하죠.
總戒로써
何以故오 此是我等의 所應作業이라 應隨諸佛하야 如是修學이니라
왜냐하면
이제 따져 묻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所應作이라, 마땅히 지을 바 응당한 바의 작업이라.
그래서 마땅히 누구를 따라서요?
모든 부처님을 따라서
如是修學이니라, 이와같이 배울 것이니라'
우리 흔히 계율은 뭐라고 합니까?
부처님의 행이요,
敎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정의를 하죠.
그 다음에
④ 攝善法戒
作是學已에 離諸惡行과 計我無知하고 以智入於一切佛法하야 爲衆生說하야 令除顚倒라하나니라 然知不離衆生하고 有顚倒요 不離顚倒하고 有衆生이며 不於顚倒內에 有衆生이요 不於衆生內에 有顚倒며 亦非顚倒가 是衆生이요 亦非衆生이 是顚倒며 顚倒가 非內法이요 顚倒가 非外法이며 衆生이 非內法이요 衆生이 非外法이라 一切諸法이 虛妄不實하야 速起速滅하야 無有堅固호미 如夢如影하며 如幻如化하야 誑惑愚夫하나니 如是解者는 卽能覺了一切諸行이라 通達生死와 及與涅槃하야 證佛菩提하야 自得度하고 令他得度하며 自解脫하고 令他解脫하며 自調伏하고 令他調伏하며 自寂靜하고 令他寂靜하며 自安隱하고 令他安隱하며 自離垢하고 令他離垢하며 自淸淨하고 令他淸淨하며 自涅槃하고 令他涅槃하며 自快樂하고 令他快樂이니라
④ 섭선법계(攝善法戒)
이렇게 배우고는 모두 나쁜 행동과 '나' 라고 고집하는 무지(無知)를 여의고, 지혜로 일체 부처님 법에 들어가서 중생에게 법을 말하여 전도(顚倒)를 버리게 하거니와, 그러나 중생을 떠나서 전도가 있지 않고, 전도를 떠나서 중생이 있지도 않으며, 전도 속에 중생이 있지도 않고 중생 속에 전도가 있지도 않으며, 전도가 곧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곧 전도도 아니며, 전도가 안[內]의 법도 아니고 밖의 법도 아니며, 중생이 안의 법도 아니고 중생이 밖의 법도 아닌 줄을 아느니라. 온갖 법이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여 잠깐 일어났다 잠깐 없어지는 것이요, 견고하지 못하여 꿈과 같고 그림자 같고 요술 같고 변화함과 같아서 어리석은 이를 의혹케 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알면 곧 모든 행을 깨달아 나고 죽는 일과 열반을 통달하여, 부처님의 보리를 증득하며, 스스로 제도하고 남을 제도하며,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며, 스스로 조복하고 다른 이를 조복케 하며, 스스로 고요하고 다른 이를 고요하게 하며, 스스로 안온(安隱)하고 남을 안온케 하며, 스스로 때를 여의고 남의 때도 여의게 하며, 스스로 청정하고 남도 청정케 하며, 스스로 열반하고 남을 열반케 하며, 스스로 쾌락하고 남도 쾌락케 하느니라.
④ 攝善法戒라
善法을 모두 포섭하는 戒라.
作是學已에 離諸惡行과 計我無知하고 以智入於一切佛法하야 爲衆生說하야 令除顚倒라 하나니라 然知不離衆生하고 有顚倒요 不離顚倒하고 有衆生이며
그거는 뒤에 하는 게 낫겠는데요.
④ 섭선법계(攝善法戒)
이렇게 배우고는 作是學已에, 是學을 짓고는, 이렇게 배우고는
모든 나쁜 행동, 諸惡行과
또 計我, '나' 라고
뭐라 할까...
계산하고 고집하는 計我無知를, 자기가 있다고 헤아리는 그런 무지(無知)한 잘못 알고 있는 것
그러니까 흔히 얘기하면
所知障과 煩惱障이라고 많이 들어보셨잖아요? 그죠?
二障에 대해서 모든 번뇌의 그런 악행과
잘못 알고 있는 惡智 無知에 대해서 그런 것을 모두 떠나서,
어디로 들어갑니까?
以智로, 지혜로써
入於一切佛法하야, 일체 불법에 들어가서 그러니까
爲衆生說이라,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해서
令除顚倒케 하나니라
모든 顚倒를 없애, 顚倒를 除滅케, 버릴 수 있도록 제거하도록 한다.
이래 놨습니다.
우리가 흔히 善法, 여기는 惡法이 나오는데
攝善法, 선법이라고 얘기하면
지난 시간에 얘기했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두 가지로 요약해서 선법은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했습니다.
不出二者라, 두 자를 벗어나지를 못한다.
하나는 자비요, 하나는 지혜입니다. 그죠?
우리 흔히 이제 悲增菩薩, 이러면
자비심을 증득했는 보살을 관세음보살 같은 분들은 비증보살이라고 하죠.
자비로울 悲자에다가 증득할 增자 써서
그리고 지혜가 있는 보살들은 뭐라고 합니까?
智增菩薩이라고 하죠.
누가 높습니까?
높다고 하니까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ㅎㅎ
이타행으로 볼 때는 비증보살이 더 높은 단계라고 이래 봐야 되겠죠.
남을 자기가 지혜가 뛰어난 것보다 어떻습니까?
실제로 남을 위해서 손을 내미는 보살이
더 그런 공능이 있는 보살이 더 대단하다고 봐야 되겠죠.
우리가 흔히 대승경전을 보다가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특히 화엄경에서도 문수보살이 장자입니까?
보현보살이 장자입니까?
보현보살이 맏아들입니다. 그죠?
문수보살은 둘째 아들입니다.
문수보살은 지혜가 뛰어나지만
보현보살은 실천이 뛰어나기때문에
보현보살을 화엄경을 보현경이라 해도 괜찮을 정도죠.
특히 離世間品 같은 경우는
완전히 보현보살이 보혜보살한테
이백 가지를 질문 받고 이천 가지로 법문을 쏟아내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면 입법계품에 출발은 문수에서 하고
중간에서 자비,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이 누구입니까?
미륵보살입니다.
南無~ 兜率天~ 內院界~ 慈氏海會~ 諸佛諸菩薩 ~
도솔천 내원궁에 누가 계세요?
미륵보살, 자씨 미륵, 그죠?
미륵보살이 게십니다.
그러면 우리 화엄경에서 도솔천에서 무슨 설법을 합니까?
십회향, 그죠?
도솔천을 다른 말로는 지족천이라 하기도 하죠.
문수보살은 땅바닥 보광명전 1차에서 설법이 되셨고
미륵은 거기 금강당보살이 이제 십회향품을 설하겠습니다만
도솔천에서 설법이 되니까 사시니까
그분은 자씨다, 자비로운 분이다, 이래서
미륵보살이 처음에 지혜롭게 자비롭게
마지막에 가면 화엄경 끝에 입법계품에 만나는 선지식이 누구입니까?
누구에요?
보현보살입니다. 보현보살
그러면 문수를 만나서 지혜를 상징하고
중간에 누구를 만납니까?
미륵이를 만나서 자비롭게 되는 거죠.
미륵이를 만나는 순간에 자비가 충만해지면
前來 所得法門을, 오십 명 선지식에게 들었던 법문을
彌勒一彈指頃에 頓亡前來 所得法門이라.
앞에서 들었던 법문을 다 까먹어도
자기 마음이 청정하고 자비롭게 되면
이제까지 얻었던 유위법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괜찮다.
이런 말씀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다시 이제 보현보살을 만나서
화엄경 마지막 결론이 누구를 만납니까?
보현보살을 만나서 입법계품이 마지막에 맺어지잖아요. 그죠?
입법계품 마지막 두 번째 게송이 뭐라고 말씀드렸죠?
刹塵心念可數知
大海中水可飮盡
虛空可量風可繫
無能盡說佛功德
여기 이제 자비와 지혜가 나왔기 때문에
제가 화엄경의 입법계품을 예를 들어서
문수로 시작해서 미륵으로 충만해서 보현으로 회향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고
법화경도 그와 똑같은 조건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옛날 분들이 경전을 편집할 때
그런 걸 보면 참~ 지혜롭다고 이런 생각이 들죠.
여기 섭선법계에서는
하나는 자비고 하나는 지혜
착한 법은 이 두 가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제가 항상 강의할 때 주장하는 게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자비롭지 못하다.
무자비하죠. 무자비
제일 대표적으로 무자비한 사람이 조지고 부쉬는 조지 부시 ㅎㅎ
그 아버지도 전쟁을 그렇게 일으키고 그 아들은 조지 다블유 부시
그래가지고 2번이나 전쟁 일으키죠?
걸프전하고 ㅎㅎ
자~ 그 다음에
지혜로써 일체 부처님 법에 들어가서
부처님 법에 들어간다는 거는 그 공덕을 이제 이루어지는 걸 밝히는 거죠.
중생에게
뭘 말합니까?
법을 말하여 전도몽상을 버리게 한다
즉시 여기서는 이제 자비롭게 돼야 된다,
이런 걸 중생들에게 이제 법을 말해서
중생들에게 뭐 하려고 설법을 하느냐?
그들로 하여금 전도몽상을 버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런 뜻이네요.
그러나 然知不離衆生하고, 중생을 떠나서는 전도가 있지 않고, 또 전도를 떠나서는 중생이 있지 않다
자~ 이런 말씀입니다.
한 번 생각이 무명 망상이 한 번 들어버리고나면
계~속 그릇되게 가는 것이죠.
한 번 이제 잘못 발걸음을 들여놓으면
그거는 倾向性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기울어지는 것, 그죠?
경향성
착한 일도 한 번 하면 어떻습니까?
계속 착한 쪽으로 마음을 내게 되고
악한 일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 것처럼
바늘 도둑 소 도둑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한 번 이렇게 뒤집힌 생각을 하니까
그 끝도 계~속 중다한 有生有滅의 생멸 인연의 세계로 가버리는 것이고
부처님은 처음부터 無念無相絶一切에서
한 생각도 없고 텅 비어버리니까 진공이니까
가는 곳마다 묘유로 연꽃세계가 펼쳐지는 것이죠.
자~ 여기서 그래 놨습니다.
중생을 떠나서는 전도가 있지 않고, 전도를 떠나서도 중생이 있지도 않는다
이래서 이제 對句로 지금 한 4개 정도가 쭉~ 연결돼 나올 것 같습니다.
不於顚倒內에 有衆生이요 不於衆生內에 有顚倒며 亦非顚倒가 是衆生이요 亦非衆生이 是顚倒며 顚倒가 非內法이요 顚倒가 非外法이며 衆生이 非內法이요 衆生이 非外法이라
전도 속에 중생이 있지도 않고 중생 속에 전도가 있지도 않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도 고정불변적으로
어떤 당체가 자체가 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전도된 생각을 일으켰기 때문에 뭐가 생겨졌어요?
중생이 있는 것이고
또 전도된 생각이 고정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망상 허망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전도된 중생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죠.
그래서 인과가 서로가 마주보면서 인연이 이루어지는 걸
이제 쭉~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자체는 있겠습니까? 없습니까?
罪無自性從心起로다. 그렇죠?
心若滅時罪亦亡이로다.
전도가 곧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곧 전도도 아니며, 전도가 안[內]의 법도 아니고 전도가 바깥 경계의 법도 아니며, 중생이 또한 안의 법도 아니고 중생도 또한 밖의 법도 아닌 줄 알지니라.
전도와 중생이 안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고 중간에도 없다고 하면
무소유라, 있는 바가 없다.
있는 바가 없는 것을 이 허공같은 공이라고 한다.
一切皆空이라.
그래서 반야심경 같은 데는 간단하게 해놨죠.
무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以無所得故, 아무 것도 얻을 바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 중생만 얻을 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얘기는 안해놨지만 뭐도 없겠습니까?
중생은 부처님께 제도 당해야 될 인물이고
청정 지혜로부터 소멸돼야 될 것이 전도몽상인데
그것이 없다고 하면
부처님 설법 또한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고정된 것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방편으로 화엄경을 본다, 이런 뜻이 되겠네요.
一切諸法이 虛妄不實하야 速起速滅하야 無有堅固호며 如夢如影하며 如幻如化하야 誑惑愚夫하나니
온갖 법이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여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잠깐 일어났다 잠깐 없어지는 것이라
찰라 생멸이라고도 흔히 얘기하죠.
견고하지 못하여
견고한 것은 저~ 뒤에도 나오겠습니다만
堅固不動이라고 얘기하죠.
견고한 것은 태산처럼 움직이지 아니한다.
견고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 흔히 잘 아는 금강반야니라. 금강이니라.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죠?
정각을 견고하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죠.
허망 망상분별은 견고함이 없어서 뭐와 같습니까?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이라.
꿈과 같고 그림자 같고 허깨비 같고 사진 같다. 그런데
誑惑愚夫하나니, 어리석은 이를 의혹케
살~콤 미치도록 그렇게 미혹하게 한다.
제정신이 아니도록 만드는 거죠.
실제적으로 원숭이가 어리석게도 강에 가서 연못에 가서
달 따려고 하다가 물에 퐁당 빠져 죽는 것 하고 똑같죠.
소동파 여동생 蘇小妹의 시처럼
月磨銀漢轉成圓이라.
달을 갈아서 은하수에 달을 갈아서 보름달을 만들었더니
素面舒光照大千이라.
저 하얀 달빛이 舒光이 삼천대천 세계를 비추는구나.
만중생의 가슴가슴마다 전부 그런 게 있기는 하다 이거지.
그런데 그 달이 어느날 연못에 떨어졌는데
連臂山山에 空捉影이라.
손에 손 잡고 원숭이 오백 마리가 달을 건져가지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려고 했는데
孤輪은 本不落靑天이라.
저 하늘에 孤輪은 不落靑天이라.
孤輪은 本, 본래부터 不落靑天이라, 청천에서 떨어진 바가 없다.
그런 걸 염두에 둔다 하면
이런 얘기들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망녕되이 허망하게 우리가 이리저리 이제 잔머리 굴린다 그러죠.
잔머리 굴릴 뿐이죠.
이제 화엄경이 지금 십행품 4회차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4회차 설법을 하고 있는데
若人欲了知가 어디에 나옵니까?
몇 회차 설법?
覺林보살이 3회차가?
4회차
제가 여기서 해드려야 될 부분들은
7처9회 구석구석 한 군데 한 군데에서 포인트만 잡아드리고
전에 나눠드린 화엄경 표해 있죠?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된 화엄경 정리 노트?
그걸로 이제 2학기 때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해가면서
포인트, 여기 가면 무슨 섬이 있고 저기 가면 대전이고 저기 가면 목포고
이런 것 있잖아요. 그죠?
그렇게 그렇게 저는 그 이정표마다 그 특성만 일러드리겠습니다.
그런 것 안 일러드리면 여러분들께서 80권 다 보시려면
이게 그거 같고 그게 이것 같고 막 헷갈리시니까 그런 것만 해드리고
진짜는 여러분들께서 다 보셔야 되고
수시로 이제 화엄경 펴놓고 이것 보시고 저것 보시고 하면
우리 인생 사는데도 좀 도움이 안될까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그 다음에
如是解者는 卽能覺了一切諸行이라 通達生死와 及與涅槃하야 證佛菩提하야 自得度하고 令他得度하며 自解脫하고 令他解脫하며 自調伏하고 令他調伏하며 自寂靜하고 令他寂靜하며 自安隱하고 令他安隱하며 自離垢하고 令他離垢하며 自淸淨하고 令他淸淨하며 自涅槃하고 令他涅槃하며 自快樂하고 令他快樂이니라
이렇게 제대로 알게 되면 모든 행을 깨달아서
모든 행이 뭐와 같다는 거요?
실답지 못하고 허깨비 같고 꿈과 같고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인 줄 안다면
이것이 바로 覺了諸行입니다.
卽能覺了一切諸行이라.
일체제행이 그렇게 무상한 줄 알게 되면
생사, 생사의 그런 반대말이라 할까...그게 뭡니까?
열반
흔히 生死涅槃을 常共和라고 의상스님께서는 말씀하셨지만
이렇게 얘기하죠.
나를 열반회상에서 부처님께서 자마금신을 어루만지시면서
나를 열반에 들었다고 하면 내 제자가 아니다.
또 나를 열반에 들지 않았다고 해도 내 제자가 아니다.
부처님처럼 우리를 헷갈리게 하시는 분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ㅎㅎ
그래서 흔히 이렇게 얘기하잖습니까?
初設有空人盡執이라.
사람들이 보현사 여기 주련에 보면 쓰여져 있죠.
처음에는 初設有空, 있다 했다.
空, 없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있는 데도 없는 데도 다 집착하니까
그 다음에
後非空有衆皆捐이라.
뒤에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버렸다.
龍宮海藏에 妙萬法이라.
용궁해장에 법왕의 그런 가득 차 있는 그 책을
팔만사천대장경전이라 할까요?
鶴樹終談에도 理未玄이라.
부처님께서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실 때도
그 이치를 다 말씀하시지 못했다.
그 말씀은 뭡니까?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데
있는 데 집착하는 중생이 오면 없다고 얘기해야 될 것이고
없는 데 집착하는 중생이 오면 있다고 얘기해야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비파사나를 닦아야 될 것이고 먼저
어떤 사람은 사마타를 닦아야 될 것이고
거기에 따라서 이제 법을 그 사람에 맞춰서 설해지니까
법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지.
옆에 아무리 친하게 같이 살고 같이 말하고 밥을 먹고 하더라도
서로 업을 녹여야 되는 길이
어떤 사람은 불과 같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불에 타야 될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물에 녹아야 될 사람이 있으니까
각자 자기의 성향을 살피는 게 좋죠.
대표적으로 부처님 당시에 어떻습니까?
세탁일을 하던 사람은 부정관을 관하고
풀무질하던 사람은 수식관을 관하게 하듯이
나고 죽는 일과
나고 죽는 일이라고 하는 게 우리가 마음이라든지...
나고 죽는 일이 뭡니까?
일생, 우리의 일생적인 삶이
또 이름 하나 전부 붙여놓고 살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 법명도 있고 속명도 있고 호도 있고...그죠?
이 마이크 지도 이름 하나 달라붙었네...
마이크니 책상이니 의자니 체어니 데스크니...
일본말로 붙든지 영어로 붙든지 한국말로 붙든지
그러한 모양과 또 어떠한 음표도 있고 음식도 있고
여러가지 모든 행상과 그런 헛된 이름들이
그런 걸 이제 여기서 뭐라 했습니까?
通達生死라.
그죠?
생사라고 하는 거는 전부 허망과 그런 모양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 여기 通達生死라고 하는 거는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체유위법에 대해서 통달하고
또 열반을 통달하며,
열반을 통달한다고 하는 것은 뭡니까?
이 마음의 본체가 고요해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생사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형상이 다 허망하다고 하는 것이죠. 그죠?
그 두가지에 대해서 어떻습니까?
꿰뚫어서 통달하고 나니까 열반 본래 없고 생사 본래 없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열반을 다른 말로는 불생불멸이라고도 얘기를 하죠.
생사는 다른 말로는 유생유멸이라고도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의 보리를 증득하며,
이거는 이제 구경의 보리를 증득하는 것을 뜻하죠.
그러니까 본래 없다는 것을 이제 확실히 깨치고 나니까
그 뒤에 대목은 전체적으로 4개 4개씩 苦集滅道를 가지고 나눴습니다.
自得度하고, 스스로 제도하고 남을 또 제도한다,
남도, 다른 이들도 제도를 얻게 한다, 이런 말이죠.
이거는 남을 제도한다는 말은 苦集滅道
건널 度자 써서 苦, 고통을 건너게 한다.
왜 度一切苦厄이라고 반야심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죠?
度라는 말은 뭘 건너게 합니까?
괴로움을 건너게 하는 苦聖諦라, 이 정도 해당하겠습니다.
스스로 해탈하고 또 남을 해탈하게 한다,
스스로 모이고 묶이고
생사의 그런 까닭을 생사를 요달하는 까닭으로
이거는 苦集할 때 集聖諦가 되겠습니다. 集
스스로 조복하고 다른 이를 또 조복케 한다,
조복하는 건 뭡니까?
八正道입니다. 그죠?
이거는 道聖諦가 됩니다.
스스로 고요하고 다른 사람도 고요하니까,
고요한 거는 뭡니까?
적멸입니다. 그죠?
이거는 滅聖諦가 되겠습니다.
고집멸도를 가지고
그래서 저~기 앞에 해탈하게 한다는 거는
아주 여러가지 인연을 모으면 생사가 얽히는 것이고, 두 번째
마지막에 뭡니까?
스스로 고요하다는 이 말은 고요~ 寂地而滅이라.
그러니까 열반이 고요~하다는 것을 이제 깨달아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그 다음에 그거를 다 조복하고 적정하고 해탈하고 득도하고
고집멸도를 다 건너고나면 어떠한 상태가 되느냐?
自安隱하고 令他安隱하며, 스스로 안온(安隱)하고 남을 안온하게 하며,
안온하다는 말은 무슨 말이죠?
그 위에 하고 아래 하고 같이 쭉~ 연결돼 있는 거에요.
그 다음에
스스로 때를 여의고 남의 때도 여의게 하고,
스스로 청정하고 남도 청정하게 하고,
스스로 열반하고 남을 열반케 한다.
한 번 위에서 얘기를 했으면 끝날텐데
다시 한 번 더 똑같은 대목을 반복하는 것은
자비로움이 묻어난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9번째는 뭐라 해놨습니까?
自快樂하고 令他快樂하나니라, 스스로 쾌락하고 남도 쾌락케 한다.
다 묶으면 뭡니까?
離苦得樂
離一切苦, 남으로부터 모든 고통을 떠나서
得究竟樂이라, 열반을 얻게 한다.
그러니까 樂이라는 말도 4가지로 늘이면 뭐가 됩니까?
常樂我淨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涅槃 四德이라 하죠.
그 다음에
⑤ 心念殊勝行
佛子야 此菩薩이 復作是念호대 我當隨順一切如來하야 離一切世間行하며 具一切諸佛法하며 住無上平等處하며 等觀衆生하며 明達境界하며 離諸過失하며 斷諸分別하며 捨諸執着하며 善巧出離하며 心恒安住無上無說無依無動無量無邊無盡無色甚深智慧라하나니 佛子야 是名菩薩摩訶薩의 第二饒益行이니라
⑤ 더욱 수승한 행을 닦을 것을 생각하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다시 이렇게 생각하되 '나는 마땅히 일체 여래를 따르며, 일체 세간의 행을 여의며, 일체 부처님 법을 갖추며, 위없는 평등한 곳에 머물며, 중생을 평등하게 보며, 경계를 밝게 통달하며, 모든 허물을 여의고, 모든 분별을 끊고, 모든 집착을 버리고, 공교하게 뛰어나며, 마음은 항상 위없고 말할 수 없고 의지할 데 없고 변동이 없고 한량없고 한없고 끝나지 않고 모양이 없고 깊고 깊은 지혜에 머물리라' 하리니, 불자들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둘째 이익 하는 행이라 하느니라.
⑤ 心念殊勝行이라
⑤ 더욱 수승한 행을 닦을 것을 心念, 생각하다
佛子야 此菩薩이 復作是念호대 我當隨順一切如來하야 離一切世間行하며 具一切諸佛法하며 住無上平等處하며 等觀衆生하며 明達境界하며 離諸過失하며 斷諸分別하며 捨諸執着하며 善巧出離하며 心恒安住無上無說無依無動無量無邊無盡無色甚深智慧라하나니 佛子야 是名菩薩摩訶薩의 第二饒益行이니라
⑤ 더욱 수승한 행을 닦을 것을 권하다
여기 이제 20구절이 있어요.
아래 위로 쭉~ 해가지고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다시 이렇게 생각하되 '나는 마땅히 일체 여래를 따르며,
부처님을 隨順한다.
수순은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應無所住 而生其心이죠.
마음에 부대끼는 게 없이
저는 이렇습니다.
부처님은 물론이겠지만 흔히 제가 좋아하는 원효스님
원효스님께서 남겨놓으신 책이나 해설을 볼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느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어른스님께 그랬어요.
'저는 원효스님이 틀려도 원효스님 틀린 길 대로 따라 가겠다.'고
원효스님이 다른 분들 하고 틀린 견해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래도 원효스님이 틀리면
나는 바로 잡아서 내 길로 한 번 모색하는 게 아니고
스님이 틀려도 간다 이거요.
사랑에 눈 멀면 야반도주하잖아요?
그런 경우가 되는 거요.
너무 좋으면 그래 되는 거요.
원효스님을 너무 좋아하다보면 어떤 것까지?
단점까지도 따라 하고 싶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게 쉽게 얘기하면 뭐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隨順不二라.
그러니까 저는 이제 불교 신자가 아니라 거의 불교 환자 택이죠. ㅎㅎ
그러니까 술을 먹다가 먹다가 완전히 술 9단쯤 되면 어떻습니까?
몸이 병들어서 술잔을 바라만보고 마실 수는 없을 정도
그 정도로 이제 몸에 술병이 들어버려야 술을 진짜 좋아한다고 하는 거죠.
주식하다가 완전히 패가망신해야
주식 제대로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ㅎㅎ
자기 일생을 그냥 원효스님이나 이 불교에 내던지는 게
아~무 부대낌 없는 뭐라 할까요?
수순
중생을 향하든지 부처님을 향하든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체 세간의 행을 여읜다,
그래서 화엄경이 가장 요찰로 얘기하자면 어느 부분이겠습니까?
이세간품이 몇 회차 설법요?
제 8회차 설법에 설해집니다.
이세간품을 다른 품으로 이렇게 보면
그게 바로 보현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여기서 이제 조금 낮은 하품 해석은 이렇게 되겠죠.
세간을 떠난다고 하지만 세간을 떠난다는 是名 떠난다는 거지.
세간을 떠나지 않는 것이죠?
그건 짐작이 가시잖아요. 그죠?
세간의 다른 명예나 이익을 요구하기 위해서
그 세간에 같이 붙어 살고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속적인 명리 없이 그 세속을 더불어서 구제하는 것이
제대로 된 이세간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죠?
세간을 떠나서 무슨 이세간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세속적으로 망상분별적인 행을 여읜다,
이런 말들은 똑같은 행을 하더라도
세속적인 안에 들어 있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 이 말씀이죠.
흔히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리고 있고 말을 하고 있으면
안에 뭐가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까?
생각이 움직이고 있다는 거죠. 그죠?
자~ 손을 돌리고 있습니다.
뭐가 움직이고 있습니까?
신구의 삼업 중에서 의업이 가장 먼저 동합니다.
의업이라고 하는 거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탐진치라고 합니다.
구업이라고 하면
중생의 입장에서는 기어 망어 악구 양설, 이런 거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도둑질이라든지 殺盜淫이라든지
이런 것도 몸으로 행해지는 건데
안쪽에서 먼저 동하는 게 탐진치입니다.
탐진치를 약간 늘여보면
貪瞋癡 교만 慢, 의심할 疑자 疑, 見 이렇게 얘기하죠.
見을 늘이면 身見 邊見 邪見 見取見 戒禁取見
그것들이 이제 뿌리가 되는 게
안으로 들어오면 아견 아애 아치 아만
그게 이제 안으로 쑥! 들어가면 현식이라고 하는 현식
그 현식과 그 앞에 현식이
우리가 지금 보는 거는 거의 현식의 경계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제 목소리 듣는 것도
현식을 끄집어내서 아치 아견 아만이 제 7식이 동해서
바깥으로 좋다 싫다 이렇게 고락을 분별하면서 그렇게 삽니다.
자~ 여기서 일체 세간의 행이라고 하는 그러한 것들이
지금 방금 말씀드린 대로 근본 번뇌와 수번뇌
이것도 일체 세간의 행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런 걸 따라 가지 않고
어쩌다 중생이 마음을 잘못 먹으면 신심을 일으킵니다.
신심은 망상입니까? 진심입니까?
구분하고 갑시다.
신심은 망심입니까? 진심입니까?
신심은 망심입니다.
아시겠지요?
부처님의 설법 또한 뭡니까?
망심입니다.
일어난 것은 다 일체유위법이
지금 화엄경 여기 책이 있습니다.
경전 이 글자는 전부 뭡니까?
망심입니다.
그런데 이 망심은 뭘로 가기 위한?
진심으로 가기 위한 망심입니다.
그러면 진짜 진심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진진진진 진심은
원조집 이러면 원원조 이렇게 써놓은 데 있거든요. ㅎㅎ
어떤 집은 'KBS에 방송이 된 맛집' 이래 써놓으면
그 옆집은 자기는 방송 나올 기미가 없으니까
'앞으로 방송 나올 맛집' '앞으로 방영될 맛집'
이렇게 써놓잖아요? ㅎㅎ
진짜 진심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생겼다 하면 방편이라 이래 보시면 됩니다.
일체 부처님 법을 갖추며,
앞에 부처님법을 갖췄다면 아~주 그저 부처님법을 갖추면
행이 아주 수승한 법이 되는 거죠.
위없는 평등한 곳에 머물며, 평등한 이치에 머문다.
중생을 평등하게 보며,
아주 중생을 평등하게 자비스럽게
경계를 밝게 통달하며,
지혜가 있어야 밝게 통달하죠.
모든 허물을 여의고,
발심을 하게 되면 발심하는 그 순간부터 어떻다 합니까?
신심이 무르익어서 발심을 하게 되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한 번 실수했는 거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반복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잘못을 저지를 때 소임 보다가 잘못 저지르는데
뻔뻔스럽게 자꾸 우기는 사람 이래 보면 발심이 안돼서 그렇습니다.
발심한 사람들은 한 번 잘못 했는 일은 두 번 다시는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게 이제 三賢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죠.
그리고 십지에서 올라가면
제대로 견도를 하게 되면
체성이 공하고 행상이 공한 줄 아니까
허물 자체가 없는 것이고 법신만 사는 것이죠.
육신은 그 사람의 육신은
온통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법신이라고 이래 보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분별을 끊고, 모든 집착을 버리고, 공교하게 뛰어나며,
번뇌를
어떻습니까?
번뇌를 여기서 공교하게 뛰어나다는 말은
번뇌를 끊지 않고 어디에 들어갑니까?
바로 열반으로 들어갑니다.
대표적인 대목이 누구한테서 볼 수 있습니까?
영가 증도가 첫 구절 뭐라고 해놨죠?
絶學無爲 그러니까 絶學, 더 이상 수행할 게 없고
無爲, 너무 자연스럽고 천연스러운
閒道人은, 한가한 고요한 도인은 뭘 한다?
不除妄想, 망상을 번뇌를 끊으려고 하지도 않고
不求眞, 진짜를 구하려고도 하지도 아니한다. 그래서
無明實性이, 번뇌 덩어리 이 마음 이대로 탐진치가
卽 청정한 佛性이요.
幻化空身이, 이 오척 단구의 코 질질 흘리고 눈곱 끼는
이 똥 오줌 냄새나는 이 몸뚱이가 어떻습니까?
幻化空身이 卽 32상 원만한 法身이다.
卽法身이다.
그래서 여기서 善巧出離라고 하는 거는
아주 잘~ 교묘하게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如蓮華不着水 心淸淨超於彼라.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잘~ 진흙의 오염으로부터 어떻습니까?
出離, 그죠?
벗어나 있으니까 여기서 善巧出離라고 할 수 있겠네요.
뭘 끊지않고?
번뇌를 끊지않고 그대로 열반이라.
마음은 항상 위없고 心恒安住
마음은 항상 어디에 안주합니까?
無上, 위없고 또
無說, 말할 수 없고, 말로는 미칠 수 없는 자리 또
無依, 의지할 자리 없는
無動, 아주 변동이 없는 자리
변화하고 움직이고 흔들림이 없고 부동이라고도 얘기하죠.
無量,
수로 이제 헤아릴 수 있는 한계를 지나버렸죠.
無邊,
끝이 없다는 것 언덕이 안 보이는 거죠.
이쪽 강인지 저쪽 강인지 바다에 언덕이 있습니까?
강이나 이쪽 저쪽 언덕이 있는 거지.
바다는 무량무변하잖아요.
無盡, 다 함이 없고
無色, 모양 색상이 다 끊어져버렸다는 거죠.
切色相이라.
무색이라, 색이 없다.
甚深智慧라 하나니
甚深智慧의 無說無依無動無量無邊無盡無色甚深한 智慧에 편안히 머문다.
깊은 지혜에 편안히 머문다.
여기 깊은 甚深智慧라고 하는 거는
최~상이기 때문에 뭐라고 합니까?
깊다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죠.
이것이 佛子야 是名菩薩摩訶薩의 第二 饒益行이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둘째 넉넉하게 이익하게 하는 행이라.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靈覺心 작성시간 15.07.06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하얀마음 작성시간 15.07.11 通達生死~~
隨順...應無所住而生其心
진짜 진심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지선화 님! 수고하셨습니다...^^* -
작성자妙法樹 작성시간 15.07.12 고맙습니다_()()()_
-
작성자묘심행 작성시간 15.09.15 사랑에 눈 멀면 야반도주하잖아요?
그런 경우가 되는 거요.
너무 좋으면 그래 되는 거요.
원효스님을 너무 좋아하다보면 어떤 것까지?
단점까지도 따라 하고 싶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게 쉽게 얘기하면 뭐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隨順不二라.
그러니까 저는 이제 불교 신자가 아니라 거의 불교 환자 택이죠. ㅎㅎ
-다시 읽어도 눈물이 나네. 나의 짝사랑을 어째 이리 영판 알꼬??? -
작성자미르샘 작성시간 23.08.07 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