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 시련 (6월 13일 안식일/일몰19시 54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이번 주에는 삶이 힘들 때 우리가 흔히 보이는 반응들을 살펴보면서
시련이 임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이겨낼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풍랑
시련하면 떠오르는 이야기로 구약의 욥이야기, 신약에서 풍량이야기, 혈루병 이야기, 엠마오로 가는 길, 등을 교과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잘 믿어서 잘되는 인생이 있고, 하나님 잘 믿지만 잘 안되는 인생이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안믿고 사는데도 잘되는 인생,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되면 하나님도 잘 믿고, 잘 안되면 하나님을 떠나버립니다.
또 반대의 경우로 잘되면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잘 안되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과응보적 사상을 갖고 있어서, 시련과 고통이 찾아오면 뭘 잘못해서 당하는 업보라고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반대로 잘되면 내가 뭘 잘해서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하죠.
내가 죄를 범해서 벌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사단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잘하면 복을 주시고, 잘 못하면 벌주시는 분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길 원하시고, 항상 한결같이 꾸준한 사랑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시련이 와도 좁은 시야로 시련만 보지 말고 넓은 시야를 통해서 보면
우리가 당하는 시련은 하나님의 넓고 큰 그림 안에서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련이 왔을 때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한가지에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오해를 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시련의 풍랑을 계속 보내는 이유가 있어요.
사탄은 우리가 시련 당할 때,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만드는 것이 최종 목적이에요.
사탄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하기 위해 고통, 괴로움, 상실, 역경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시련의 바람을 일으키는 이유는 한가지 뿐이에요.
그냥 오해하게 만들고, 원망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집어 넣는거에요.
시련보다 더 큰 시련은 그 시련 속에 담긴 의미와 그 시련 속에 담긴 하나님의 축복을 모르는 것이 진짜 시련입니다!
그리고 더 최악인 것은 그 시련이 하나님 때문에 왔다고 착각하는 것이 시련입니다.
시련을 이기는 탁월한 방법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첫째는 시련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면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시련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왜 시작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죠.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분이에요.
분명한 원칙이 있어요.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고 교훈이 되기 때문에 허락하십니다.
이러한 내막을 분명하게 아는 것은 시련을 이기는 일에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두번째로 시련을 이기는 방법은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시련의 바람을 일으킨 존재는 사탄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은 내 힘으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입니다.
철저하게 이 시련을 허락하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절대로 풀리지 않는 시련이죠.
가장 큰 기적은 가장 큰 시련이 임했을 때에 일어납니다.
단 그 폭풍가운데 우리가 주님을 찾아야만 주님이 역사해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모든 준비를 다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시련을 만났을 때, 속히 주님을 부르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가설명>
영어에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한문에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다.
모두 보고 확인할 때 믿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
보고 확인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믿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듣고 믿는 것이다.
바울은 고후 5:7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그것은 보는 것을 행하지 않고(살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고 한 바울의 고백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을 보지 않고 믿는다.
그런데 제자들처럼 현재 거센 파도가 밀어닥치고 배는 파선할 것처럼 보일 때 보는 것을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아멘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만큼 사망의 존재가 된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실패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호흡마다 우리는 회개하고 순간마다 죽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 주시기 바란다.
온전할 지어다
몰입의 힘을 아시나요?
오늘도 태양 빛이 어제와 동일하게 비추고 있죠.
그런데 돋보기를 통해 태양빛을 모으면 불이 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의 능력도 사실은 매일 태양빛처럼 강렬하게 우리를 향해 비춰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아무 생각없이 그냥 받거나 흘려버리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끌어 모아 믿음이라는 돋보기를 통해 몰입시키면 기적의 불이 일어나는 거에요.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한여인이 혈루증을 앓아 비록 몸은 약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빛을 끌어모으는 위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나은 것은 만졌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막 5:34).
하나님과 함께 자라가는 삶 152
만지는 행위가 낫게 한게 아니라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때, 그 손끝에 그녀의 모든 믿음을 모으고 집중시켰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기적을 일으키는 스토리에서 몰입하는 그녀의 믿음도 주목해야 하지만
그녀의 믿음을 주님이 기억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몸이 불편하고 창피에서 예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형편을 주님은 아셨어요.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가 손을 뻗어 옷자락을 만질 수 있는 거리까지 들어오신 것은 주님이셨죠.
만질 수 있도록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오신 예수님, 정말 감동이지 않나요?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 타이밍을 정확하게 기억하시고 그 타이밍에 맞춰서 그녀에게 치유의 능력을 보내셨다는거에요.
결국 우리도 그 여인처럼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으로 몰입하면 주님께서도 반드시 그 믿음에 반응하시고 큰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주님께로 더 가까이나아가고 더 간절하게, 더 집중하여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모아서 주님께로 손을 뻗는 믿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가설명>
여자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자기의 불치병을 치료받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의심없이 믿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 것이다(롬10:17).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온 왕의 신하를 향하여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라고 하셨다.
그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신하는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요4:49)라고 믿음을 나타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자도 보지 않고 듣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도 기록된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된 사람들이다.
적어도 도마보다 복이 있는 신자들이 아닌가?
이 여자처럼 믿음은 행동을 일으킨다.
이런 믿음이 삶에 드러나는 것이 이번주 기억절이다.(롬5:3~5)
우리는 듣고 믿고 행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 말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생의 절망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희망으로 바뀌는 이번주의 이야기를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희망적인 것을 절망적인 것으로 본 것은 그들의 영적 시야가 열리지 않았던 것이고,
절망적인 것이 다시 희망적인 것으로 바뀐 것도 그들의 가려진 시야를 거둬내신 예수님의 특별한 도우심 때문이었죠.
우리가 당하는 시련도 결국 어떻게 그것을 보느냐에 달렸는데, 그 시야는 예수님이 그 가려진 것을 벗겨내 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시야를 바꿔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며 세상을 보는 나의 시야를 우리 예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시야로
바뀔 수 있도록 절망의 길에서 예수님을 먼저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도전은 정말 막막한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의 실체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비록 당장은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이 중요한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부가설명>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을 왜 이렇게 고난의 세월을 보내도록 방관하느냐는 의문을 가진다.
그런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은 이 세상과 이땅에 사는 사람들의 실상에 완전히 무지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려면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산다는 사람들의 실상을 먼저 알고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아무리 설명하고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믿으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릇된 것을 믿는 것은 가장 큰 재앙이다.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생각해야 할 명제다.
세상은 사망의 세상이고 그런 세상에 사는 사람은 사망의 존재들이다.
생명이신 하나님은 이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한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세상은 그 자체가 사망이기 때문에 모든 환난과 고통은 사망의 본질이고 속성이다.
이 세상에 사망의 존재로 출생하여 생활하는 사람은 아무도 이 본질적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을 폐하시려고 하나님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사망의 세력을 끝낼 역사적 때가 아니다.
그때까지 불가불 우리는 사망의 세력 아래서 고난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완전히 끝낼 때가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다.
믿음으로 그날을 사모하자.
<부가설명>
여호와 하나님 우리 주님은 종말을 처음부터 보시는 분이시다(사46:10).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눈앞에 종이 한 장만 있어도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내대보실 뿐만 아니라 인도하시는 분이신 주님을 믿는다면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뢰로 더욱 굳게 붙어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욥의 결과가 그렇다. 요셉도 그렇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도들의 결과는 고난과 순교였다.
히브리서가 가르치는 대로 더 나은 본향,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지으신 그나라,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나라를 보는 눈을 예수님께 받았기 때문이다(고후4:17,18)
현재 이 세상은 광야요 지나가는 길이다.
길 안내자는 주님이시다.
그분이 인도하는 그 길이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길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성령님 붙드시는 은총으로 굳게 걸어가도록 하자.
(롬8:28; 빌4:4-13; 야 1:2-4, 12; 고후 12:9, 10.)
예수님을 보다
그래서 시련이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어느때라도 함께하지 않는 것이 위기입니다.
시련을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엘렌 지 화잇은 자신이 알고 인식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나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신다.
나에 생각을 아시고, 나의 죄를 아시고, 나의 감정을 아시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거에요.
내가 처해있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예수님의 자애로운 눈이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계셨고 그분의 미소는 내 영혼을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그분의 임재가 내 마음을 거룩한 경외심과 형용할 수 없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했다.
주님은 처음부터 나를 먼저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시련의 때에 자꾸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조금이라도 끊기거나
사라지면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 시련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단에게 100% 집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호시탐탐 우리가 하나님 곁을 잠시라도 비우기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하나님과 떨어져 있을 때 공격이 들어오죠.
우리는 예수님께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 곁에 있기만 하면 무적이 되죠,
그러나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버립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지켜주기 위해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는 그 자체로 온갖 에너지를 다 얻듯이 우리도 예수님만 바라보는 예수 바라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 바라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절망의 순간, 위험한 상황에서도 먼저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바라봄의 기적은 대단한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예수님을 자꾸 생각하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갖는 것이 시련을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가설명>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 세상에서 생활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는 고난과 멸시의 가시밭길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날을 바라보며 현실을 이기며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성경은 이 세상의 고난에서 눈을 돌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강권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
합력하여 이루는 선은 영생이다.
성경이 약속한 영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상태다.
두려움이 없다. 즐거움과 행복만이 있다.
거기가 영원한 천국 새 하늘, 새 땅의 상태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한다.
요약
인생의 어려운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굳게 의지해야 할 때입니다.
건강 문제, 재정적 어려움, 결혼생활의 붕괴, 가까운 이의 죽음, 또는 기쁨을 앗아가는 무거운 짐과 같은 역경을 직면했을 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하고 기도합시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고후 12:9) 진다는 말씀은 사람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한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기때문에 우리는 삶의 어느 시점에선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어려움에 직면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삶의 역경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돌아볼 때 그런 시련 속에서 우리가 보이는 대응이,
변하지 않으시고(말 3:6) 그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동행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26년 2기 11과 안교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