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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오늘

Re: 노천명

작성자채광수|작성시간26.06.16|조회수2 목록 댓글 0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 노천명(盧天命, 1911~1957)의 생애를 요약한다.

 

노천명은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극예술연구회 활동을 거쳐, 1938년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에 고독과 애수를 담은 대표작 ‘사슴’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시인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의 언론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며 지적이고 역량 있는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문인협회 등에 가입하여 일제의 전쟁 동원을 찬양하는 친일 시와 글을 기고하였고, 이로 인해 해부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해방 후 6·25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해 부역죄로 복역하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출소 후에도 가난과 고독, 뇌출혈 등의 병마에 시달리다 4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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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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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속의 고독한 사슴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이 짧은 시는 젊은 날의 치열했던 계절을 지나보내고 홀로 고요히 사색하는 황혼의 자화상으로 깊게 다가온다.

 

사슴의 우아하면서도 애달픈 '길고 슬픈 목'은 평생 삶의 무게를 견뎌내며 머나먼 세월을 걸어온 노년의 흔적과도 같다. 세상의 온갖 풍파와 희로애락을 이미 다 겪어냈기에 웬만한 일에는 요란하게 반응하지 않고, 그저 허허롭게 웃으며 묵묵히 내면으로 삭여내는 침묵의 지혜가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다'는 구절 속에 고스란히 배어난다. 또한 사슴의 머리 위에 얹어진 향기로운 '관'은 노인에게 있어 눈부시게 흘러간 세월의 훈장이자, 청고한 품격을 드러내는 서리 맞은 백발을 연상시킨다. 평생을 성실하고 고결하게 살아왔다는 자부심과 정신적인 존엄함이, 육체의 쇠락 속에서도 여전히 향기로운 품위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른 아침, 잔잔한 물가에 서서 가만히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주름진 얼굴 속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깊은 자아 성찰의 시간으로 치환된다. 투명한 물속 자화상을 바라보며 노인은 '잃었던 전설', 즉 푸르렀던 청춘의 날들과 뜨겁게 열정을 불태웠던 순간들을 아련하게 반추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옛날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향수'가 밀려올 때도 노인은 결코 서두르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해 저무는 '먼 데 산'을 바라볼 뿐이다. 여기서 먼 데 산을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는, 삶의 덧없음과 쓸쓸함마저 멋으로 승화시키며 다가올 영원한 평화를 초연하게 마주하는 노년의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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