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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부부의삶

AI 도래, 속도의 시대, 깊이를 잃다

작성자날이날이지만|작성시간26.06.06|조회수575 목록 댓글 8

  요즘 묘한 피로감이 쌓이고 있습니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정확히는 일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직업 특성상 여러 보고서를 읽고 검토하는 일을 합니다. 오랫동안 그 일을 해왔고, 나름의 리듬이 있었습니다. 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면 각자의 속도와 스타일대로 결과물이 들어왔습니다. A가 먼저 제출하면 검토하고, 며칠 뒤 B가 오면 또 검토하고. 사람마다 다른 호흡이 자연스러운 완충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 과정이 때로는 더디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속도 안에 적절한 여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AI 시대가 되면서 그 리듬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업무를 지시하면 하루 이틀 만에 결과물이 쏟아집니다. 여러 명이 거의 동시에, 그것도 꽤 완성도 있어 보이는 보고서를 들고 옵니다. 처음엔 그 효율성에 감탄했습니다. 팀 전체의 생산성이 올라간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러나 그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밤늦게까지 혼자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읽고, 수정하고, 다시 읽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업무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저에게 쌓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표면적인 불편함에 불과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조금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회의 시간에 보고서 내용을 물어보면, 본인이 제출한 글인데도 처음 듣는 사람처럼 당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나마 대답을 해도 표면적인 단어만 반복할 뿐, 그 안의 맥락이나 논리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보고서에 참신한 아이디어가 담겨 있어 "이걸 어떻게 생각해냈어요?" 하고 물으면, 머뭇거리다 얼버무리기 일쑤입니다. 아마도 그 아이디어는 직원의 것이 아니라 AI의 것이었던 거죠. 칭찬을 하려 던졌던 물음이었는데 오히려 그 친구를 남감하게 머쓱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습니다. 형식도 갖춰져 있고, 문장도 매끄럽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그 사람의 고민이 얼마나 담겨 있는지는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업무를 통해 쌓여야 할 경험과 판단력이, AI에 위탁되면서 조용히 증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지만, 사람의 깊이와 경험과 능력은 반비례하듯 얕아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직원들이 걱정됩니다.

 

  지금 당장은 AI 덕분에 일을 잘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5년 후, 10년 후에 그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고서를 쓰며 부딪히는 시행착오, 자료를 찾고 논리를 구성하며 길러지는 사고력, 틀렸을 때 지적받고 다시 고치는 과정,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을 전문가로 만드는 재료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AI에게 통째로 넘겨버리고 있다면, 결국 성장의 기회 자체를 잃는 셈이 아닐까요.

 

  도구를 쓰는 것과 도구에 기대는 것은 다릅니다. 망치를 잘 다루는 목수와, 망치 없이는 못 하나 박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결과물을 내더라도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나름 좋은 대학을 나와 노력 끝에 들어온 친구들이라 다들 알아서 잘들 하겠지만, 혹여 시간이 지난 후 설 자리를 잃고 낙오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됩니다. 지금 많은 직원들이 조용히 그 경계를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물론 이 걱정은 저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옵니다.

 

  AI가 보고서를 쓰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의사결정의 초안까지 제시하는 시대가 이미 와 있습니다. 검토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맡은 관리자인 저는, 과연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지금은 여전히 사람의 눈과 경험이 필요한 자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두렵다기보다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시점이 이미 와 있다는 느낌입니다. AI를 잘 활용하는 것과 AI에게 잠식되는 것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 질문은 직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도 똑같이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보다 밀도라고 생각합니다.

 

  빠르게 만들어낸 결과물이 쌓이는 것보다, 한 편의 보고서를 쓰면서 무언가를 배우고 생각하는 과정이 더 소중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사람다운 깊이'가 더 희귀하고 값진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빠름이 당연해진 세상에서, 느리더라도 자기 언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 깊이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이것이 요즘 제 머릿속을 가장 많이 맴도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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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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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날이날이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6 수돌예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AI가 관리직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맞춤형 AI를 다룰 줄 아는 소수의 관리자가 다수의 일반 관리자를 대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는 회사 내부 맥락을 모르는 AI의 한계로 관리직이 일반직에 비해 안전지대라고 봅니다. 다만, 미래엔 맞춤형 AI가 보편화 되어 사내 데이터와 경영 방향성을 완벽히 숙지하여 관리직 업무를 흡수하지 않을까 싶군요. 벌써 대기업 중심으로 이와 같은 프로젝트가 일부 개발, 시행되고 있기도 하고요

    향후 관리직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단순히 업무를 검토하고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제안한 여러 판단지 중 최종 리스크를 책임지고 결정하는 최종 의사결정력과 인간적 리더십으로 좁혀질 것으로 봅니다.
    이것에 적응한 일부 관리층만 남고 나머지는 인력 감축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 작성자푸바2000 | 작성시간 26.06.06 아무리 AI가 요약보고서를 기깔나게 써준다고 해도 그걸 자기것으로 만들어 회의에 임해야지 거의 무방비 상태로 회의에 들어왔다는건 그 직원 자체가 문제 있는 직원입니다
    그런 사람은 먼저 정리대상이 될겁니다 AI가 무섭게 발전하고있는데 회사는 고용을 유지할 이유가 없죠
  • 작성자주부코미 | 작성시간 26.06.06 속도보다 밀도..
    와닿네요
  • 작성자걱정이 많아요 | 작성시간 26.06.06 내용은 어떤가요? 형식이나 문장은 괜찮다고 해도 살무자선에서 실질적으로 좋은 내용이라 판단되시나요?
  • 답댓글 작성자날이날이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6 잘쓰는 직원과 그렇지 못한 직원의 차이가 큽니다. 잘 쓰는 직원은 AI도 하나가 아니라 5~6개를 쓰더군요. 자료 찾고 정리하는 ai, 통계 ai, 글쓰는 ai등이요. AI 마다 강점이 달라 이를 알고 활용할 필요가 있더군요. 이런 친구 보고서는 퀄리티가 좋습니다.
    단 많이 쓰는 직원이나 하나 쓰는 직원이나 둘다 핵심을 찌르는 결론 도출 내용은 부족 합니다. 서론, 본론 중반까지 괜찮은데 후반 결론에서 심심하게 마무리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AI를 써도 일을 아는 사람이 핵심에 다가가도록 AI를 유도해 가며 쓸 때 AI가 제대로 된 결과물을 생성하는거 같습니다. 이건 향후 업무별, 회사별 맞춤형 버전이 나와야 개선 될거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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