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시 신체적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행복감"
■ 사냥감 추적하기 위한 인간의 진화
2009년 영국 BBC에서 이른바 한번 정한 사냥감을 '끈질기게 지속되는 사냥(Persistent Hunting)’으로 추적하는 아프리카 한 부족을 취재한 내용의 짧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3명이 사냥에 나섰는데, 큰 영양을 목표물로 정하자 그 중 한 명이 영양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순간 속도에서 사람이 영양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나 사냥꾼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영양의 뒤를 쫓아갔다. 메마른 땅을 가로지르는 8시간 동안의 대추적전 끝에 그 큰 영양은 탈진했고 결국 쓰러졌다. 그러자 거의 반죽음 상태로 숨을 헐떡이는 영양을 향해 사냥꾼은 마치 의식을 치르듯 등짐에서 창을 꺼내들고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직립보행 후 현생 인류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네 다리로 더 빠르게 달리는 사냥감을 잡으려고 적응한 결과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맥두걸이라는 기자는 멕시코의 오지에 숨어 사는 타라우마라족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서라면 풀코스 마라톤 거리를 넘어 160km 이상 되는 거리도 부상 없이 힘들이지 않고 뛴다는 내용을 취재하여 책으로 냈다. 영장류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이 이런 장거리 달리기 능력을 보유한 것은 먼 옛날 조상이 숲을 떠나 사바나로 진출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달아나는 사냥감을 잡기 위한 진화 과정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그의 책 제목대로 인간은 ‘본 투 런’, 즉 달리도록 태어났다는 것이다.
인간 몸이 먼 옛날 생존 방법의 하나로 사냥감을 오래 추적할 수 있도록 장거리 달리기에 알맞게 진화했다는 것은 여러 관련 연구를 통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속도 경쟁에서는 어차피 놀라운 질주 능력을 가진 네 발 가진 동물을 따라잡기가 힘들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사냥감 동물에게는 없는 지구력으로 승부를 내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거리 달리기 능력은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 외에도 거주지에서 먼 거리에 있는 곡물을 수집하는 데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과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류의 이런 변화는 지금으로부터 200만 년 전쯤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인간에게 땀샘이 발달하고 몸에서 털이 없어진 것도 오래달리기를 할 때 열 배출을 용이하게 하려는 방편이라고 한다. 또한 직립보행 자체가 장거리 달리기에 유리할 뿐 아니라, 손에 물을 들고 수분을 보충하면서 뛸 수 있다는 점도 사냥감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점이라는 것이다.
■ 오래 달릴 때 생기는 고통의 극복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장거리 달리기에 유리한 인자를 획득했다 해도 오래달리기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각종 부상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비해서도 인간 몸은 또 하나 기막힌 진화 산물을 만들어냈다. 바로 장거리 달리기로 적정선 이상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가해지면 이를 일시적으로 잊게 만드는 마약 같은 물질이 우리 몸 안에서 자동으로 배출되게끔 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먼 옛날 우리 조상이 사냥감을 추적하다가, 달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중간에 추적을 포기한다면 이는 곧 자신과 가족의 생존문제와 직결됐을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 본연의 생존에 대한 본능이 신체적 변화를 가능하게 했을 수 있다.
이렇게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 본격적으로 고통이 시작될 무렵 체내에서 마약성 물질이 분비되면서 오히려 행복감이나 희열을 느끼는 현상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
러너스 하이를 일으키는 물질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엔도르핀이다. 즉, 장거리달리기를 할 때 우리 뇌에서는 아편 주성분인 모르핀보다 100배 이상 강력한 엔도르핀이라는 마약 성분 같은 물질이 배출되면서 심리적 쾌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단 러너스 하이에 적응된 상태에서 운동을 중단하면 마약을 끊었을 때와 유사한 일종의 금단증상이 나타나 강박적으로 달리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러너스 하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캘리포니아대 심리학자인 아놀드 J 맨델이 1979년 정신과학 논문 ‘세컨드 윈드(Second Wind)’를 발표하면서부터다. 그 뒤 러너스 하이를 경험할 수 있는 운동 시간과 강도, 방법 등에 대한 연구와 행복감의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엔도르핀의 실체에 관해서는 그 후 수십 년간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됐는데, 2008년 독일 과학자들이 첨단 검사 장치인 ‘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PET)’법으로 장거리 달리기 시 뇌에서 엔도르핀이 배출된다는 것을 증명해 과학적으로도 명확히 입증됐다.
■ 강력한 엔도르핀 뇌에서 배출
그러나 엔도르핀과 러너스 하이의 작용 기전을 완전하게 분석한 것은 아니다. 엔도르핀만으로 러너스 하이와 관련한 모든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관련 학자들은 러너스 하이에는 엔도르핀 외에 또 다른 신경화학물질인 도파민, 세로토닌 등이 복합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인간이 오로지 살아남으려고 온갖 진화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낸 수단이 오늘날 건강 달리기에서 그 흔적을 드러낸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과거 우리 조상은 먹고살기 위한 절실한 목적으로 고통을 참으며 뛰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뛰는 목적 자체가 다르지 않는가.
■ 러너스하이는 언제 느낄 수 있나?
러너스하이를 이야기할 때 주로 달리기를 예로 들지만 수영, 사이클, 야구, 럭비, 축구, 스키 등 장시간 지속되는 운동이라면 어떤 운동이든 러너스하이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마라톤 선수들이 훈련을 할 때 극한의 고통을 넘어 35km 지점쯤 되면 러너스하이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 1분에 120회 이상의 심장박동수로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러너스 하이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엔도르핀은 산소를 이용하는 유산소 상황에서는 별 증가를 보이지 않다가 운동 강도가 높아져 산소가 줄어드는 무산소 상태가 되면 급증하게 된다. 또한 인체가 고통을 겪거나,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아 기분이 나쁠 때 분비된다고도 알려져 있다.
■ 사점(死點)의 극복과 세컨드 윈드(Second Wind)
여기까지 이해하신 분들은 러너스 하이를 느끼는 시점이 등산이론에서 언급하는 사점과 그 이후의 세컨드 윈드 상태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데드포인트, 사점의 사전적 의미는 '몸에서 필요로 하는 산소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상태로 죽을 고비에 다다르는 순간'이다. 풀코스 마라톤에서는 2Km, 8Km, 20Km 지점을 데드포인트로 지적하고, 산행에서는 보통 30분에서 1시간 이내에 1차 데드포인트를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드포인트에 다다르면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고, 온몸의 근육이 통증을 호소해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을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등산교본에서는 데드포인트에 이르렀을 때 배낭을 내려놓고 오랫동안 휴식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1분 정도는 잠시 쉬어도 좋지만 그 이상 널브러져버리면 몸이 다시 활동 모드로 들어가기 힘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데드포인트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극복하지 못한 채 다시금 겪는 고통은 처음보다 더 큰 타격을 입히기 마련이다.
운동생리학에서는 데드포인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보폭을 줄여 속도를 낮추고 진행을 계속하는 것을 권장한다. 그러다보면 호르몬의 분비와 더불어 혈액 순환이 조절되면서 신체가 활동모드로 바뀌어 자연스럽게 몸이 평정을 되찾는다고 한다.
데드포인트를 잘 넘기면 통증이나 피로가 사라지면서 다시 편안한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 운동 생리학에서는 이를 세컨드 윈드라고 부른다.
세컨드 윈드는 격렬한 운동에 대해서 모든 신체기능이 동원되어 새로 평형 상태가 성립된 시기와 일치한다고 생각되며, 활동근(活動筋)의 온도 상승이 근(筋) 활동의 화학 과정을 원활하게 하고, 말초피부혈(末梢皮膚血)의 혈행(血行)을 좋게 하여 발한(發汗)을 촉진하고 체온 방산을 돕는다. 또한 심장에 돌아가는 정맥 혈량이 증가함으로써 베인브리지(Bainbridge)의 반사에 의해서 심장 박동력을 증강시켜 혈액의 산•염기 평형의 실조(失調)를 주요 원인으로 한 호흡 곤란도 점차 해소된다.
이외에 신체 활동에 적응하도록 각종 내분비선과 기타 장기의 작용이 조정되는 것도 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돕는다고 생각된다. 격렬한 경기에서는 빨리 세컨드 윈드가 나타나도록 해서 편하게 운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을 터득하는 것이 경기의 가장 중요한 비결로 되어 있다.
■ 왜 등산을 하는가?
산이 거기 있으니까, 그냥 산에 오르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다이어트나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 건강관리를 위해서, 정상의 경치를 즐기는 것, 하산의 상쾌함을 즐기는 것, 체력을 소모한 뒤 산에서 먹는 식사의 참맛를 즐기는 것, 저렴하게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등, 수많은 목적(?)을 가지고 등산을 시작한다.
농경문화가 정착된 것은 이제 겨우 일만년에 불과하고, 그 이전 몇 백만년 동안에 걸쳐 인류는 사바나를 누비며 그날 그날 먹을거리를 사냥하던 삶이 DNA에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등산활동이 익숙해지면, 오래, 멀리 가고싶은 본능이 잠재의식 속에서 해제되어 시간만 나면 사냥하러 산으로 향하거나 종주산행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분들도 더러 나타난다.
또한 점차 산행의 강도를 높여가다보면, 산행 시작 후 1차 사점을 극복하고 산행 거리와 시간을 늘리면서 몸에 고통(?)을 주면 엔돌핀이 지속적으로 분비되어 일명 산뽕에 취하는 맛을 알게된다. 이 맛 때문에 산에 가고 또 가게된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다. 고강도 운동 시 러너스 하이가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하지만, 부상에 따른 고통 자체를 치료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 몸이 느끼는 고통은 더는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신체 경고 사인이다. 그런데 자칫 러너스 하이로 인한 고통 망각으로 더 큰 부상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사흘이 멀다하고 무리하게 산행을 계속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