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4일 부활 5주일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3ㄱ.34-35
유다가 방에서 31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귀감이 되십시오.
아주 어렸을 때 서당 훈장님은 근엄하고 엄하신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학동들이 글을 읽는 소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이런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훈장님이 계셨는데 항상 바람 풍(風)자를 ‘바담 풍’으로 발음하신 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람풍을 바담풍으로 발음하시는 것을 잘 아셨던지 하루는 바람 풍(風)자를 써놓고 이렇게 일장 훈시를 하셨습니다. “나는 이 바담 풍자를 바담 풍으로 읽지만 너희는 바담 풍해야 한다.” 당신의 발음이 비록 좋지는 않더라도 너희는 발음을 정확하게 하고, 잘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다는 것이 잘못된 가르침일 수박에 없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의 훈장님 발음이나 책을 읽으시는 청은 아주 듣기 좋았기에 언제나 부러웠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사는 생활방법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하고 가르치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몫은 너무 크고 벅찬 것입니다. 내 언행과 사고가 항상 다른 사람들 본보기가 될 만한 언행과 거울로 삼아 모범을 받아 마땅한 귀감(龜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귀(龜)는 거북의 등을 위에서 본 모습입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거북의 등을 불에 구워 그것이 갈라지는 균열을 보고 사람의 장래나 길흉을 점쳤다고 하는데 여기서 거북점이 유래되었습니다. 감(鑑)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기 위해 대야에 물을 떠놓고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하고 여기에서 비롯하여 '판단하는 모든 행위'를 감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쓰는 감상(鑑賞), 감별(鑑別), 감정(鑑定) 등에 쓰인 것이 이 '감'입니다. '귀'와 '감'은 사람의 길흉(吉凶)이나 미추(美醜)를 판단해 주는 기본 도구였던 겁니다. 길흉을 점쳐주는 귀(龜)와 미추를 알려 주는 감(鑑)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잡는다'는 뜻이 이 귀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귀감이 된다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주님은 당신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귀감이 되시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당신이 귀감이 되시어 하느님께서 몸소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집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기도 하고, 아이들을 영광스럽게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해야 우리의 부모님들이 영광스럽게도 되고, 우리의 행실을 보고 부모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정말 내가 효성스럽지 않으면서 효성을 얘기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내가 효성스럽지 않으니 자식들이 효성스럽지 않고, 내가 세상의 귀감이 되지 못하니 내 제자들이 세상의 귀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아름다운지, 추한지를 살펴볼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미추(美醜)를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누누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원수를 사랑하라.’(루카 6, 27)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특별히 새 계명(誡命, 戒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誡命)이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령으로 중국어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사급이문일조신명령 급시규이문피차상애”
我賜給你們一條新命令 及是叫你們彼此相愛)”
(내가 너희에게 새 명령을 한다. 너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물론 영어 성경에서도 “A new commandment I give ; love one another”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이 새로운 명령은 지금까지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반복하시는 것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명령인 것입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귀감으로 삼아 주님께서 하신 사랑을 우리가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생각과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내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위의 명령은 정말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명령은 점점 그 단계를 높여갑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을 요약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 27)고 말씀하셨지만 오늘은 당신께서 귀감을 보여주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방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엉터리 사랑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내 자신의 이기심과 가치기준에 의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만을 좋아했다는 것이 나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 것이 아니라 말로만 ‘사랑한다.’고 표현하기만 좋아한 사랑이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자기희생과 헌신이 아닌 형식적인 사랑으로 내 가족이나 내 이웃에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밖에 보이는 그 모습으로 신앙심이 깊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칭송하였을 것입니다. 그 칭송에 빠져서 자만에 빠져 살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엄청난 말씀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은 내 생활은 어떤 귀감이 되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내가 실천할 수도 없는 말만 늘어놓은 대포신자였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하라고 떠들고, 나는 뒷전에서 비판만 하고 있던 바리사이는 아니었는지,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대하여 판단하고 심판만 하는 율법교사는 아니었는지 마음으로 반성해 봅니다. 내 가족과 아이들에게, 내 제자들에게, 이웃 사람들에게 아무런 귀감이 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적극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주님! 저희에게 당신께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모습대로 사랑하라고 새로운 명령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는 하느님 아버지를 성심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지 못한 부족한 저희들입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저희도 이웃을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사랑의 방법을 좀더 적극적으로 쇄신하여 마음에서 머물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열절하게 하시어 적극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