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소설
SF, '과학소설'인가 '공상과학소설'인가
SF는 ScienceFiction의 약자이다. 따라서 SF를 우리말로 옮기면 글자그대로 '과학소설'이 되겠는데, 어쩐 일인지 과학소설보다는 공상과학소설이라는 말이 더 낯익은 것 같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얼핏 보기엔 간단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엔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맞물려 있는 문화적 질곡의 사연이 숨어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파생된 부작용이나 영향 또한 상당히 광범위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상과학소설'이란 말은 일본에서 들어 온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말이 SF의 번역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일본 SF계를 대표하는 매체로 'SF매거진'이라는 잡지가 있다. 1960년대 초반에 창간되었는데, 당시 이 잡지는 미국의 'The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이라는 잡지의 일본판(Japanese edition)을 표방했다. 흔히 'F & SF'라는 약자로도 표기하는 이 미국 잡지는 1949년에 창간되어 현재까지도 발행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SF잡지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일본의 'SF매거진'은 창간 당시에 이 미국 잡지를 모체로 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표지의 제목 위쪽에 조그맣게 The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에 해당하는 한자를 병기했다. 뭐라고 했을까? 바로 '空想科學小說誌'라고. 그 뒤 일본에서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fantasy 및 SF소설 공모를 할 때에도 '공상과학소설 콘테스트'라는 표현을 썼다. 즉, 일본에서 '공상과학소설'이란 SF의 번역어가 아니라 'Fantasy'와 'Science Fiction' 두 장르를 같이 표현할 때 쓰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선 왜 '공상과학소설'이 SF를 일컫는 말로 굳어져 버렸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는 35년간 일본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 기간동안 지식인 계층이 지적 교양을 쌓는데 이용한 주된 언어는 일본어였다. 생각해 보라. 35년이란 기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태어나서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쳐 사회에서 상당한 경력을 쌓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태어나 자란 사람들, 즉 지금 현재 나이가 65세 이상 정도 되면서 웬만큼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직도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안다.
우리나라의 번역문학은 이 일본 식민지 시절의 영향 때문에 중역판이 많았다. 즉, 영어나 불어 같은 서양언어의 경우 직접 원서를 보면서 번역하기보다는 일본어 번역판을 가지고 다시 우리말로 옮기는 편이 훨씬 수월했던 것이다. 사실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해도 서양어보다는 일본어가 우리말과 체계가 비슷하고 한자도 많으므로 중역하는 편이 더 손쉽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양문학의 번역판은 상당수가 일본어 중역이었다. 번역을 할 정도의 지식인이라면 대부분 일본어를 알고 있으므로 일어판의 중역이라는 손쉬운 길을 택한 때문이다. 이런 추세가 수그러진 것은 일본어 교육을 받은 세대가 거의 은퇴하고 어느 정도 세대교체가 완결된 1990년대 이후부터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SF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8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서양SF문학의 번역판 역시 아동용,성인용 할 것 없이 대부분 일본어 중역판이었고, 심지어 삽화나 로고까지 그대로 베껴 쓴 경우가 많았다. 지금의 30대 이상이라면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8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성인용 SF였던 '동서추리문고'의 몇몇 SF들도 일본의 하야카와(早川)문고나 카도카와(角川)문고를 그대로 중역해 낸 것이다. 게다가 일본인 번역자가 쓴 작품해설까지 그대로 우리말 번역자의 것으로 둔갑했을 정도다.
이처럼 서양의 SF는 대부분 일본이라는 경유지를 통해서 수입되었기에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상과학소설'이라는 말도 따라왔다. 누가 제일 처음에 이 말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그 사람은 이게 'fantasy'와 'SF'를 함께 이르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SF에 비해 fantasy는 우리나라에서 훨씬 더 낯선 장르였다. 지금처럼 '판타지 소설' 붐이 일어난 것은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 '공상' 이라는 말의 어감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공상과학소설'이라는 말의 뉘앙스도 부정적이 되고, 따라서 SF도 그다지 좋은 인상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황당무계하고 허무맹랑한, 쓰레기 같은 공상들만 담아놓은 천박한 장르. 좀 심한 표현이긴 하지만, 솔직히 지난 수 십 년간 이 땅에서 SF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이 정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만일 SF가 '과학소설'로 알려졌었다면?
결국 '공상과학소설'이란 명칭은 단순히 오역의 차원을 넘어 이 땅에서 SF가 제대로 대접받는 데에도 지대한 훼방꾼의 역할을 한 셈이다. 국어사전에까지 올라간 이상,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봐야겠지만.
-- 박상준 (SF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