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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부부의삶

막내 이야기(어느 해 여름에 쓴 편지)

작성자가을 애|작성시간24.04.03|조회수1,378 목록 댓글 10

 

 

지현, 사랑하는 지현!

 

싸가지라서 싸가지라 불러도 싸가지니까 쿨하게 무시할 줄 아는 싸가지 지현!ㅎ

한번 씩 힘들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어른의 생각으로 힘들지 않은 일이 없다는 걸 아니까

또 여태 잘해 왔으니까 당연히 잘 이겨내고 곧 졸업해서 뭐든 앞가림은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어느 날 휴학을 하고 재수를 하겠다고 네가 선언했지.

그러다 말겠지, 입학하고 2년 동안 애쓴 수고와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차마 그런 결정은 못 하겠지.

엄마 식대로 넘겨짚었지 뭐야.

너를 잘 아는가 싶었는데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어?

처음엔 반대도 했고 설득도 했지만 너의 고집을 누가 꺾어?

무엇보다도 엄마는 너의 그런 면을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상황이 여의치는 않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건 얘기가 다르긴 하지.

여러모로 고민을 하고 어렵게 승낙을 한 후부터는 뒤돌아 볼 필요도 없었고

결과가 좋아야 하겠지만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많은 것을 얻은 한 해가 될 거라 확신해.

 

아침에 보던 영화를 마저 다 봤어.

<말하는 건축가>라는 영화인데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정기용이라는 건축가가 직접 출연하였고

병마중이셨지만 건축에 대한, 삶의 대한 자세가 참으로 겸손하고 순수하신 분이었어.

돌아가시는 걸 끝으로 영화도 끝이 났는데 여러모로 자꾸 생각이 나네.

중간중간 온 힘을 다 해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유독 와 닿는 말씀이 있었어.

 

<< 나이가 들고 늙을수록 조금은 철학 공부를 해야 되는 거 같아.

오히려 철학적이어야 된다. 그 말은 죽는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된다.

그게 뭐 옛 것을 돌아보고 회상하고 추억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런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게 뭔지, 왜 사는지, 세상이 뭔지, 나는 누군지, 어떻게 살았는지, 가족은 뭔지

도시는 뭔지, 근원적인 문제들을 다시 곱씹어 보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좀 성숙한 다음에

죽는 게 좋겠다. 한 마디로 위엄이 있어야 되겠다. 위엄.

밝은 눈빛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죽음과 마주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

 

한창 젊고 어린 너에게는 먼 훗날이야기이긴 하겠다.

엄마는 요즘 이런 분들이 좋아. 베풀고 비우고 나눌 줄 아는 분들.

 

어제 아침 출근길에 처음으로 매미 소리를 들었어.

반갑긴 하더라. 이젠 정말 여름인가 실감도 나면서 얼마나 더울까 걱정도 되고.

너도 지치지 않게 시간 관리, 체력 관리 잘해야 해.

스스로 알아서 잘하니까 그건 걱정을 덜하게 되네.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가끔 엄마가 한 얘기가 있어.

엄마가 태어나서 제일 잘 한 일이 결혼이었다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고 늘 감사했어.

더군다나 너희들은 착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고 성실하기도 하고 건강하기도 하고

너는 늘 불만이었지만 자기 일은 스스로 할 줄 아는 자립적인 아이들로 잘 자라 주었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 걸 엄마뿐 아니라 이제는 너희들도 알겠지?

 

문득 너에 관한 많은 일들이 생각나네.

별이 엄마는 주름살이 없는데 그 이유는 별이 엄마가 바르는 크림 때문이라며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그거 사 준다고 했던 일.

 

내가 찜질방 가는 걸 무척 싫어하니까 생일 선물로 찜질방 가자고 했던 일.

 

평소 욕하는 걸 싫어하는 엄마가 어느 날 머리가 하늘로 치솟는 여자 그림이 있는 티를 입고선

엄마도 민망했는지 거실에서 부딪힌 네게 선뜻 내뱉은 말이

"이 여자 미친년 같지 않니?" 그 말에

"언니!! 오빠!! 엄마가 욕 했어!!" 너도 당황했지만 엄마도 무척 당황했던 일.

 

엄마가 출근할 때 텔레비전 위에 오빠는 오 천원, 너는 천 원 놔두고 왔더니

느지막이 일어난 네가 사무실에 막 도착했을 무렵 내가 떨거지냐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했던 일.

 

엄마가 중국 출장 갈 수도 있다는 말에 너를 데려가든지, 경희 이모를 데리고 가든지

혼자서는 절대 안 된다고 너를 포함해 언니, 오빠 셋이 완강하게 만류했던 일.

 

자기 전에 엄마 얼굴에 점이 더 생겼는지 매일 세었던 일.

 

손깍지를 꼭 끼고 잤던 일.

 

매일 언니, 오빠는 엄마 옆에, 너는 엄마 허벅지를 베고 누워 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잠들었던 일.

 

이 일들 뿐이겠어?

엄마 블로그엔 너희들과의 추억이 거의 다 기록이 돼 있어.

엄마 유언은 블로그 비밀번호라고 했더니 언니랑 오빠랑 셋이 웃었었잖아.

요즘 애들은 이런 얘기 하면 별로 안 좋아하겠지? 너도.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다 했네.ㅎㅎ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

읽다가 한쪽에 휙 던져질까 봐 이젠 정말 줄일게.

고3 때도 혼자 잘했었잖아.

결과는 둘째치고 네가 뭘 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너의 결정을 존중할게.

그동안 네가 충분히 증명해 보였으니까.

사실 엄마는 자격이 없기도 하고 잘 알지도 못 해.

다른 친구들 엄마처럼 너한테는 엄마가 많이 부족하겠지만 잘 찾아보면 다른 엄마들이

갖지 못한 걸 엄마가 가진 것도 많을 거야.

어릴 때가 더 귀여웠고 지금도 뭐 그럭저럭 귀여운~ 막내 지현이를 정말 정말 사랑해~

파이팅~!

 

<<사진은 오래 걸어두기가 신경 쓰여 삭제했습니다>>

 

어제 막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마침 오늘 한가한 터에 오랜만에 이런 저런 얘기들을 다시 봤어요.

그 후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서 올 해 졸업반이랍니다.

지금은 저 때와 달리 저한테 아주 무관심하지만 사랑은 하는 거 같아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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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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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가을 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03 과찬이세요~
    어쩌면 좋아요. 행여 오늘 비로 이제 막 핀 벚꽃 떨어질까 봐요.
    오래 전 간밤의 비바람으로 한창이던 은행잎이 몽땅 다 떨어진 적이 있었거든요.
    비 그치면 근처 잠깐 순찰 돌고 와야겠어요~
  • 작성자냉홍차 | 작성시간 24.04.03 읽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해져요.

    저도 나름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생각하지만
    때론 다 전하지 못한 말들, 그때그때의 마음들을 저만의 블로그에 적어 놓거든요.
    가끔 다시 읽어보면 옛생각이 더 또렷해지기도 하고 아이를 향한 마음이(특히 미울때) 풀어지기도 하곤 해요.

    아이들은 알까요?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곁을 지키고 있는지..
  • 답댓글 작성자가을 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03 얼른 좋은 짝 만나 제가 보호자 일 순위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ㅎㅎ
    블로그의 글 들은 나중에 더 나이 들어서 보면 정말 감회가 새로울 거 같아요
    결혼 다음으로 잘 한 일이 아이들과의 에피소드를 글로 남겨둔 일이에요.
  • 작성자체리쥬빌레쪼아 | 작성시간 24.04.03 어우, 제가 왜 코 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나는지요. 따님 향한 마음이 느껴져서 더 그런가 봐요. ^^
  • 답댓글 작성자가을 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03 그 딸이 어제 텃밭 추첨에서 7번을 뽑아 올 해도 분양을 받게 됐어요
    당첨되면 2만원, 꽝이면 만원 준다고 꼬셨더니 잘 하고 왔지 뭐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
    "내년엔 나 시키마 마, 괜히 떨려서 혼났잖아."
    농사 잘 지어서 풍족하게 먹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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