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일상의 ‘아하! 경험과 진리
평소에 별 관심을 받지 못하던 아이가 어느 날 그냥 심심해서 부엌에 쌓여있는 그릇들을 보고 ‘저것을 깨끗이 해 놓으면 엄마가 덜 힘들겠지?’ 하여 특별한 생각 없이 설거지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받게 된다. 늘 혼자였고 관심 가져주는 이 없이 외로웠던 이 아이는 너무 좋은 나머지 부엌에 그릇이 쌓이기만을 기다린다. 아니 이 아이는 방 청소도 하고 신발장 정리도 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어른들의 칭찬은 늘어나고 아이는 점점 신나고 집안일이 즐겁다. 친구들이 놀러 가자고 해도 아이는 잠시 흔들릴 뿐 나중에 받을 칭찬에 놀고 싶은 욕구를 미련 없이 포기해버린다. 아이의 내면은 지쳐갔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관심과 칭찬이 너무 좋아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집안일을 해간다.
이 아이는 분명 ‘착한 아이’가 맞을까? ‘착한 일’을 강박적으로 내면화시킨 아이일 뿐이다.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에 대해 성공적인 방어전략을 사용한 것뿐이다. 이것은 이 아이의 문제가 아니고 어른들의 문제였다. 어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이는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가는데 여기에서 병리가 발생한다. 이 병리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진리’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은 매우 신사처럼 보인다. 단정한 외모에 산뜻한 느낌의 말투 등 호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매우 이기적이다. 권력자나 매력적인 부자들에게는 매우 싹싹하게 굴면서 자기의 입지를 넓혀간다. 자신을 위해서는 쉽게 거짓말도 하고 남을 이용하거나 공격까지 한다. 이 모든 것이 교묘하게 이루어지기에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조직이나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그래서 대부분 윗사람이나 권력자, 재산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듣는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동료들에겐 매우 사악한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대인관계며 동료와의 관계에서 많은 병리를 드러내는데 어린 시절 비교적 방임된 양육환경에서 내재화된 성격 틀이 성인이 되어 그대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진솔하게 살아가기란 매우 어렵다.
지나친 불안을 내면화하게 되면 특정 행동이 강화되는데 이러한 강박 행동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우리가 진실하게 살아가려면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우리 내면에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내재화하며 살아왔는지를 ‘살펴보고 아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그리스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문구가 말해주고 있고, 프로이드는 ‘자아를 강하게 하라!’고 외쳤으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낳았다.
우리의 삶이 식물처럼 그 씨앗이 품고 있는 존재성 그대로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다면 얼마나 간단한 일일까? 동물처럼 본성적 존재로서 살아간다면 인생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거짓으로 혼란스러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다. 그 이성의 능력은 생물학적으로는 ‘대뇌 피질’에서 나오는 것으로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전두엽에서도 전전두엽’이라는 부위의 뇌 기능에서 인간 존재의 특성이 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전전두엽의 기능은 생물학적으로는 개인 간의 차이가 없지만, 발달상으로는 차이가 작지 않다. 그 차이란, 어린 시절의 환경과 교육 정도에 따라서 개인차가 발생하는데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 사람의 ‘통찰력’이다.
상담실에서 심리치료를 진행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내담자가 성찰을 시작하고 마침내 어떤 통찰에 이르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심리치료에서는 이를 ‘아하!’ 경험이라고 하는데 이 경험을 통해 인간은 ‘통찰력’을 확보해간다. 그런데 ‘아하!’란, 유레카와 직접적인 비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마치 ‘진리의 옷자락을 본 듯한 경험?’, ‘참된 진리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어쨌든 ‘아하!’ 경험은 거짓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참의 경험이다.
이제 우리의 논리는 매우 과학적이다. 결론적으로 참된 하느님, 그분의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아하!’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하!’ 경험은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즉 우리 전두엽의 훈련을 통해 통찰력을 키워나갈 때 가능한 경험이다. 우리가 자기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에 대한 통찰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자기에게 진실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자기를 아는 만큼(생각하는 만큼) 우리는 그만큼만 존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무엇이 형성되어 있고(조건화) 과거의 어떤 영향이 내재화되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 영향을 받으며 강요된 행동이 마치 자신의 참된 욕구인 양 산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신앙도 영성도 그리고 우정이나 사랑도 이런 거짓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거짓은 우리 생활 곳곳에 숨어 있다. 여러 가지 논리와 규범을 내세우는 거짓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 공동체 내에서는 여론이라는 형태로 우리를 속이는 거짓이 있을 수 있고 끼리끼리 감싸주는 형태로 거짓이 존재할 수 있다. 거짓은 보통 자기가 하지 못 하는 일에는 대단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슬쩍 감춘다. 또한, 거짓은 용기없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상대방이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비난하고,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 상대방이 무모하게 행동한다고 비난한다.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없으면서 ‘왜 너는 우리처럼 조용히 따르지 않느냐!’고 비난한다. ‘자기’에서 벗어나 ‘진리’를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새들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운다.’라고 했던가? 나는 이 표현에서 사람들이 자기 연민에 빠져 사느라 진리를 외면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냥 자기 연민에만 빠질 것이지 왜 참되고 진리를 향해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을 끌어내리는가? 꼴을 못 보는 거다. 귀찮다고 안 했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하려고 하면 응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말씀에서는 참된 주님께서, 진리이신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고 노래한다(20,10-13). 단순한 정의 실현이 아니라 ‘수군대는 소리’, ‘고발’로부터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그래서 ‘저를 박해하는 자들’로부터 참된 주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바로 세워주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다.’ 13절에서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며 어떤 경우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나약함과 실수로 인하여 자기 연민에 빠질지라도 악과 결탁하지 말고 견디어 내라고 노래한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10,26)이라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10,28) 그러면서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10,31),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10,30)라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오히려 참된 진리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임을 알려주신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의 진실을 감추며 자신을 속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의 거짓을 감추며 사람들을 속인다. 이렇게 자신을 속이는 일도, 사람들을 속이는 일도 없이 살고자 한다면 윤리적 ‘정직성’만으로는 안 된다. 전두엽의 통찰력 없이는 부지불식간에 누군가를 속일 수 있다. 자신이 거짓으로 살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살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젠가 우리의 삶이 끝난다는 것이다. 돌이킬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으니 지금 나에 대해 참되게 성찰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착한 아이도 아니고 열등감이나 존재적 불안으로 자꾸만 자기를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 행동도 아니다. 그것으로 나를 살릴 수 없다. 사람들의 거짓을 두려워하지 말자. 때로는 버티며 고집스럽게 그분만을 바라보고 가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외로운 법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내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