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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평양성 찾기- 준왕조선 시기 한나라 유주 우북평.요서군 위치

작성자신석재(백랑)|작성시간19.05.28|조회수624 목록 댓글 0

전한 시기 어양군의 동쪽에는 우북평군이 설치되었고 더 동쪽에는 요서군이 설치되었으니 3 개 군은 연이어서 혹은 접계하고 있었습니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우북평군 무종현에는 650 리 길이의 경수가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경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옹노현으로 들어가 고수로 합쳐진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청 시기 지도인 위의 <대청일통여지전도/직예전도>에 준화.옥전을 경유하는 서남류하는 물길이 650 리 경수이고 옥전은 당 측천무후 시기에 무종현에서 옥전현으로 개칭되었으며 대릉하 곧 백랑수가 발원하는 백랑현.석성현 역시 우북평군 지역이였으니 전.후한 시기의 우북평군 지역은 아래 표시와 같았을 것입니다.


               


전후한 시기의 요서군은 <한서/지리지>와 <수경주>에 의하면 어양.우북평군을 경유한 난수가 동남쪽으로 흐르며 요서군 비여현을 경유한 후 갈석산 남쪽을 지나 발해로 흘러든다고 하였고 진나라 시황 시기 장군 몽염은 전국시대 연나라가 쌓은 장성을 수축하였는데 장성이 동쪽으로 뻗어나가며 동남쪽으로 흐르는 난수를 끊고 동쪽으로 계속 뻗어나가 그 끝은 바다에 이르렀으니 바로 요서군 임유현이였습니다. 


따라서 요서군은 난수 하류와 만리에 이른다는 장성의 동쪽 끝이 있는 곳이고 이러한 지리는 청이 멸망하는 1911 년까지도 변하지 않았으니 <청사고/지리지>에 기록된 영평부 노룡현에서 산해관까지의 리 수인 170 리가 요서군의 동서 폭이였습니다. 


                  


                


후한 시기의 지리지인 <후한서/군국지> 상곡.어양.우북평.요서군 주석에는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각각 3200 리, 2000 리, 2300 리, 3300 리 떨어져 있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어양.우북평군 주석의 리 수는 대략 900 리 전후 줄여진 것이 확실하며 이는 전사자의 실수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일본이 청일전쟁이후 만주국 건국시기 사이에 조작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청일 전쟁 이전 시기에 낙양에서 거용관까지 3200 리, 옥전까지 2300 리, 노룡까지를 3300 리라고 설명하였다면 중국 지리가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잘못되었다고 각주를 수없이 달았을 것인데 일체 반응하지 않은 것은 중국으로서도 강역이 늘은 것이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입니다. 그 외에도 기본적으로 낙양에서 북경 북쪽 거용관 부근까지가 3200 리인데 어떻게 북경까지를 2000 리, 북경 동쪽 계현까지도 2000 리, 옥전 부근까지를 2300 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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