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다시 만난 계절》 EP8 〈빈자리〉
ACT 1. 셋째 날
S#1. 장례식장 빈소 / 이른 아침
이른 아침.
빈소 안은 어제보다 훨씬 조용하다.
밤새 타들어간 향.
시들기 시작한 국화꽃.
영정사진 속 우진의 아버지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다.
우진은 상복 차림으로 빈소 한쪽에 앉아 있다.
눈은 충혈되어 있다.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한 얼굴.
예빈이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먼저 영정사진을 향해 고개 숙인다.
그리고 우진에게 다가온다.
예빈 : “왔어요.”
우진 : “응.”
짧은 대화.
하지만 이제 어색하지 않다.
예빈은 우진 옆에 앉는다.
예빈 : “잠 좀 잤어요?”
우진 : “조금.”
예빈 : “거짓말.”
우진이 희미하게 웃는다.
예빈 : “아침은요?”
우진 : “먹었어.”
예빈 : “뭐 먹었는데요?”
우진은 대답하지 못한다.
예빈 : “봐. 또 거짓말.”
우진 : “나중에 먹을게.”
예빈은 가방에서 따뜻한 두유 하나를 꺼낸다.
예빈 : “이거라도 마셔요.”
우진 : “괜찮은데.”
예빈 : “괜찮치 않음.”
우진은 잠시 예빈을 본다.
그리고 두유를 받아든다.
그 순간, 우진의 시선이 영정사진으로 향한다.
아버지의 편지 문장이 떠오른다.
“혼자 버티지 마라.”
우진은 예빈을 본다.
예빈은 국화꽃 하나를 조심스럽게 바로 세우고 있다.
우진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스친다.
S#2. 장례식장 복도 / 아침
복도에 발인 준비를 알리는 직원들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장례지도사가 빈소 입구에 선다.
장례지도사 : “상주님.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우진의 손이 멈춘다.
두유 캔을 잡은 손끝이 살짝 떨린다.
예빈이 그 손을 본다.
예빈 : “오빠.”
우진 : “응.”
예빈 : “천천히 해도 돼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영정사진을 본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병실에서 웃던 사람.
정원에서 햇살을 보며 “좋다”고 말하던 사람.
그 사람이 이제 사진 속에만 있다.
우진은 천천히 일어난다.
S#3. 발인식장 / 오전
조용한 음악.
관이 놓여 있다.
우진은 그 앞에 선다.
예빈과 예빈 부모도 조금 뒤에 서 있다.
예빈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누른다.
예빈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장례지도사의 안내가 이어진다.
우진이 마지막 인사를 위해 앞으로 나선다.
발걸음이 무겁다.
관 앞에 선다.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우진 : “아버지.”
목소리가 갈라진다.
우진 : “좋은 곳에 가세요.”
잠시.
우진 : “저… 약속 지킬게요.”
예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우진은 고개를 숙인다.
관이 천천히 움직인다.
우진은 그 뒤를 따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점점 멀어지는 아버지.
이별이 현실이 된다.
S#4. 장지 / 오후
겨울 바람.
하늘은 이상하게 맑다.
우진은 말이 없다.
예빈이 곁에 서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안다.
우진은 눈을 감는다.
아버지의 편지 마지막 문장이 떠오른다.
“행복해라.”
우진 : “약속 지킬게요.”
작은 목소리.
바람이 분다.
마치 대답처럼.
우진은 고개를 든다.
멀리 하늘을 본다.
ACT 2. 돌아갈 곳
S#5. 장례식장 주차장 / 오후
발인이 모두 끝났다.
친척들, 지인들이 하나둘 떠난다.
며칠 동안 북적이던 장례식장이 빠르게 비어간다.
친척 : “고생했다. 몸 챙겨라.”
우진 : “네.”
친척 : “혼자 있어도 밥은 꼭 먹고.”
우진 : “네.”
말은 대답하지만 마음에는 닿지 않는다.
예빈 부모가 다가온다.
예빈 어머니 : “집에 가면 꼭 뭐라도 먹어요.”
우진 : “네. 감사합니다.”
예빈 아버지 : “아버님 좋은 분이셨습니다.”
우진은 고개를 숙인다.
예빈 아버지 : “그리고 우진 씨도 좋은 아들이었고요.”
우진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예빈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본다.
예빈 : “집 도착하면 연락해요.”
우진 : “응.”
예빈 : “꼭.”
우진 : “알았어.”
예빈은 아쉬운 듯 뒤돌아보지만, 부모와 함께 먼저 떠난다.
주차장에 우진 혼자 남는다.
바람이 분다.
이상하게 모든 소리가 멀어진다.
택시 한 대가 선다.
기사 : “어디로 가세요?”
우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잠시 후.
우진 : “집이요.”
그 말이 낯설다.
이제 그 집에는 아버지가 없다.
S#6. 택시 안 / 오후
택시가 출발한다.
창밖으로 평범한 거리가 흐른다.
사람들은 웃고, 걸어가고, 버스를 기다린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움직인다.
우진은 창밖을 본다.
우진 : “이상하네요.”
기사 : “네?”
우진은 대답하지 않는다.
눈가가 붉어진다.
우진 :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아서.”
기사는 룸미러로 우진을 슬쩍 한 번 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 오히려 배려 같다.
우진은 주머니 속 편지를 만진다.
아버지의 편지.
마지막으로 남은 목소리.
S#7. 옥탑방 앞 골목 / 저녁
익숙한 골목.
우진이 천천히 걸어온다.
검은 상복.
검은 넥타이.
평소 같으면 병원으로 향했을 시간.
하지만 오늘은 집으로 간다.
혼자.
옥탑방 계단 앞에서 멈춘다.
계단을 올려다본다.
너무 익숙한 곳인데, 오늘은 낯설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발걸음이 무겁다.
문 앞에 선다.
열쇠를 꺼낸다.
손이 떨린다.
“딸칵.”
문이 열린다.
S#8. 옥탑방 / 저녁
불 꺼진 방.
고요하다.
너무 고요하다.
우진은 문턱에서 한참 움직이지 못한다.
방 안의 모든 것이 그대로다.
책상.
수험서.
달력.
전기포트.
아버지 슬리퍼.
아버지 안경.
먹다 남은 약봉지.
읽다 만 신문.
병원 서류.
아버지 사진.
모든 것이 그대로다.
그런데 아버지만 없다.
우진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선다.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다.
벽에 손을 뻗어 불을 켠다.
“딸칵.”
작은 방이 환해진다.
우진의 시선이 슬리퍼에 멈춘다.
아버지 슬리퍼.
금방이라도 신고 나와서 “왔냐?” 할 것 같다.
우진은 슬리퍼 앞에 쪼그려 앉는다.
손끝으로 슬리퍼를 만진다.
차갑다.
우진 : “다녀왔어요.”
정적.
냉장고 소리만 들린다.
우진은 기다린다.
습관처럼.
“왔냐.”
“밥 먹었냐.”
“늦었네.”
그 한마디를.
하지만 아무 대답도 없다.
우진의 입술이 떨린다.
우진 : “아버지.”
결국 무너진다.
바닥에 주저앉는다.
며칠 동안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온다.
우진 : “아버지…”
좁은 옥탑방 안에 우진의 울음만 남는다.
휴대폰 진동.
우진은 눈물 속에서 휴대폰을 본다.
‘한예빈’
≪집 도착했어요?≫
우진은 한참 화면을 바라본다.
답장.
≪응≫
곧바로 답장.
≪혼자 울고 있죠?≫
우진이 피식 웃는다.
눈물 속에서.
답장.
≪어떻게 알았어≫
예빈 답장.
≪다 앎≫
잠시 후.
≪혼자 안 버티기≫
우진은 화면을 오래 본다.
아버지의 편지.
예빈의 문자.
같은 말.
≪혼자 안 버티기≫
우진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다.
처음으로 조금 숨을 쉰다.
ACT 3. 첫 밥
S#9. 옥탑방 / 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하다.
우진은 한동안 바닥에 앉아 있다가 겨우 일어난다.
상복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둔다.
검은 넥타이를 풀다 멈춘다.
손끝이 떨린다.
그동안 상주로 버틴 시간.
이제 끝났다.
그런데 끝났다는 사실이 더 무섭다.
배에서 작은 소리가 난다.
우진은 무심코 배를 누른다.
배는 고프다.
하지만 먹고 싶지 않다.
냉장고 앞에 선다.
문을 연다.
차가운 공기.
반찬통 몇 개.
김치.
멸치볶음.
작은 냄비 하나.
우진의 시선이 멈춘다.
된장국.
병원에 입원하기 전, 아버지가 끓여 놓은 국이다.
뚜껑을 연다.
익숙한 냄새.
순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S#10. 아버지 (회상)
“공부한다고 끼니 거르지 마라.”
우진은 눈을 감는다.
냄비를 다시 덮는다.
하지만 결국 국을 데운다.
가스레인지 불이 켜진다.
작은 냄비가 끓기 시작한다.
‘보글보글.’
그 소리조차 아프다.
밥을 푼다.
식탁에 앉는다.
습관처럼 수저통을 연다.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하나.
그리고.
다시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하나.
두 사람 몫.
우진의 손이 멈춘다.
자신이 뭘 했는지 깨닫는다.
천천히 수저 한 벌을 다시 넣는다.
“달그락.”
작은 소리.
하지만 이상하게 크게 들린다.
식탁 위에는 한 사람 몫만 남는다.
우진은 밥 한 숟갈을 뜬다.
입에 넣는다.
삼키지 못한다.
고개를 숙인다.
눈물이 밥 위로 떨어진다.
우진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먹지 못한다.
S#11. 옥탑방 / 깊은 밤
새벽 2시.
우진은 잠들지 못한다.
천장만 바라본다.
밖에서는 멀리 오토바이 소리.
냉장고 소리.
시계 초침 소리.
모든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우진 : “아버지.”
정적.
대답은 없다.
그 사실이 다시 아프다.
우진은 휴대폰을 든다.
사진첩을 연다.
병원 사진.
정원 산책 사진.
몰래 찍은 사진.
예빈과 아버지가 함께 웃고 있는 사진.
우진의 손가락이 멈춘다.
사진 속 아버지는 정말 행복해 보인다.
우진은 미소 짓는다.
그리고 곧 눈물이 고인다.
우진 : “좋으셨어요?”
사진 속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는다.
우진 : “그날… 진짜 좋으셨어요?”
정적.
사진 속 아버지와의 대화는 우진을 더욱 마음 아프게 한다.
우진은 휴대폰을 가슴에 안는다.
S#12 회상 / 비 오는 날
어린 우진.
초등학생.
비 오는 골목길.
아버지가 우산을 씌워준다.
어린 우진은 앞서 뛰려 한다.
아버지 : “뛰지 마. 넘어진다.”
어린 우진 : “늦어요!”
아버지 : “늦어도 같이 가야지.”
어린 우진이 멈춘다.
아버지가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감싼다.
아버지 : “비 올 땐 혼자 뛰는 거 아니다.”
S#13. 옥탑방 / 현재
우진 눈을 뜬다.
눈물이 흘러 있다.
그제야 깨닫는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그 사랑이 사라진 게 아니라, 남겨졌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아프다.
너무 아프다.
우진 :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컸었는지 새삼 느낀다.
그리고 그 빈 자리가 마음 한켠에 자리 한다.
ACT 4. 독서실
S#14. 독서실 / 다음 날 오전
우진이 독서실 문 앞에 선다.
며칠 만이다.
익숙한 간판.
익숙한 문.
하지만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관리인이 우진을 발견한다.
관리인 : “왔네.”
우진 : “네.”
관리인은 조심스럽게 말한다.
관리인 : “고생 많았다.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을테니 마음 잘 정리하게.”
우진 : “감사합니다.”
관리인 : “오늘은 그냥 앉아만 있어도 된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우진은 고개를 숙인다.
독서실 안으로 들어간다.
늘 앉던 자리.
책상 위에는 예전 그대로 놓인 책들이 있다.
헌법.
민법.
행정법.
판례집
아버지가 사 준 스탠드.
아버지가 장난처럼 붙여 둔 작은 메모.
≪우리 아들 합격≫
우진의 손이 멈춘다.
책을 펼친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줄을 읽는다.
다시 읽는다.
또 읽는다.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버지 목소리만 들린다.
아버지 (V.O.)
“끝까지 해라.”
우진은 눈을 감는다.
숨이 막힌다.
책을 덮는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밖으로 나온다.
관리인이 묻지 않는다.
알기 때문이다.
우진은 독서실 밖으로 나와 벽에 기대선다.
처음으로 생각한다.
“포기하고 싶다.
정말로.”
ACT 5. 예빈
S#15. 예빈 집 / 저녁
예빈 어머니가 죽을 보온통에 담고 있다.
예빈은 옆에서 가방을 챙긴다.
예빈 : “제가 가져다줄게요.”
예빈 어머니 :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더라.”
예빈 : “네.”
예빈 어머니 : “많이 힘들 거야.”
예빈 : “알아요.”
예빈 어머니가 딸 예빈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예빈 어머니 : “모르지.”
예빈이 멈춘다.
예빈 어머니 : “당사자의 슬픔은 아무도 다 몰라.”
정적.
예빈 어머니 : “그래도 옆에 있어줘라.”
예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예빈 : ”네.“
S#16. 옥탑방 앞 / 저녁
초인종 소리.
우진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예빈이 양손 가득 장바구니와 보온병을 들고 서 있었다.
붉어진 코끝. 걱정 가득한 눈.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우진 마음 어딘가가 조용히 무너졌다.
예빈 : ”밥 먹었어요?“
우진 : ”응.“
예빈 : ”거짓말.“
예빈 : “밥 안 먹었죠.”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빈 : “들어가도 돼요?”
우진 : “응. 들어와. 너무 지저분해서 미안하다.”
예빈이 들어온다.
예빈은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예빈은 자연스럽게 방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널브러진 책을 쌓고, 빈 컵을 치우고, 창문도 조금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익숙한 사람처럼 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진은 잠시 망설인다.
방 안이 너무 엉망이다.
상복도 그대로.
수저도 그대로.
울다 만 흔적도 그대로.
하지만 이번에는 숨기지 않는다.
우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다.
힘든 사람 곁에 이렇게 오래 남아 있는 사람.
보통은 부담스럽고 지쳐서 도망가기 마련인데.
한예빈은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예빈은 냉장고를 열었다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예빈 가슴이 또 아파왔다.
예빈 : “오빠 오늘 아무 것도 안먹었네.”
우진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애뜻함이 뭍어 난다.
예빈 : ”얼굴 보면 알아요.“
예빈은 보온통을 내민다.
예빈 : ”엄마가 죽 끓여주셨어요.“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예빈 : ”조금이라도 먹어요.“
정적.
우진 : ”고맙다.”
잠시 후.
우진 : “어머니께도 고맙다고 전해줘.”
예빈 : “직접 전해요. 나중에.”
우진은 희미하게 웃는다.
예빈 : “라면 끓일게요. 엄마가 만들어 준 죽도 데우고”
예빈은 아주 자연스럽게 냄비를 올렸다.
물 끓는 소리가 작은 방 안을 채웠다.
우진은 멍하니 그 뒷모습만 바라봤다.
좁은 옥탑방.
차가운 겨울 공기.
그리고 그 안에서 혼자 움직이는 한예빈.
이상하게 그 풍경이 너무 따뜻했다.
우진은 의자에 앉는다.
예빈이 죽을 그릇에 담아준다.
예빈 : “뜨거워요.”
우진 : “응.”
잠시 뒤.
예빈은 라면 그릇과 죽 그릇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예빈 : “먹어요.”
우진은 숫가락을 들지 못했다.
하지만 예빈의 정성을 생각하며 우진은 한 숟갈 뜬다.
입에 넣는다.
삼킨다.
며칠 만의 제대로 된 식사.
예빈은 안도한다.
예빈 : “잘 먹네.”
우진 : “맛있다.”
예빈 : “엄마가 들으면 좋아하겠다.”
정적.
예빈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예빈 : “아저씨가… 아니, 아버님이.”
우진이 예빈을 본다.
예빈 : “오빠 자랑 많이 했어요.”
우진의 손이 멈춘다.
예빈 : “공부 잘한다고.”
잠시.
예빈 : “그리고 착하다고.”
우진의 눈가가 붉어진다.
우진 : “아버지가 괜한 말씀을 하셨네.”
예빈 : “끝까지 해낼 거라고.”
우진 : “그 약속은 꼭 지킬거야”.
우진은 고개를 숙인다.
눈물이 죽 그릇에 떨어진다.
예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휴지를 건네지도 않는다.
울지 말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옆에 앉아 있다.
그게 지금은 가장 큰 위로다.
S#17. 옥탑방 / 계속
우진 : “나…”
한참 뒤.
우진 : “오늘 독서실 갔었는데.”
예빈 반가운 표정으로
예빈 : “네.”
우진 : “공부 안되더라.”
예빈 : “그럴 수 있어요. 아니 하루만에 아버님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으면 오빠가 아니지.”
우진 : “아버지한테 약속했는데.”
예빈 : “약속은 오늘 당장 지키야 하는게 아니잖아.”
우진이 예빈을 본다.
예빈 : “오늘은 무너져도 돼.”
정적.
예빈 : “내일 또 일어나면 되니까. 오빠와 나에겐 내일이라는 훌륭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우진은 아무 말 못 한다.
다시 한 숟갈 먹는다.
예빈이 조용히 웃는다.
우진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우진 : “…왜 이렇게 잘해주냐.”
예빈 : “오빠니까.”
예빈 손이 잠시 멈췄다.
우진은 시선을 내린 채 중얼거렸다.
우진 : “나 지금 별로 좋은 사람도 아닌데.”
지쳐 있고,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
요즘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예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우진 앞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예빈 : “오빠.”
우진은 고개를 들었다.
예빈 눈은 아주 진지했다.
예빈 : “나는 오빠 힘들 때 옆에 있고 싶어.”
그 순간 우진 숨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예빈은 말을 이었다.
예빈 : “좋을 때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눈가가 천천히 붉어졌다.
예빈 : “힘들 때도 같이 있는 게 사랑이지.”
그 말은 너무 곧고 진심이라서, 우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진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실 그는 무서웠다.
지금 자기 모습까지 보여주면 언젠가 예빈도 지쳐 떠날까 봐.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가까이 와 있었다.
예빈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예빈 : “오빠.”
우진 : “응….”
예빈 : “다시 공부하자.”
우진 눈이 천천히 흔들렸다.
예빈은 억지로 웃었다.
예빈 : “고시 붙어야지.”
그 말에 우진 가슴 깊숙이 무언가 울렸다.
‘고시.’
한동안 잊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붙어야 했던 꿈.
그리고 이제는, 예빈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꼭 이루고 싶은 미래.
우진은 한참 침묵하다 아주 낮게 물었다.
우진 : “…할 수 있을까.”
예빈은 망설이지 않았다.
예빈 : “할 수 있어.”
짧은 대답.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은 확신처럼 들렸다.
예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빈 : “우리 오빠 진짜 대단한 사람이거든.”
우진은 결국 웃고 말았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억지 아닌 웃음.
예빈은 조용히 그의 손등을 잡았다.
차가웠다.
정말 놀랄 만큼.
예빈 눈가가 천천히 붉어졌다.
예빈 : “오빠….”
그 순간 우진이 아주 낮게 말했다.
우진 : “…이제 끝난 것 같다.”
예빈 숨이 멈췄다.
우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우진 : “나 이제 진짜 혼자네.”
그 말이 너무 외로워서, 예빈은 순간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예빈은 결국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쌌다.
그리고 울먹이며 말했다.
예빈 : “아니야.”
우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예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빈 : “나 있잖아.”
눈물이 툭 떨어졌다.
예빈 : “오빠 혼자 안 둘 거야.”
그 말에 우진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우진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진 : “…무섭다.”
예빈은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우진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우진 : “사람이 없어지는 거.”
숨이 떨렸다.
우진 : “그리고 누군가는 혼자 남겨지는 거.”
그 순간 예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를 안아주었다.
우진 몸이 순간 굳었다.
하지만 이번엔 밀어내지 않았다.
예빈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예빈 : “나 안 없어져.”
우진 눈이 천천히 감겼다.
예빈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단했다.
예빈 : “오빠가 싫다고 해도 안 갈 거야.”
그 순간 우진 가슴이 깊게 무너졌다.
그는 결국 아주 천천히 예빈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 품 안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밖에서는 겨울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좁은 옥탑방 안만큼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예빈은 한참 동안 우진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치 울음을 달래주는 사람처럼.
우진은 눈을 감은 채 그녀 체온만 느끼고 있었다.
따뜻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 만큼.
우진 : ”예빈아?“
정말 다정하게 이름을 부른다.
예빈은 그걸 알아차리지만 모른 척한다.
S#18. 옥탑방 / 밤
예빈이 돌아간 뒤.
방 안은 다시 조용하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르다.
식탁 위 빈 그릇.
따뜻함이 남아 있다.
우진은 책상 앞에 앉는다.
아버지 편지를 펼친다.
“혼자 버티지 마라.”
한참 바라본다.
휴대폰 진동.
예빈 문자.
≪잘 자요.≫
잠시 후.
≪내일도 또 갈게요.≫
우진은 문자창을 오래 본다.
그리고 답장한다.
≪고맙다. 이처럼 곁에 있어줘서.≫
전송.
정말로 평생을 사랑해 주어야 할 대상 한예빈으로 마음을 굳게 다짐한다.
우진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생긴다.
이제 우진과 예빈의 사랑이 움트기 시작하는 순간인 것만 같다.
S#19. 옥탑방 / 새벽
창밖 새벽.
어둠 끝에 아주 조금 빛이 보인다.
우진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갑자기 예빈의 얼굴이 보고 싶어진다.
아버지의 장례 기간 내내 옆을 지켜 주었던 마음씨가 곱고 얼굴도 예쁜 사랑해 줄 수 밖에 없던 아이 한예빈.
도저히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 이번에는 우진이 먼저 문자를 보낸다.
≪예빈아. 보고 싶다.≫
전송
예빈이 문자를 읽는다.
문자를 읽고 예빈의 얼굴이 환해 진다.
그리고 곧장 답장.
≪오빠 지금 오빠의 마음을 알아. 당장이라도 오빠한테 달려가고 싶어. 하지만 조금만 참아 내일 꼭 갈게.≫
우진이 예빈의 문자를 읽고 내일이라는 시간이 길다고 느낀다.
우진이 내일 예빈이를 보면 이번엔 내가 먼저 꼭 껴안아 주리라고 마음을 다진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날 수 있게 하늘에서 아버지가 도와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우진 (V.O.)
“그래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살아가기도 한다.”
우진은 아버지 사진을 본다.
우진 (V.O.)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누군가 손을 잡아주면 다시 하루를 버티게 되는구나.”
예빈이 놓고 간 보온통.
아버지 편지.
책상 위 수험서.
우진 (V.O.)
“나에게 한예빈은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잠시.
우진 (V.O.)
“정말 예빈이는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다.”
회상.
병원에서 과일 봉지를 들고 웃던 예빈.
장례식장에서 옆자리를 지키던 예빈.
옥탑방 문 앞에서 죽을 들고 서 있던 예빈.
우진 (V.O.)
“힘든 사람 곁에 이렇게 오래 남아 있는 사람.”
우진은 천천히 수험서를 편다.
아직 글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책을 덮지 않는다.
우진 (V.O.)
“그때는 몰랐다.”
우진은 펜을 든다.
빈 종이에 한 줄을 쓴다.
“혼자 안 버티기.”
우진 (V.O.)
“그 애가 내 인생의 가장 긴 겨울을 끝내 줄 사람이야.”
창밖.
어둠 끝에 빛이 번진다.
우진(V.O)
“신통치 못한 과거는 훌륭한 현재와 미래로 씻어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 살 보람이 있고 희망이 있는 것이야.”
FADE OUT.
EP8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