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밤 10시.
식탁 위에는 몇 장의 인쇄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남편 진우는 돋보기안녕을 고쳐 쓰듯 안경을 치켜올리며, 형광펜으로 서류의 특정 수치들을 거칠게 그어 내렸다.
화면 속 유튜브 채널에서는 ‘부동산 시장 붕괴 시나리오’, ‘역대급 가계부채 폭탄’이라는 자막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거 봐, 민정아. 내가 뭐랬어.
통계청 인구 추계 보면 2, 30대 유입 인구 자체가 꺾였어. 이 구조에서 아파트 가격이 유지된다는 건 사기야, 사기.”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마친 아내 민정은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결혼 후 7년 내내, 집값이 조금이라도 들썩일 때마다 반복되는 남편의 ‘대한민국 붕괴론’ 강의였다.
“여보, 그 인구론 얘기 벌써 몇 년째야? 당신 말 믿고 4년 전에 마포 아파트 전세 계약 갱신할 때, 그때라도 샀으면 우리 지금 걱정은 안 해. 그 사이에 집값은 억 단위로 뛰었잖아.”
진우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일시적인 거품이라니까! 영끌족들이 막차 타서 억지로 밀어 올린 데드캣 바운스야.
일본 버블 경제 무너지기 직전에도 다들 영원히 오를 줄 알았어. 지금 사면 완벽하게 상투 잡는 거고, 대기업 건설사들 설거지해 주는 꼴밖에 안 돼.”
민정은 가슴이 꽉 막혀왔다.
전문직이고 살면서 늘 똑똑하다고 인정 받던 진우는 늘 스스로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자산가라고 믿었지만, 민정의 눈에는 그저 ‘폭락’이라는 확증 편향에 갇힌 사람 같았다.
오직 집값이 망한다는 뉴스만 찾아다니며 위안을 얻는 중독자.
“우리 내년이면 아이 초등학교 입학이야. 대치동이든 목동이든 어디든 학군지 주변에 정착해야 할 거 아냐.
전세 만기 때마다 집주인 눈치 보고 대출 연장 서류 떼러 다니는 거, 나 이제 지긋지긋해. 언제까지 대한민국 망하기만 기도하면서 살 건데?”
‘학군’이라는 말에 진우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학군지도 거품이야! 인구가 주는데 학원가가 영원할 것 같아?
둔촌동이고 강남이고 PF 대출 부실 터지면 도미노로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야.
조금만 더 현금 쥐고 버티면 반값에 주울 수 있는데, 왜 그 세력들 좋은 일을 시켜주냐고!”
“진우 씨 당신은 지금 집값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
민정도 결국 참았던 감정이 폭발해 소리를 질렀다.
“뭐? 내가 누굴 위해서 매일 밤새 가며 거시경제 지표
분석하고 자산 지키려고 애쓰는데! 내 판단이 틀린 게 아니야. 시장이 왜곡된 거지!”
진우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채 서류 뭉치를 내팽개쳤다.
민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거실에 홀로 남은 진우는 식식거리며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내의 “당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라는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지독한 불안감—‘혹시 정말 나만 틀린 거면 어쩌지? 만에 하나 여기서 더 오르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지?’—이 그를 괴롭혔다.
다음 날 아침, 집안에는 차가운 침묵만 맴돌았다.
민정은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아이를 챙겨 집을 나섰고, 진우 역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출근길에 올랐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진우는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모니터 구석에 띄워놓은 부동산 실거래가 알람 앱에는 연일 ‘신고가 경신’ 팝업이 떴다.
진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서랍 속에서 몇 달 전 민정이 가보자며 식탁에 놔두었던 인근 신축 단지 조합원 매물 안내장을 꺼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이사님, 죄송하지만 오후에 반차 좀 쓰겠습니다. 급하게 개인적으로 확인해 볼 일이 생겨서요.”
회사 문을 나서는 진우의 손에는 여전히 거시경제 분석 자료가 들려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생전 처음으로 부동산 중개업소가 밀집한 대치동 골목을 향하고 있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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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낭만할매 작성시간 26.06.16 현실 에서 저런경우 꽤있지요.
제 딸네도 저런경우ᆢ
다른점은 저런 남편두고 지가 대출받아 신축 청약해서 당첨되어 한시름 덜었지요 .
뭐든 반대만하다 지금은 입다물고 재테크 는 모르쇠 하고
있는 눈치 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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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내누군지아니 작성시간 26.06.16 글쓴님 직접 쓰신건가요?
10여년 전 초이노믹스 '노량진 허생전' 글과 문체가 매우 비슷해서요. -
작성자싼타페^^ 작성시간 26.06.16 저희집 얘기라서 깜놀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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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호호아줌마~ 작성시간 26.06.16 우리 남편인데요.
저흰 타이밍 늦어서 이제 서울 집은 포기했어요.
대신 주식으로 으쌰으쌰~ -
작성자돼지(분홍) 작성시간 26.06.16 ㅠㅠ 슬픔 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