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국 중에서 가장 먼저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한 백제 고이왕은 부여(불:해=왕관문양)왕 구태
고구려.백제.신라.가야 4국 중에서 가장 먼저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한 백제의 고이왕의 이름은, 먼저 《주서(周書)》 및 《수서(隋書)》의 백제전에 백제의 시조라 기록된 '구태(仇台)'라는 이름을 ‘구이’로 읽어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으로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함으로써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질적 건국자로 본다. 고이왕의 시기가 부여왕 구태의 장인인 요동태수 공손탁(공손도)과 구태의 처남 공손강 시기에 해당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이왕은 부여왕 구태로 장인가문이 되는 후한의 요동군과 합세하여 고구려에 대적하다가 요동군이 위나라의 침공으로 황해도 대방땅으로 망명을 하자, 100가를 거느리고 망명하여 백제를 세우고 온조의 십제를 통합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정한 것으로 보아도 백제시조가 해모수부여왕조를 접수한 부여 동명왕 고두막의 후손으로서 동부여에서 망명한 고추모가 부여왕에 즉위하여 국호를 고리(고려=고구려)로 바꾸자,
이에 반항한 부여세력이 부여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길림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며 고구려에 대적했던 반고구려집단이였던 부여왕 구태임이 분명해진다.훗날 몽골로 이주한 부여집단이 징기즈칸의 몽골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으로 이주한 부여집단이 불가리아를 건국하게 된다.
내정면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제도와 복식 제도를 제정했으며, 그것은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이어져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
재위 27년(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여섯 개의 6좌평(佐平)을 두고, 그들에게 왕명 출납과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아보게 했다. (자세한 것은 좌평(佐平) 참조.) 또한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주색[紫色], 다홍색[緋色], 푸른색[靑色]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
이러한 지배체제의 정비를 통해 왕권의 강화를 이루어냈고, 그 성장한 힘을 바탕으로 대외 팽창을 시도하여,고이왕은 낙랑과 신라 그리고 말갈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 갔다. 또한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말갈(동예라고 불리는)족이 자주 침범해 왔는데, 고이왕대에는 말갈과도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군(평안도), 대방군(황해도)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전한의 군현지역은 요서지역으로 고이왕 시기에는 모용선비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후한군현은 요서지역이 아니라 북한지역이다.)
재위 13년(246년) 위나라가 낙랑군(樂浪軍)과 삭방(朔方)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徵出)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려 기강을 바로잡았고,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徵出)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백제의 법령은 뇌물비리가 청산되지 않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도 꼭 필요한 법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질서가 바로 서는 국가기강의 확립은 인성교육과 더불어 강력한 법령과 법집행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서와 역사분석 자료]고이왕의 요서정벌
"부여는 원래 녹산(길림 송화강)에 도읍하고있었는데 백제의 침입으로 도읍이 파괴되어 모용선비족의 연燕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도읍을 옮겨갔다.그 후 서기 346년 연나라 모용황이 부여를 급습해 부여왕 '현'과 그 이하 5만여구의 부여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자치통감
"서진 말(서기 3세기 말)에 고구려가 요동,낙랑을 침략하고 약탈하자, 백제가 요서를 경략,점유하여 진평군晉平郡을 설치하였다." - 남조 양직공도,남조 사서들
"고이왕이 낙랑군,대방군을 쳐서 크게 약탈하고 낙랑태수가 분노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고이왕본기
"마한의 신지가 낙랑군,대방군을 쳐서 대방태수 궁준이 죽었다. 그러나 낙랑,대방군이 끝내 마한馬韓을 멸망시켰다." - 삼국지 동이전 한韓전
"고이왕의 아들 책계왕은 대방국 왕녀 보과와 결혼했다." -삼국사기 백제 책계왕본기
"서기 238~239년 대방군과 야마토 여왕 히미코가 수교를 맺었다." -삼국지 동이전 왜倭전
"서기 280년 진晉나라 왕 사마염이 오나라를 쳐서 멸하였다. 이 때 수십개국이 동이東夷 한국韓國(남한)으로 귀화하였다." - 진서 무제 사마염기
"진씨秦氏(하타씨)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궁월국(황해도,임진강 유역)의 수장인 궁월 임금이 광개토태왕을 피해 일본열도로 도망쳐 응신천황께 귀화하였다." -일본서기 응신천황기
"고이왕 당시 백제의 북쪽 제후는 진씨眞氏 가문으로 유명 재상들, 명장들이 나온 강한 집단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고구려에 나온 온조의 십제를 통합한 고이왕에 의해 건국된 백제는 서기 3세기 중반에 갑자기 강한 군사력과 마한군을 동원하여 낙랑,대방군을 쳐서 황해도의 대방태수 궁준을 죽인다.
해모수 부여 초기에 진한국에서 남하한 5가의 무리들이 상장군 기탁을 진왕으로 세우고 서남부지역에 세운 마한이 낙랑,대방군과 싸워 군사력이 소모되자, 고이왕이 마한의 중심국가인 목지국을 차지하며 마한의 중심부를 통합해 버린다.
후한이 망하자 대방군은 자립하여 왕국을 세우고 중국 위나라와의 외교도 유지하며 백제 고이왕조와 혼인동맹을 맺고 바다 건너 야마토 히미코 왕조와도 수교를 맺는다. 이 주된 일을 추진한 집단은 대방군 호족 진씨眞氏들로 그들은 일본서기에 진씨秦氏(하타씨)로 나오는데. 황해도,임진강 유역에 살았던 '궁월 왕국'으로 나온다.
이로써 대방국(대방군)을 통해 유명무실해진 낙랑군을 쥐고 흔들 수 있게 된 고이왕 백제는 진한辰韓(박혁거세 사로국)과 잦은 군사충돌을 하며 영토를 확장하며 서남해 지역과 연계된 열도의 마한왕조인 야마토세력과 연계하여 해군을 기르고, 6좌평제 등으로 법치를 강화하고 위나라를 이어 일어난 사마염의 진나라와 대방군을 통해 많은 무역을 하여 부富를 축적한다.
서기 280년 진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고이왕은 마한의 진왕노릇을 하며 한韓 수십개국을 대표하여 사마염의 진나라와 정식 무역을 체결한다.
서기 286년 부여 의려왕의 아들 의라는 진나라군의 호위를 받으며 부여인들을 거느리고 모용선비족이 거주한 요서로 이주해 요서부여(라마동고분)를 세우고 모용선비(연)와 대치한다.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태왕이 북한지역의 낙랑,대방군을 접수하고 요동지역을 공격하자, 이 때를 틈타 백제 고이왕은 해군력을 동원하여 요서를 쳐서 장악하고 진평군晉平郡을 설치한다. 진평군은 진晉나라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고이왕과 미천왕은 사전에 밀약을 하고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이 위대한 업적은 훗날 고이왕을 책계왕,분서왕이란 2가지 시호를 얻게 한다. 책계(zege)왕은 zhuge(제갈의 중국발음)왕의 백제식 한자 표기이며 분서왕汾西王이란 서쪽의 중국영토를 분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었다는 시호이다. 120세까지 살았던 고이왕은 실로 재능,지략,정치력,군사력이 뛰어난 비범한 왕이였던 것이다.
대방군이 고구려에 망함에도 백제가 모른척하자 분노한 대방군(대방국)의 호족 진씨眞氏들은 배를 타고 모용선비족에게 투항하거나 황해도,임진강 유역에 성들을 굳게 쌓고 고구려,백제에 결사항전한다. 대방국은 사신을 모용선비족에게 급파해 도움을 요청한다.
모용선비(연)의 왕 모용외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요서부여(라마동고분) 의라왕과 혈맹을 결성하고 요서 일대를 제패하고 있었다. 모용외는 요동을 침입하는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요동에 군대를 파견해 요동군 태수를 도우며 고구려 미천태왕을 힘겹게 막아 내고 있었다.
이 때 모용외는 북한지역의 낙랑군,대방군에서 배를 타고 요서로 도망해 온 낙랑, 대방태수와 유민들을 거두어 주고, 요서부여(라마동고분) 비류왕의 둘째 아들 부여구 왕자(훗날 근초고왕)는 자객들과 기마군으로 하여금 백제 계왕을 암살하고 낙랑과 대방을 구하라 명한다. 고이왕계 계왕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향을 피우며 선주先主 고이왕의 대업을 위해 기도하고있었다.
마한.사라.가야 등 남한과 열도지역을 기마군으로 순식간에 정벌하고 굴복시킨 근초고왕은 백제에 새롭게 수혈된 부여기마집단이라고 해야 맞다. 박혁거세의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박혁거세 혈통과 짜집기하여 왕족의 족보를 만든 흉노신라의 왕족의 족보와 마찬가지로, 백제왕족의 족보 또한 고이왕과 비류왕을 기점으로 어색하게 족보를 짜집기한 듯한 한참 선대인 구수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비류왕과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이 백제장인(구태의 장인 공손도)의 땅이라면서 고구려가 차지한 황해도(대방땅) 회복에 심혈을 기울인 배경도 모용선비와 백제의 연합전선에서 나온 군사전략이라고 봐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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