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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 독서회]

<나귀 가죽>을 읽고...

작성자정병진|작성시간15.03.19|조회수302 목록 댓글 5

미정 쌤께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급작스럽게 서울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처자식도 부산에 아직 있는 상태로 말이죠.

 

ytn아나운서로 급히 일하게 됐어요. 그래서 인사도 채 못드리고 상경했습니다.

 

벌써 그립고 아쉽습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이 밤마다 몰래 찾았던

황금기 프랑스의 살롱 같았던 우리 눌 독서회에 애착이 컸거든요.

 

멀리서나마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발제문?도 아닌 감상문 같은 걸 끄적여봅니다.

 

다시 만날 날이 오겠죠? ^_^ 저도 계속 책 읽을게요~~ 

 

 

----나귀 가죽을 읽고.

 

나는 주식 관련 자격증을 2개 갖고 있다. 증권투자상담사, 펀드투자상담사 자격증이다. 자격증을 딴 건 경제 방송 앵커 시절 증권에 흥미를 갖게 된 까닭도 있지만 더 큰 동기는 따로 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남부끄러운 얘기지만 아버지께서는 한전에서 풍성하게 벌어들인 몇 년치 연봉을 주식으로 사위어버리셨다. 스톡옵션으로 한전 주식을 싸게 매수하셨는데 그게 불어나 재미를 본 게 '독이 든 성배'가 됐다. 아버지처럼 주식 관련 책 한 권 제대로 숙독하지 않고 '묻지마 투자'를 감행한 아버지 직장 동료가 부지기수다. 탐욕을 키울수록 원금은 줄어들었고 부모님의 부부싸움 횟수는 늘어났다. 도대체 주식이 무엇이길래 저럴까 싶어 답답했다. 그래서 자격증까지 따면서 공부한 것이다.


상황은 다르지만 '욕망할수록 크기가 줄어든다'는 주식의 속성은 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 속 나귀 가죽과 닮았다. 주인공 라파엘은 '빛과 어둠, 존재와 무가 은혜로움과 공포스러움을 동시에 자아내는(35p.)' 상태로 한 골동품점에 들른다. 박사급 지식과 출중한 운동 신경을 갖춘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죽음을 갈망하는데, 골동품 주인은 그에게 나귀 가죽 하나를 보여준다. 가죽에는 아랍어 글귀가 적혀 있다.

 

70p.

만일 그대가 나를 소유하면 그대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그대의 목숨은 나에게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신이 그렇게 원하셨느니라. 원하라, 그러면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소망은 그대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대의 목숨이 여기 들어 있다. 매번 그대가 원할 때마다 나도 줄어들고 그대의 살날도 줄어들 것이다. 나를 가지길 원하는가? 가져라. 신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아멘!

 

라파엘은 이 정체 모를 힘이 제안하는 치명적인 계약을 받아들인다.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주식이라는 치명적인 계약을 체결하셨다. 라파엘은 점점 부자가 되고 힘을 얻었지만 점차 생명을 잃어갔다. 우리 아버지는 원금도 잃고 당뇨가 심해지셨다. 두 사람 다 근본적으로 탐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게 화근이었다. 라파엘에게 나귀 가죽을 판 골동품상 주인은 "여기에는 당신들의 사회적 이념, 당신들의 멈출 줄 모르는 욕망, 당신들의 무절제, 죽음을 부르는 당신들의 쾌락, 삶을 과도하게 압박하는 당신들의 고통이 들어 있네. 악이란 어쩌면 격렬한 쾌락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74p.)"라고 일갈한다. 치가 떨릴 정도로 맞는 말이다.

 

발자크가 사랑의 욕구를 입체적으로 그려낸 건 흥미롭다. 라파엘은 가난한 시절 공작부인 페도라에게 심취한다. 그녀의 방에 잠입해 잠자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그녀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욕망한다. 사랑과 욕정은 뒤섞인다. 그래서인지 라파엘은 페도라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한다. 폴린 캐릭터도 입체적이다. 라파엘에게 폴린은 욕망 그 자체다.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아주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나긋나긋한 허리와 온몸이 발산하는 매력이 소박한 옷 아래로 드러났지. '당나귀 가죽'의 여주인공처럼 그녀는 허름한 신발 속에 예쁜 발을 감추고 있었다네(173p.)" 연약한 여인숙집 딸 같았던 폴린은 훗날 부자가 된다. 폴린은 라파엘을 찾아가 사랑의 물꼬를 트고 라파엘이 그녀의 젖꼭지를 깨문 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곁을 지킨다. 폴린에 투영된 발자크의 사랑은 순수, 모성애, 섹스, 열정, 충성 등 입체적이다.  ​


우리 아버지와 발자크의 라파엘은 결말이 달랐다. 우리 아버지는 주식을 끊으셨다. 물론 1금융권에서 더 이상 신용대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점점 건강해지셨다. 하지만 라파엘의 목숨은 나귀 가죽에 계속 저당잡혀 있었고 끝내 그는 단명했다. 수학자와 물리학자, 온갖 기술자들을 동원해 가죽을 늘려보려고 애쓰지만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만약 주식을 끊지 않으셨더라면 우리 집안은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가득찼을 것이다. 결국 애초에 손을 안 대는 게 정답인 듯 하다. 아버지는 주식에 손 대지 말았어야 했고 라파엘은 나귀 가죽을 받아들지 않았어야 했다. 물론 정말 그랬다면 이 소설이 나오지 않았을거다. 책을 덮으면서 '욕망과 탐욕에 계속 넘어지는 게 인간이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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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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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goodhope | 작성시간 15.03.19 병진씨.. 당신은 나귀인가요
    가죽인가요?
  • 작성자goodhope | 작성시간 15.03.19 아~ 나귀가죽인가요?
  • 작성자정병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3.19 음.. 제 자신이 나귀가죽이냐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라파엘이 나귀가죽을 취한 것처럼 나귀가죽과 비등한 무언가를 소지하고 있냐는 말씀인가용? ^^; 그날 모임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 ㅎㅎ
  • 작성자반더루 | 작성시간 15.03.20 감상문, 재미있습니다. 가죽이 아니라 가족이 부산에 계시니 주말인 금요일 저녁에 참석하실 수도 있겠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구설희 | 작성시간 15.03.20 글이 실제 경험과 어우러져 그런지 재미있어요. 발제문 올리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재밌습니당.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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