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맞벌이 부부의삶

그 남자의 거시경제학과 지쳐서 상투라도 잡자는 그녀

작성자한강자전거|작성시간26.06.15|조회수1,265 목록 댓글 12

거실, 밤 10시.
식탁 위에는 몇 장의 인쇄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남편 진우는 돋보기안녕을 고쳐 쓰듯 안경을 치켜올리며, 형광펜으로 서류의 특정 수치들을 거칠게 그어 내렸다.


화면 속 유튜브 채널에서는 ‘부동산 시장 붕괴 시나리오’, ‘역대급 가계부채 폭탄’이라는 자막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거 봐, 민정아. 내가 뭐랬어.

통계청 인구 추계 보면 2, 30대 유입 인구 자체가 꺾였어. 이 구조에서 아파트 가격이 유지된다는 건 사기야, 사기.”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마친 아내 민정은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결혼 후 7년 내내, 집값이 조금이라도 들썩일 때마다 반복되는 남편의 ‘대한민국 붕괴론’ 강의였다.

​“여보, 그 인구론 얘기 벌써 몇 년째야? 당신 말 믿고 4년 전에 마포 아파트 전세 계약 갱신할 때, 그때라도 샀으면 우리 지금 걱정은 안 해. 그 사이에 집값은 억 단위로 뛰었잖아.”



​진우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일시적인 거품이라니까! 영끌족들이 막차 타서 억지로 밀어 올린 데드캣 바운스야.

일본 버블 경제 무너지기 직전에도 다들 영원히 오를 줄 알았어. 지금 사면 완벽하게 상투 잡는 거고, 대기업 건설사들 설거지해 주는 꼴밖에 안 돼.”



​민정은 가슴이 꽉 막혀왔다.

전문직이고 살면서 늘 똑똑하다고 인정 받던 진우는 늘 스스로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자산가라고 믿었지만, 민정의 눈에는 그저 ‘폭락’이라는 확증 편향에 갇힌 사람 같았다.

오직 집값이 망한다는 뉴스만 찾아다니며 위안을 얻는 중독자.



​“우리 내년이면 아이 초등학교 입학이야. 대치동이든 목동이든 어디든 학군지 주변에 정착해야 할 거 아냐.

전세 만기 때마다 집주인 눈치 보고 대출 연장 서류 떼러 다니는 거, 나 이제 지긋지긋해. 언제까지 대한민국 망하기만 기도하면서 살 건데?”



​‘학군’이라는 말에 진우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학군지도 거품이야! 인구가 주는데 학원가가 영원할 것 같아?

둔촌동이고 강남이고 PF 대출 부실 터지면 도미노로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야.

조금만 더 현금 쥐고 버티면 반값에 주울 수 있는데, 왜 그 세력들 좋은 일을 시켜주냐고!”



​“진우 씨 당신은 지금 집값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

민정도 결국 참았던 감정이 폭발해 소리를 질렀다.



​“뭐? 내가 누굴 위해서 매일 밤새 가며 거시경제 지표
분석하고 자산 지키려고 애쓰는데! 내 판단이 틀린 게 아니야. 시장이 왜곡된 거지!”

진우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채 서류 뭉치를 내팽개쳤다.



​민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거실에 홀로 남은 진우는 식식거리며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내의 “당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라는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지독한 불안감—‘혹시 정말 나만 틀린 거면 어쩌지? 만에 하나 여기서 더 오르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지?’—이 그를 괴롭혔다.



​다음 날 아침, 집안에는 차가운 침묵만 맴돌았다.

민정은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아이를 챙겨 집을 나섰고, 진우 역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출근길에 올랐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진우는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모니터 구석에 띄워놓은 부동산 실거래가 알람 앱에는 연일 ‘신고가 경신’ 팝업이 떴다.

진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서랍 속에서 몇 달 전 민정이 가보자며 식탁에 놔두었던 인근 신축 단지 조합원 매물 안내장을 꺼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이사님, 죄송하지만 오후에 반차 좀 쓰겠습니다. 급하게 개인적으로 확인해 볼 일이 생겨서요.”

​회사 문을 나서는 진우의 손에는 여전히 거시경제 분석 자료가 들려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생전 처음으로 부동산 중개업소가 밀집한 대치동 골목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낭만할매 | 작성시간 26.06.16 현실 에서 저런경우 꽤있지요.
    제 딸네도 저런경우ᆢ
    다른점은 저런 남편두고 지가 대출받아 신축 청약해서 당첨되어 한시름 덜었지요 .
    뭐든 반대만하다 지금은 입다물고 재테크 는 모르쇠 하고
    있는 눈치 더군요.
  • 작성자내누군지아니 | 작성시간 26.06.16 글쓴님 직접 쓰신건가요?
    10여년 전 초이노믹스 '노량진 허생전' 글과 문체가 매우 비슷해서요.
  • 작성자싼타페^^ | 작성시간 26.06.16 저희집 얘기라서 깜놀했네요 ㅋ
  • 작성자호호아줌마~ | 작성시간 26.06.16 우리 남편인데요.
    저흰 타이밍 늦어서 이제 서울 집은 포기했어요.
    대신 주식으로 으쌰으쌰~
  • 작성자돼지(분홍) | 작성시간 26.06.16 ㅠㅠ 슬픔 이네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