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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오늘

Re:이 색

작성자채광수|작성시간26.06.18|조회수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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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생애를 요약한다.

 

이색(李穡)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로, 원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후 귀국하여 정당문학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을 맡아 사장(詞章) 중심이던 유학을 성리학 중심으로 개편하며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 수많은 신진사대부를 길러냈다.

 

공민왕 사후에는 창왕을 옹립하는 등 고려 왕실을 지키려 노력했으나, 이성계 중심의 신흥 무인 세력과 역성혁명파의 성장에 밀려 정치적 입지를 잃어갔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는 태조 이성계의 출사 권유를 거절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고, 결국 1396년 여강(현재의 여주)으로 가던 중 급서하며 생애를 마감했다.

 

 

태조 이성계는 이색을 단순한 정치적 라이벌로만 보지 않았다. 비록 고려 왕조의 존폐를 두고 종착지(역성혁명 vs 온건개혁)는 전혀 달랐지만, 이성계는 이색이 가진 당대 최고 석학으로서의 권위와 학문적 업적을 깊이 존경했고, 새로운 나라(조선)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그가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이성계가 이색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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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온건파 사대부의 수장이자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이색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색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판삼사사(判三司事) 등 조정의 최고 관직에 앉히며 정중히 예우했다. 이성계는 급격한 변화에 따른 정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이색의 학문적 명성과 정치적 무게감을 빌리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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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관계는 세자 옹립 문제와 토지 개혁(과전법)을 거치며 급격히 악화된다. 이색이 이성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창왕을 옹립하고 명나라를 다녀오는 등 고려 왕실을 지키려 하자, 이성계 측의 혁명파(정도전, 조준 등)는 이색을 격렬하게 탄핵했다. 이로 인해 이색은 장단, 함창(상주), 한양 등으로 수차례 유배와 압송을 반복당했다.

 

흥미로운 점은 정도전 등 신진 세력이 이색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마다, 이성계는 과거의 정(情)과 그의 명망을 고려하여 유배 선에서 그치도록 목숨을 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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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이성계는 이색을 향해 파격적인 유화책을 펼쳤다.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선비들의 민심을 모으기 위해서는 '고려 유학의 거두'인 이색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이색의 죄를 사면하고 그를 '한산백(韓山伯)'이라는 높은 작위에 임명하며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성계는 이색을 궁으로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며 "과거의 묵은 감정은 씻어버리고, 나를 도와 새 나라를 이끌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이색의 아들들이 고려 말에 유배를 가거나 고초를 겪었음에도, 조선 조정에서 다시 관직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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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를 지킨 스승, 끝까지 예를 갖춘 제왕"

 

이색은 이성계의 거듭된 출사 권유에 "고려의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결국 거절하고 재야에 남았다. 이성계는 자신을 끝내 '주군'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색에게 분노하기보다, 그의 대쪽 같은 충절을 인정하고 말년까지 음으로 양으로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비록 정치적 노선은 피할 수 없는 평행선이었지만, 이성계는 이색을 무력이 아닌 '끝까지 예(禮)로서 대우해야 할 거목'으로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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