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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부부의삶

팔만대장경 재판각 시작....... 팔만대장경 이야기

작성자수돌예돌|작성시간26.04.15|조회수488 목록 댓글 3

팔만대장경판을 예비로 한 벌 더 만들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 관련 기사 : “팔만대장경 정신 잇는다”…재판각 대장정 돌입(KBS, 2026. 4. 10.)

… 해인사가 판각 기술을 익힌 스님들과 함께 '팔만대장경'을 다시 제작하는 대장정에 돌입했습니다.

… 팔만대장경은 16년에 걸친 정교한 판각으로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불경'으로 인정받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입니다.

하지만 현재 해인사 대장경 단 한 벌이어서 복원이 시급합니다.

[김각한/해인사 판각학교 교사/국가무형유산 각자장 : "한 벌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건 언제든지 어떻게 될지를 모릅니다. 이거를 다시 복원하고 되살린다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흠..... 문화재의 정교한 복제본(레플리카)을 미리 만들어 둔다는 건 나름 의미 있는 일일 수 있지요. 

 

다만..... 저는 사실 원본 팔만대장경의 제작과정 자체를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하는 사람인지라, 팔만대장경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기분이 씁쓸해지네요. 

 

많이 과장해서 말하자면, 저는 팔만대장경을 한국사의 흑역사 같은 존재라고 봅니다. 왜 그런지 잠시 설명하지요. 

 

대장경이라는 건 불교의 경전 전집(총서)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 산재한 경전을 하나로 모아 간행한 게 대장경이죠. 이 대장경을 목판인쇄술 기술로 인쇄하려고 만든 목판이 대장경판인데, 이는 본디 중국(북송)과 거란(요)에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중국과 거란의 대장경이 고려에 유입되어 고려인들도 '대장경' 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뒤, 고려시대에 발생한 국가멸망급의 중대한 외침인 거란의 침입과 몽골의 침입 때에 각각 대장경 목판(초조대장경(1차 제작 대장경), 재조대장경(2차 제작 대장경, 이게 속칭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됩니다. 부처님의 힘으로 외침을 몰아내겠다는 고려시대의 호국불교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여기까지가 보통 국사교과서에서 다루어 주는 부분입니다. 왜냐? 여기까지는 큰 문제는 아니거든요. 문제는 그 다음이라 이 부분은 교과서에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국의 강대한 적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고, 앞으로 또다시 침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해 봅시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아래의 두 가지 중 1번일까요, 2번일까요? 

 

1) 부처님, 예수님, 야훼, 알라, 제우스, 오딘, 브라흐만, 아후라 마즈다, 옥황상제 등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정성이 통하면 부처, 신을 비롯한 온 우주가 도와 주면서 외침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절, 교회, 예배당 등을 늘리고, 각종 종교경전도 대대적으로 제작하며, 종교행사를 거창하게 열어야 한다. 

2) 한편으로는 외교적으로 외국과 교섭하여 전쟁이 나지 않도록 노력해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방비를 증액하여 군대를 육성하고 무기를 준비하여 우리에게 쳐들어오면 상대방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임을 알게끔 한다. 이를 위해 기술개발, 경제성장 등도 필요하다. 

 

당연히 2번일 겁니다. 종교의 힘에 의존하는 건 2번을 기본으로 하면서 곁다리로 종교의 힘에도 약간 의지한다는 것이지, 종교의 힘에 의지하는 게 주력이 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그건 제정일치 시대나 신정국가나 할 법한 짓이니까요. 

 

거란이 침략해 왔을 때에는 고려는 2번을 중심으로 행동했습니다. 거란은 총 3차에 걸쳐 침입해 오는데, 대략 이런 흐름이 됩니다. 

 

<1차 전쟁>

① 거란의 항복 요구 : 거란군이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해서 기세등등한 채로 고려에게 항복 요구. 고려 조정은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며 '북쪽 영토를 떼어 주고 달랩시다. 우리가 동아시아 제일 강국 거란을 어떻게 이겨!' 식의 주장이 우세했지만, 반대 목소리도 커서 결정이 안 남. 

 

② 안융진 전투 승리와 전선 고착화 : 그 사이에 고려군이 안융진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여 거란군도 진격하기가 애매한 상황이 됨. 거란군도 슬슬 지쳐서 협상에 응하려 함(거란군도 무한정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 퇴각 명분 찾는 중)

 

③ 서희의 협상 : 서희가 거란군 진영에 가서 '이게 다 여진족 때문이다' 를 시전(여진족 때문에 고려와 거란의 영토가 차단되어 고려가 거란에 입조하여 조공을 바치려 해도 할 수 없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며, '고려와 거란 사이 영토(강동6주)를 고려가 점령하면 고려와 거란의 영토가 서로 맞닿게 되니 당연히 그 뒤엔 고려가 송(북송)과 단교하고 거란에게 조공 바치러 입조하겠음' 이라는 뉘앙스로 말을 하여 거란 장수 소손녕 설득)

* 흔한 오해와 달리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고려냐, 거란이냐의 이야기는 외교회담의 본 주제가 아니었음. 그건 본격적 회담 이전에 하는 스몰토크에 가까운 사전 기싸움 같은 것. 

* 서희의 발언은, 멸망한 지 오래되지 않은 옛 발해의 영토 대부분이 공백지인 상태이므로 거란-고려 간 교통로 연결을 명분으로 두 나라가 옛 발해 영토를 빠르게 잠식해서 서로 국경을 맞대자는 의미임. 그리 되면 현실적으로 고려는 국경 접한 강대국인 거란에게 굴복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뉘앙스를 살짝 함축한 셈. 거란도 그게 일리 없지는 않다 여겨, 고려는 압록강 이남의 발해 영역을 영토화하고, 거란은 압록강 이북의 발해 영역을 영토화해 이후 고려와 거란은 압록강 하류에서 서로 국경이 맞닿게 됨.

 

④ 거란군 퇴각 : 안 그래도 퇴각 명분 찾던 소손녕은 서희의 발언을 '고려의 조건부(강동6주 점령 이후) 강화 요청'으로 포장하여 거란 조정하여 거란 입장에서 전쟁의 목표(고려의 굴복)를 달성했다고 여기도록 보고한 뒤 철수 

 

<1차 전쟁과 2차 전쟁 사이>

① 북송 코인 손절 : 1차 침입 끝난 후 고려는 중국(북송)과 거란을 협공할 생각으로 북송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북송이 거부. 북송 코인이 사실은 거품이었고, 곧 떡락할 코인이라는 걸 알게 된 고려는 북송을 손절(앞서 소손녕과 합의한 대로 북송과 단교), 그리고 거란을 어떻에 해야 하나 전전긍긍해 함. 

 

② 강동6주 점령 및 군사요새화 : 우선 강동6주 지역에 방어용 군사기지들을 잔뜩 건설하기 시작(이 때에는 아직 여진족들 침입 우려 때문이라고 둘러댈 여지는 있었음).

 

③ 거란 황제에게 국혼 요청(공주님 주세요) : 동시에 거란에 고려 왕(성종)이 거란 황제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국혼 요청. 거란은 '(거란의 직계 공주를 주기는 좀 그렇고) 너희가 소손녕이랑 친하지? 소손녕이 사실 거란 황제의 부마라서 소손녕은 황제 아래의 국왕급이니 소손녕의 딸도 공주급 정도는 될 거야. 그러니 소손녕의 딸과 고려왕의 결혼을 허락해 줄게' 라고 회신. 얼결에 고려 성종은 거란 1차 침입의 주인공인 소손녕의 딸과 결혼해야 할 처지에 놓임. 결혼절차가 진행되며 고려는 거란에 결혼예물을 보냄. 

 

④ 고려왕 사망으로 결혼 유야무야 : 이후 고려 성종은 빠르게 요절(고려 정부에서 일부러 고려왕을 죽인 건 아님) → 소손녕 딸과의 결혼도 흐지부지. 결혼 당사자가 죽었으니 거란 측도 고려가 앞서 보냈던 예물을 반환함.(이 결혼이 성사됐으면 고려는 몽골 부마국 이전에 거란 부마의 부마국(?)이 될 뻔.

 

<2차 전쟁>

① 강조의 쿠데타 : 다음 왕인 고려 목종 때에 강조라는 사람이 군사쿠데타 일으켜 왕을 바꿔 버림. (목종 → 현종(대량원군)) 이 건이 알려지자 거란 황제는 '내가 책봉한 고려왕을 누가 함부로 바꿔!' 라면서, 거란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대적으로 침공. 

 

② 거란 황제가 이끄는 거란군 총 40만 vs.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 30만 :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 중 20만이 공격해 오는 걸 고려군 30만이 막아내지 못하고 대패. 당시 초전에서 고려군이 승리하였는데, 그래서 강조는 거란군이 약하다고 얕봄. 이후 거란이 최정예군으로 고려군 사령부 쪽을 공격하는데 고려군이 밀리는데도 강조는 '거란군은 입 안의 음식과 같다. (입에) 조금 들어오면 (씹어먹을 때에) 만족스럽지 않으니 더 많이 들어오게 놔 둬라' 라고 말해서 고려군이 제때 대응하지 못하게 함. 이후 거란군이 사령부 코앞까지 닥친 뒤에야 깜놀해서 '정말이구나'(信乎) 외치며 거란군의 포로가 됨. 거란군은 곧장 고려군 총사령관 강조를 담요에 둘둘 말아서 거란 황제에게 데려감. 거란 황제가 강조를 고문하면서 귀순할 것을 권유(?)했지만, 강조는 끝까지 거부하고 사형당함. 

 

③ 고려 현종의 RUN 그리고 거짓 항복으로 전쟁 종결: 거란군은 고려 수도 개경 함락, 현종은 일찌감치 도주해 전라도 나주까지 파천. 거란군 입장에선 너무 빠르게 진격해서 병참선이 불안정해졌고, 고려도 빠르게 전쟁을 끝내야 하여 고려왕(현종)이 직접 거란에 들어가 입조하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고는 전쟁 종결. 

 

* 조선 선조를 흔히 'Run조' 라고 비꼬곤 하지만, 사실 Run도 아무 왕이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Run을 하기 위해서는 적의 진격속도와 왕의 도주 시의 민심이반을 고려하려 최적의 수도 이탈 시점을 정하는 안목, Run 동안 떨어질 왕의 권위에도 불구하고 뒤따를 신하들의 이탈을 막고 다 같이 고생하는 데에 동참하게 만들 위기 시의 리더십, Run 동안 여전히 왕이 어느 지역에서도 충분히 우대받도록 하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방통제력..... 이 모든 게 갖춰질 때에만 성공적인 Run이 가능해집니다. 그걸 못한 임금은 Run 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당장 조선 인조만 해도 Run에 실패해 남한산성에 갇혔다가 항복한 전례도 있었지요.

 

고려 현종의 Run도 쉽지 않았습니다. 나주까지 피난하는 동안 지방 호족들이나 심지어 옆에 있는 신하나 병졸들에게 괄시를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개경에서 도주하다가 창화현(아마 서울 도봉구 쪽인 듯)에서는 어느 호족에게 이런 수모도 당합니다. 

 

王至昌化縣, 有吏告曰, “王識吾名面乎.” 王陽不聞, 吏怒將構亂.  <고려사>

(왕이 창화현에 이르자 향리(=호족)가 와서 말하기를 "임금님, 나 알아요?"(내 얼굴과 이름을 알아요?) 하니, 왕이 못 들은 척 하였다. 그러자 그 향리는 화를 내며 장차 변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吾(나 오) 라는 한자는 약간 오만한 뉘앙스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향해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역사책에서 위 대화를 묘사함에 있어 吾라는 한자를 썼다는 것은, 저 향리가 왕에게 상당히 오만불손하게 말을 했다는 뉘앙스를 함축합니다.)

 

이런 일이 나주까지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그래서인지.... 원래 고려 초에는 지방제도를 꼼꼼히 마련하지 않고 호족자율적으로 지방을 운영하는 측면이 강했는데 (성종 때에 12목 정도나 설치한 이후) 현종 때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잘 아는 '5도 양계'의 지방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국왕조차도 거란 침입 때에 호족들에게 괄시를 당해 보니 '이게 나라냐' 싶어서 지방제도 개편을 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으니까요.

 

<2차 전쟁과 3차 전쟁 사이>

① 고려왕의 입조? 당연히 안 함 : 당연히 고려는 고려왕이 거란에 직접 방문하여 거란 황제에게 머리 조아릴(입조할) 생각 따위는 없었음. 그러니까 2차 전쟁을 종결지은 고려의 발언은 사실 거짓말이었던 셈. 

 

<3차 전쟁>

거란군 10만 vs. 고려군 20만 :  고려왕의 입조가 무한정 지연되자, 결국 거란 황제는 고려가 약속을 어겼다며 강동6주를 내놓으라며 10만 대군을 보냄. 이번에는 거란 황제의 친정(군주가 총사령관이 되어 직접 군을 지휘하며 전쟁함)은 아니고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보냄. 고려는 강감찬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약 20만 명 정도 동원하여 방어전 수행

 

② 전설의 물 공격, 흥화진 전투 : 강 상류에서 쇠가죽을 밧줄로 꿰어 인공 댐을 만들어 물을 가두었다가 거란군이 강을 건널 때에 댐을 터뜨리는 물난리 공격으로 전투에서 승리. (종종 이게 귀주대첩인 줄 오해하는 사람 있음) 하지만 이 전투 승리가 대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긴 어렵고, 거란의 대군은 계속 남하. 

 

③ 고려의 청야 전술(자학 전술)과 거란군의 퇴각 : 현종이 한 번 RUN을 해 보니 RUN은 (조선 선조와 같은 하늘이 내린 임금이 아닌 한) 함부로 할 만한 게 아님을 깨달았는지 개경에서 농성하기로 작정함. 그래서 거란군의 이동 경로에서는 모든 식량, 민가 등을 싹 없애 버려 거란군이 보급을 하기 어렵게 만들고, 고려군은 유격전을 벌여 계속 거란군의 피해를 누적시킴. 결국 거란군은 고려 수도 100여리 부근에서 퇴각 결정. 

 

군사강국 고려의 전설, 귀주대첩 : 원래 전쟁에서 가장 큰 성과는 퇴각하는 군대의 뒤를 칠 때에 얻는 법임. 그리고 침략군을 고이 돌려보내는 건 다음 번 침략을 예약해 놓는 것과 다를 바 없음. 그러니 침략군이 퇴각할 때에 최대한 큰 손실을 입혀야 함. 고려도 그런 의도에서 강동6주의 한 곳인 귀주 일대의 평야에서 거란군과 대판 붙음. 원래 한반도의 국가가 중국이나 북방민족의 대군과 싸울 때에 평야에서 회전을 벌이는 일은 극히 드문데(대부분은 산성 등에서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 귀주대첩은 흔치 않은 평야에서의 힘 대 힘의 싸움이었음. 대군이 평야에서 맞붙을 때에 세계사적으로 많이 쓰인 전법이 '망치와 모루 전법'(아군의 대군이 적의 대군을 정면에서 막고 있는 상황(모루)에서 최정예군(기병 등)이 우회하여 적의 옆이나 뒤를 쳐서 격파(망치)하는 방식)인데, 귀주대첩도 이 방식으로 거란군을 대파함. 

 

* 귀주대첩은 정말 대단한 성과입니다. 한국 계열의 국가가 동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전투를 5가지 꼽는다면 그 중에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성과라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고려시대로 한정하면 귀주대첩이 무조건 첫 손가락에 꼽히게 되지요. 귀주대첩의 성과로 인해 고려가 군사강국으로 소문이 나면서 송나라(특히 북송)에서도 고려를 매우 중요하게 대우해 주게 되는데, 고려가 조공 바치러 올 때에 송나라가 부담할 비용이 너무 커서 송나라의 일부 신하들 사이에서는 반 고려 감정이 들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참고로 조공 바치는 건 고려인데, 왜 송나라가 비용 많이 드느냐고 하겠지만..... 원래 조공-책봉체계는 중국 쪽 국가가 <돈으로 평화를 사는 행위>라서 번국이 중화에게 조공으로 바친 공물의 가치보다 중화가 번국에게 내려 주는 회사품의 가치가 훨씬 커야 했습니다. 그래야 번국이 '어이구 좋다' 하며 기꺼이 조공 바치며 중화의 (돈 앞에) 머리를 숙일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조공을 많이 받을수록 중화 쪽에서 지불할 비용이 커지는 게 보통인데, 중화가 특정 번국을 더 중시하게 되면 더 많은 회사품으로 그 번국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으므로 비용부담은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북송과 고려 상황이 딱 그러했지요. 북송은 귀주대첩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거란(요)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력은 고려로구나!' 라면서 고려를 매우 중시하게 됩니다.

 

하여튼 이로 인해 고려 사신이 한 번 올 때마다 송나라의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커지니까 송나라 안에서 반 고려파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그 때마다 '고려를 홀대하게 되면 그 후에 거란은 무슨 수로 견제할 건데?' 라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자신의 발언을 사죄하는 일이 반복되곤 했지요. 이런 반 고려파 중에는 당송팔대가(당나라와 송나라 시절의 8명의 유명한 중국 시인) 중 하나인 소동파(동파육으로 유명한 그 사람 맞습니다. 이름은 '소식', 호가 '동파' 입니다.)도 있었습니다. 

 

소동파는 소위 <고려금수론>(고려는 금수(짐승)같은 나라다!!!!)라는 주장으로 유명했는데, 실제로 소동파는 이런 상소를 자국 황제에게 올린 바 있습니다. 

<고려가 (송에 와서) 책을 구매하는 것에 대한 이익과 손해를 논한 상소문>(論高麗買書利害箚子)
신이 엎드려 보니, 고려에서 보낸 사신들이 한 번 들어와 조공할 때마다 조정(朝廷)과 회하‧절강 두 로(路, 지방행정단위)에서 이들에게 선물을 하사하고 음식을 내리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하는 비용이 약 10여만 관인데, 이들이 머무는 관사를 수리하고 행시(行市)를 시끄럽게 동원하고 사람과 선박을 동원하는 비용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臣伏見高麗人使 每一次入貢에 朝廷及淮浙兩路 賜予餽送燕勞之費 約十餘萬貫 而修飾亭館 騷動行市 調發人船之費 不在焉.)

(고려가 조공을 올 경우에 송나라 측은) 관리들이 약간의 선물을 얻는 것을 제외하고는 털끝만 한 이익이 없고 다섯 가지 폐해만 있습니다. (除官吏得少餽遺外엔 了無絲毫之利하고 而有五害.)

① 첫 번째 폐해 : 송나라의 국가재정이 크게 소모됨
고려에서 조공으로 올려서 얻는 것은 모두 노리개(장난감)일 뿐 쓸모라고는 없는 물건들인데, 우리가 지불하는 것은 모두 (송의) 국고에 있는 재화들이요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폐해입니다. (所得貢獻 皆是玩好無用之物 而所費 皆是帑廩之實 民之膏血 此一害也.)

② 두 번째 폐해 : 백성들이 너무 고생함
사신이 이르는 곳마다 사람과 말과 여러 가지 물건을 빌려주느라 시장(행시行市, 상인조합(행) 중심의 시장)를 교란시키며 사신들이 머무는 관사를 수리하느라 백성들의 힘이 갑절로 들어가고 배상하는 비용이 있게 되니, 이것이 두 번째 폐해입니다.(所至 差借人馬什物 攪撓行市 修飾亭館 民力倍 有倍費 此二害也.)

③ 세 번째 폐해 : 고려는 송나라에서 받은 하사품을 거란에 수출함
고려가 얻어가는 하사품을 만약 거란[契丹]에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거란이 어찌 고려가 (송에) 와서 조공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겠습니까? 이는 분명히 적(=거란)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가져다주는 미련한 행위이니, 이것이 세 번째 폐해입니다. 高麗所得賜予 若不分遺契丹 則契丹安肯聽其來貢. 顯是借寇兵而資盜糧 此三害也.)

④ 네 번째 폐해 : 고려의 간첩질
고려가 겉으로는 의리를 사모하기에 (송에) 와서 조회한다고 하나, 실상은 (고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고려의 본심을 헤아려보면 끝내 반드시 북쪽 오랑캐(契丹)에게 이용당할 것이니, 어째서인가 하면 오랑캐(거란)들은 충분히 고려의 목줄을 제압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려의) 사신들이 이르는 곳마다 (송나라의) 산천의 지형과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서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고 헤아리니, 어찌 다시 좋은 뜻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네 번째 폐해입니다. (高麗名爲慕義來朝 其實爲利 度其本心 終必爲北虜用 何也. 虜足以制其死命, 而我不能故也. 今使者所至 圖畫山川形勝 窺測虛實 豈復有善意哉. 此四害也.)

⑤ 다섯 번째 폐해 : (거란의 동맹국인 고려에게 조공을 받으면) 거란이 화를 낼까 두려움
경력 연간(慶曆 : 1041년 11월 ~ 1048년)에 거란[契丹]이 맹약(송과의 화친조약)을 배신하고자 할 적에 먼저 (송이 국경지역에) 당박(塘泊 : 거란 기병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치한 방어용 늪지대)을 더 설치했다는 것을 가지고 중국(=송)의 잘못이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저들(거란)의 동맹국인 고려를 불러와서 그들로 하여금 해마다 들어와 공물을 바치게 한다면 당박보다 심한 트집거리가 될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 거란이 공손하여 감히 사단을 일으키지 않고 있지만 만일 후일에 매우 호걸스럽고 간교한 오랑캐가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구실을 삼는다면 조정에서 어떻게 답변할지 알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폐해입니다. (慶曆中 契丹欲渝盟 先以增置塘泊 爲中國之曲, 今乃招來其與國 使頻歲入貢 其曲 甚於塘泊. 幸今契丹恭順 不敢生事 萬一異日有桀黠之虜 以此藉口 不知朝廷何以答之 此五害也.)

신은 마음 속으로 이 다섯 가지 폐해를 알기에, 희녕 연간(熙寧, 1068~1077)에 항주통판(항저우의 관직명)으로 있을 적에 저들이 선물을 보낸 문서 가운데에 본조(=송)의 정삭(연호)을 쓰지 않은 것을 트집잡아 저들이 바치는 물건을 물리쳤다가 저들이 문서에 우리의 연호를 다시 써넣은 뒤에야 받아주었으며, 이어서 빨리 출발하도록 독촉하여 머물지 못하게 구박하였습니다. 그리고 근년에 나가 항주(杭州, 항저우)를 맡게 되자, 그들이 올린 금탑(金塔)을 물리치고도 아예 조정에 상주하지 않았고, 또 연로(沿路)에서 이들을 접대하는 일을 너무 융숭하지 않게 하도록 분명하게 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과 내통한 교활한 상인과 승려들을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고, 아울러 조종의 《편칙(編勅: 법전명)》에 따라 항주(杭州)와 명주(明州, 밍저우)에서 모두 고려로 배를 출발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 법을 어긴 자는 도형(徒刑) 2년에 처하고 재화를 몰수해서 상으로 충당할 것을 청했습니다.
...(중략)... 
이상의 몇 가지 일은 모두 조정에서 일일이 시행하도록 허락을 받았으니, 이것은 모두 신이 평소에 고려가 조공하는 일을 차츰 억제해서 거의 점차 오지 않도록 만듦으로써, 조정을 위해 영원한 폐해를 사라지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臣 心知此五害 所以熙寧中通判杭州日 因其餽送書中 不稱本朝正朔 却退其物 待其改書稱用年號然後 受之 仍催促進發 不令住滯. 及近歲出知杭州 却其所進金塔 不爲奏聞 及畫一處置沿途接待事件 不令過當 仍奏乞編配狡商猾僧 幷乞依祖宗編勅 杭, 明州竝不許發船往高麗 違者 徒二年 沒入財貨充賞. ...(중략)...  已上事 竝蒙朝廷一一施行 皆是臣素意欲稍稍裁節其事 庶幾漸次不來 爲朝廷消久遠之害.)

(...중략...)

(고대 한나라 시절에는 동평왕 유우라는 황제의 친족인 제후왕이 와서 중국의 책을 요청하였을 때에도 거부한 바 있습니다. 일부 제자백가 책은 유학자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성인(공자, 맹자 등)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중국의 각종 지형 등을 묘사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당시) 동평왕은 (황제의) 골육의 지친(가까운 친척)으로 특별히 번신(藩臣)의 지위를 맡고 있었는데도 하사받을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해외의 먼 오랑캐이고 거란의 동맹국(모두 고려를 뜻하는 표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하북 지방의 각장(榷場: 무역 규제 법규)에서 문서(서책)를 반출하는 것을 금지하여 그 법이 매우 엄격하다고 하니, 이는 오직 거란 때문입니다.

지금 고려와 거란이 무엇이 다릅니까?

만약 고려에게 (요청하는 대로 책을) 주어도 된다면 각장(榷場)의 법 또한 아울러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
(臣竊以爲 東平王 骨肉至親 特以備位藩臣 猶不得賜 而況海外之裔夷 契丹之與國乎. 臣聞 河北榷場 禁出文書 其法甚嚴 徒以契丹故也. 今高麗與契丹何異 若高麗可與 卽榷場之法 亦可兼廢)


(이하 생략)
 

 

⑤ 결과 : 거란 황제는 길길이 날뛰며 거란군 총사령관 소배압의 얼굴 가죽을 벗겨 버리겠다고 난리를 쳤음. (하지만 거란 소씨는 명문 귀족이라 황제라고 해도 함부로 얼굴 가죽 벗기기에는 좀.....) 이후 고려가 다시 제후국을 자청하며 거란에 조공을 바치겠다고 했고, 거란도 이를 허락했지만 다시는 거란이 고려를 억압하지는 못함. 

 


 

이 이야기를 왜 했는가 하면, 초조대장경이라는 게 거란 2차 침입과 3차 침입 사이에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고려가 거란군을 막아 보려고 나름대로 군사력 강화 등을 통해 최대한 노력을 하면서, 곁가지처럼 (국민과 병사의 사기 진작 목적으로?) 대장경판을 조판했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초조대장경 초판의 경우는 말이지요. 

 

그런데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고려가 몽골과 싸울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은 채 부처님의 가피(신통력 등) 같은 것에 의존한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략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몽골 침략기 때의 고려 최고권력자는 누구였을까요? 최씨 무신정권의 2번째인 최우(최이) 시절이었습니다. 아빠 최충헌이 무신정권의 최종 승리자가 되어 고려에 사실상 막부정권 비슷한 것을 연 이후, 최우는 2대째의 집권자가 되었지요. 

 

몽골 제국은 원래 정복국가이고, 주변국 정복 후에는 사소한 꼬투리만 있어도 고려를 침략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몽골이 보낸 사신이 고려에 굉장히 거만하게 굴었지만, 몽골 제국이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강력했다는 걸 감안하면 최우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몽골을 대했어야 하지만 최우는 다른 북방 오랑캐 대하듯이 몽골을 대합니다. 그러다가 고려에 와서 온갖 패악을 부린 몽골 사신(저고여)이 귀국길이 압록강 인근에서 도적떼를 만나 피살되었고, 그걸 진상조사하려고 보낸 사신을 고려 측에서는 화살을 쏘아 대면서 군사적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러니 몽골 제국 측에서는 '고려가 몽골 사신을 살해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몽골 사신의 살해 사건을 조사하러 보낸 2차 사신을 왜 고려 정부는 막으려고 애를 썼는가?' 라면서 고려 침략을 결정하게 됩니다. 

 

참고로 몽골 제국은 자신들의 사신이 살해당하거나 하는 걸 <몽골 대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로 보아 (외교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군사적으로 대응하곤 하는 유목 제국이었습니다. 한 예로 현 이란 지역의 강대국이었던 호라즘 제국에서 징기스칸의 사신을 죽이거나 수염을 강제로 깎은 채로 돌려보내자 격분한 징기스칸이 몽골 제국의 온 힘을 기울여 호라즘을 정벌합니다. 정벌하다가 징기스칸이 수명이 다해 죽으니, 다음 대칸도 계속 호라즘을 공격해 결국 멸망시키고 몽골 제국의 영토로 흡수하지요. (이 지역이 몽골 제국의 4대 울루스 중 하나인 일 칸국(훌레구 울루스)입니다.)

 

그러므로 몽골과 전쟁할 생각이 아니라면 몽골 사실을 추방하거나 하는 행동은 매우 삼가야 할 행동입니다. 하지만 고려의 권력자 최우에게는 그런 조심성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무렵이 마침 징기스칸 사망 무렵과 겹쳐서 몽골은 한동안 침묵한 뒤, 2대 대칸 오고타이(우구데이)는 고려에게 사신 살해의 책임을 물으면서 항복할 것을 요구합니다. 최우는 거부하였고, 오고타이는 침략으로 응수합니다. 그리고 몽골군은 곧 고려 수도 개경을 포위하게 되니, 최우는 강화(라고 쓰고 항복이라 읽음) 의사를 밝히게 됩니다. 그래서 몽골군은 곧 철수합니다.(1차 침입)

 

1차 침입 이후 몽골과의 확실한 관계개선이 없다면, 고려는 다시 몽골과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우는 몽골에게 그렇게까지 굴복할 생각은 없었지요. 그러니 고려는 몽골과의 추가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과연 최우는 어떤 대응을 했을까요? 

 

최우의 몽골 침략 대응 방안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강화도 천도(RUN) : 전국의 조운체계를 강화도로 집중시켜, 전쟁 중에도 각 지역(특히 남부 지역)의 조세(쌀)를 강화도로 원활하게 운송하도록 만듦. 그럼으로써 강화도 안에서도 개경에서와 비슷한 풍족한 귀족으로서의 삶 영위.

 

2) 백성들 방치(각자도생 유도) : 몽골이 쳐들어 오면 산성이나 섬 등으로 피신해서 알아서 살아 남으라고 함. 

 

3) 야별초 설치 : 최정예 전투부대를 만들어 최우의 신변을 지킴. 

 

여기에 바로 팔만대장경이라는 비장의 대응책이 추가된 겁니다. 

 

4) 팔만대장경판 조판 : 부처님의 힘을 빌어 초자연적으로 몽골군을 물리치도록 노력. 

 

당연히 강화도 안에서 불교 행사도 자주 엽니다. 부처님의 힘을 빌리려면 부처님이 좋아하는 불교 행사도 많이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절도 짓지요. 목재 등 자재는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 배로 실어오면 되니 뭐가 문제겠습니까? 백성 따위들이 고통 받는다고 해 봐야 그게 뭐 어떻다고요. 그래서 강화도 천도 직후부터 법왕사, 봉은사 등을 지어대고, 그런 절에서 연등회, 팔관회 등 행사도 잔뜩 엽니다. 부처님이 흡족하셔야 최우를 위하여 몽골을 물리쳐 줄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럼 팔만대장경판을 만든다고 해도 강화도에서 전쟁 치르던 당시 상황에 맞게 너무 과하지 않게 만들지 않았겠느냐고요? 에이, 무신정권은 '적당히' 라는 게 없습니다. 수탈을 해도 다 죽을 정도로 끝까지 수탈하고, 말아먹으려고 해도 나라 망할 정도로 말아먹는 게 무신정권인데요. 

 

팔만대장경을 만들 경판의 나무는

1) 벌목한 후 적어도 1~2년 정도는 바닷물에 담가 놓았습니다. 나무 진액을 완전히 빼내기 위함이라지요. 

2) 그 후 나무를 소금물에 삶습니다. 

3) 그 후 나무를 1년간 그늘에서 건조시킵니다.

4) 그 후 승려 뿐 아니라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관료와 문신들을 총동원해서 팔만대장경판의 원고가 될 글들을 열심히 쓰게 합니다. 

5) 종이에 쓴 그 글을 뒤집어서 나무판에 붙인 뒤, 조각 장인(각자장)들이 글자 모양대로 나무 판을 파내어 경판을 만듭니다. 

    (아래 사진처럼 말입니다.)

6) 그 후 다 인쇄를 해 본 뒤에 오탈자가 있는지 검수하고, 오탈자가 발견되면 그 페이지의 판을 새로 만듭니다. 

7) 검수가 끝나면 마무리 작업을 한 뒤, 옻칠을 해서 보관합니다. 

 

자, 딱 설명만 봐도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이 소요되었겠지요? 이걸 평화시에 여유재원으로 했다면야 큰 문제가 될 게 없지요. 문제는 이 작업을 전쟁 중, 그것도 국가지도부는 섬으로 RUN 친 채로 온 나라가 불지옥이 된 상황 속에서 안 그래도 힘든 백성들을 더욱 수탈해 가면서 했다는 겁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럴 재원과 인력이 있으면 군 병력을 강화하는 등 보다 '현실적'인 방면에 사용할 테지요. 

 

이런 식으로 만든 팔만대장경을 과연 우리가 멋지다고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팔만대장경판 조판을 <국가가 위기 시에 행할 수 있는 최악의 삽질 사례>로 학생들에게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반면교사의 사례로서 말이죠.

 

 


 

 

+덧) 그 뒷이야기

 

팔만대장경판 만들었다고 부처님이 최씨 무신정권을 보우하사 몽골군이 잘 물러갔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 없겠지요. 

 

최우 이후에도 최씨 무신정권은 2대를 더 이어 갑니다. (이것만 보면 부처님이 보우하셨다고 봐야 하려나요? 무려 4대씩 이어졌으니??) 그리고 마지막 4대 째인 최의 때에, '못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분위기가 강해졌는지 김준이라는 무신이 쿠데타를 일으켜 최의를 죽이게 됩니다. 팔만대장경판까지 만들었음에도 부처님은 최씨 무신정권을 보살펴 주지는 않으셨다는 거죠. 

 

이후 고려 태자(훗날의 원종)이 몽골에 항복하려고 찾아가게 되는데, 당시 몽골이 대칸이었던 몽케(뭉케)가 사망하고 다음 대칸이 누가 될 지를 두고 내전(아릭 부케 vs. 쿠빌라이)을 벌이던 중이었습니다. 이 타이밍에 고려 태자는 한 쪽 진영을 선택해서 항복해야 했는데, 이 때에 고려 태자는 고려 역사에 길이 남을 대박을 치게 됩니다. 쿠빌라이에게 항복했거든요. 

 

당시 몽골의 전통으로는 쿠릴타이라는 귀족회의에서 몽골 제국의 대칸을 선출하곤 했는데, 다수의 몽골 왕족/귀족들은 아릭 부케를 지지하는 상황이라 쿠빌라이가 정통성 면에서 크게 몰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의 태자가 찾아오자 굉장히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다음이 쿠빌라이의 당시 발언입니다. 

 

"고려는 만 리나 되는 나라이고, 당 태종이 친히 정벌했으나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세자가 스스로 찾아와 귀부하니, 이는 (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다는) 하늘의 뜻(天意)이로다."  (高麗萬里之國, 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自來歸附, 是天意也.)

 

고구려와 고려를 혼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고구려는 대략 장수왕 무렵(5세기)부터 국호를 '고려'로 바꾼 것으로 보이기에(그래서 충주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에도 고구려를 '고려' 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외국 쪽에서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가 13세기 무렵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오해할 만 했지요. 

 

이 사건이 쿠빌라이에게 큰 힘이 되었고, 이후 쿠빌라이는 내전에서 승리하고 몽골 제국의 대칸이 됩니다. 쿠빌라이는 힘들 때에 자신에게 힘이 되어 준(????) 고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쿠빌라이 코인을 저점 매수한 고려 태자(원종)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지요. 

 

우선, 불개토풍(不改土風 : 토착 풍속을 바꾸지 않겠음)이라는 약속을 해 줍니다. 이는 몽골이 고려의 풍속을 강제로 바꾸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추후 쿠빌라이가 원의 세조가 되기에, 이 약속을 '세조구제(世祖舊制)' 라고 부르면서 원나라가 고려 제도를 바꾸려고 하거나 고려에 부당한 요구를 하려 할 때(정확히는 고려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더라도 고려 귀족들이 느끼기에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요구를 원나라가 할 때)에 고려가 원나라에 합법적으로 저항하는 수단이 되곤 합니다. 

 

예를 들자면, 노비 성애자인 고려는 (추후 조선도 그러했지만) 노비제도를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원나라에서 고려로 파견 온 정동행성 평장사인 게오르기우스(기독교 계통인 경교 신자라 이름이 이 모양임. 한자로는 활리길사(闊里吉思)라고 씀)가 '아니 이 시대까지도 노비제도 유지하는 야만적인 국가가 어디 있어?' 라고 생각했는지 고려의 노비 제도를 없애려고 합니다. 원래 고려의 제도는 '일천즉천법'(一賤則賤法)이라 해서 부모 중 한 명만 천인(노비)이어도 그 자녀는 당연히 천인이 되게 하는 아주 끔찍한 제도였습니다. 게오르기우스는 그와 정 반대로 '부모 중 한 명이 양인이면, 자녀도 양인이 된다' 는 식으로 노비 수를 점차 줄여 가려는 제도를 입안했습니다. 그러자 고려 귀족들이 대거 들고 일어납니다. "아니, 원 세조께옵서 우리 고려의 제도를 고치지 않겠다고 친히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뭐라고 우리 고려의 소중한 노비제도를 손보려고 해!!!" 라고 강력하게 항의한 거죠. 그 결과 게오르기우스는 원나라 본국으로 소환됩니다. 

 

원나라는 게오르기우스의 사례 외에도 여러 번 고려의 노비제가 후진적이라는 인식 하에 노비제 철폐를 위해 노력하지만, 고려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결국 고려의 노비제를 손 보는 데에 실패하고 말지요. 이게 다 고려 태자가 줄 잘 선 덕에 쿠빌라이 대칸이 고려에 큰 권한을 준 덕분이지요. 

 

다음으로 몽골 공주(정말 쿠빌라이 본인의 딸, 물론 정식 황후의 딸은 아님)을 고려 태자(원종)의 아들과 결혼시킵니다.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자가 충렬왕이고, 충렬왕과 몽골 공주(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난 아들이 충선왕(훗날에 고려왕과 요동 지역 심양왕을 겸한...)입니다. 고려 왕이 몽골 대칸의 사위가 된 것은 독립국 국왕으로서의 지위 하락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미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기로 한 판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얻는 데에 몽골 대칸의 사위가 되는 것이 도움이 된 것도 분명합니다. 

 

적어도 이후 몽골 사신들이 몽골 공주의 남편(인 충렬왕)을 하대할 수가 없어서 동서 방향으로 서서 서로 맞절을 했다고 할 정도가 됩니다. (원래은 몽골 사신이 상석에 서고 고려 왕이 낮은 자리에 서는 등 남북 방향으로 섰다는 말이 있습니다.)

 

* 교훈 : 힘이 없다면 팔만대장경 잘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힘 있는 사람에게 줄을 잘 서자. 물론 더 좋은 건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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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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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기대만큼 | 작성시간 26.04.15 옆에서 설명해주는 것처럼 대장경에 얽힌 역사 이야기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궁그미! | 작성시간 26.04.16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 초입구 진황도에 맹강녀 동상을 봤고,스토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장성 축조에 희생된 민간인들의 피눈물도 함께 기억해 가는, 그러한 역사학습이 바람직할 거 같습니다.

    영상에서 봤던, 팔만대장경은 정교하기 그지 없습니다. 권력의 강제가 출발이었겠지만 참여하는 승려 비롯 백성들의 마음은 정말 진심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팔만대장경을 만들라 시킨 것은 포악한 권력이지만, 완성한 것은 민중입니다. 민중/조상님의 피땀을 다시 살려내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는 엄숙한 감정이 들어옵니다.
  • 작성자능라 | 작성시간 26.04.16 불교에서 정말 대단한 큰일을 시작하셨네
    감사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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