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복자] 강완숙 골룸바 (2) 여장부 중의 여장부
신앙인으로서, 여성회장으로서 참 모범을 보여주던 강완숙(골룸바)는 박해를 마주하자 그의
여장부다운 모습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1795년 을묘박해(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사건을
계기로 야기된 박해)가 일어났으며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도 박해의 두려움에 떨던 그 시기에,
강 골룸바 회장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정성껏 모십니다. 처음에는 함께 사는
시어머니와 아들도 모르게 자신의 집 광에 신부님을 모시다가, 얼마 후 시어머니와 아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무려 6년간을 모십니다.
주문모 신부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져 있는 중에도, 강 골룸바 회장은 신부님께서 신자들도 만나고
성사도 집전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합니다. 또한, 신앙 공동체가 성장하도록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교회 공동체와 성직자를 지켜냅니다. 그녀는 공동체와 신부님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는데,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던 당시 조선 사회의 풍습을 활용합니다.
이때 강 골룸바 회장은 불행한 여성들, 미혼 여성들, 특히 동정을 추구하며 천주님께 봉헌된 삶을 원하는
이들을 자기 집에 모아 함께 기도하며 지냅니다. 그 대표적인 동정녀가 윤점혜(아가타, 2014년 시복)입니다.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 최초 수도원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주문모 신부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후 집을 지키다가 함께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됩니다. 박해자들은 강 골룸바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 골룸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순교의 길로 나아갑니다. 그녀는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도 포졸들이 지칠 때까지 교리를 설명하였고, 그녀의 이러한 모습을 본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여인이다”라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강 골룸바의 순교 상황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강완숙은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기쁨에 넘친 얼굴을 하고는 흥겨운 목소리로 기도하였고,
사형을 당하는 순간이 오자 사형 집행관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법대로 하자면 마땅히 옷을 벗고 형을
받아야 하겠지만, 저희는 부녀자들이니 부디 당관께 속히 아뢰어 저희가 옷을 입고 죽을 수 있게 해주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허락을 받고 동료들과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 목을
내밀어 형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삶과 신앙과 순교 앞에서 제 삶을 돌아보며 옷깃을 여며봅니다.
[2014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