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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양을나 탐라왕국 3307년(5)

작성자법선- 양 인|작성시간20.09.12|조회수393 목록 댓글 1

 

6. 해상왕국 제2왕조 시대

 

2왕조기는 63세 라주왕 때부터 100세 탐신왕 13년까지로 서기전 445년부터 679년까지 1,124년간입니다. 이 시기는 탐라왕국의 전성기로 가야·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겨누던 해상 왕국 시대입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탐라는 이미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여러 나라에 진출하여 교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의 지방영역인 삼한으로 특히 마한과는 인접하여 교역이 매우 많았습니다. 서기전 400년부터 탐라 유민들이 영산강 유역 강진·해남·고흥·장흥 등으로 해민국 탐라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탐라 땅이 되었습니다. 영산강 유역 남해안 육지로 진출한 탐라사람들은 3세기에는 전라도에 분포한 여러 호족세력의 맹주국이었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전남 소국 내지 호족세력을 통합하고 탐라도(耽羅島)와 더불어 넓은 영토와 바다를 다스리는 당당한 국가였습니다. 이 때 국호 탐라왕국은 섬나라라는 뜻으로 탐라도의 섬 자체와침미다례(浸彌多禮) 또는 하침라(下沈羅)’라 불리는 육지의 일부를 포함한 해상국가 이었습니다.

 

탐라왕국은 남중국·동남아시아·동아시아·백제·신라의 해상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백제 본국(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서 유구(琉球)제도(석원도石垣島대만(타이베이 시·대만 고웅현), 남중국(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산군도·절강성 동부·복건성·광동성·광서장족자치구)이나 동남아시아(베트남 다낭 호이안시·캄보디아 톤레삽·필리핀 비간Vigan·인도네시아 탈라우드 제도·티모르 섬·브루나이·인도네시아 칼리만탄 주의 카리마타 제도·인도네시아 자바 섬 서부의 수라바자Surabaja·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동부의 팔렘방Palembang·수마트라 섬 중부의 아루Aru·싱가포르·말레이 반도의 티오만Tioman ) 남아시아(실론 섬 북부의 섬들·바라트의벵골주 탐룩Tamluk)로 건너가려면 탐라왕국을 거쳐야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탐라왕국이 반기를 들면 남중국·동남아시아·남아시아에 있는 백제의 해외 식민지들과 백제 본국이 연락할 길이 끊어져 백제 본국이 해외 식민지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백제는 해외 식민지들을 통해 무역을 했으므로 뱃길이 끊어진다는 것은 해외식민지를 잃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탐라의 동쪽에서 배를 띄우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해류(쓰시마 해류)를 따라 대마도에 닿을 수 있었고, 대마도에서 이키 섬(일기도)을 징검다리삼아 구주(九州) 북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탐라 동쪽에서 출발해서 오도五島제도를 징검다리 삼아 구주 서부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백제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뱃길은 만약 탐라가 반기를 들고 바다 길을 끊는다면 백제의 무역에 크나큰 타격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제 왕실은 만약을 위해서라도 이런 일은 막아야 했습니다.

고대국가의 중요한 힘은 물자와 사람의 빠른 이동에 있었습니다. 하늘길이 열리지 않았던 시대에 육로보다는 해류를 이용한 해상 이동이 더욱 빠르고 유리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탁월한 해상 능력을 가진 탐라왕국 사람들은 해상활동이 왕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바다를 통해서 상대지역으로 갈 때에는 탐라를 직접거처가거나 아니면 탐라 권역을 경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탐라는 해로의 인터체인지이었습니다. 이럴 수 있는 이유는 자연환경입니다. 동아시아 바다에서는 해류가 중요한데 규로시오해류가 필리핀 루손섬에서 출발하여 북동방향으로 진행하다가 탐라도를 바라보면서 양쪽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길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탐라왕국을 경유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동아시아의 계절풍입니다. 특히 남서계절풍이 불 때는 중국의 절강성 이나 동남아시아 아니면 필리핀 등에서 출발하면 자연스럽게 탐라왕국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탐라왕국이 해양의 물류(物流인류(人流문류(文流)의 교류 센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해양 남방 문화가 결집하는 곳이었습니다. 또 하절기의 계절풍을 이용하여 탐라왕국에서 출발한 무역선은 전남 해안 지방에 도착하기 쉬웠습니다. 남중국과 일본열도가 교류할 때도 반드시 탐라왕국을 거처가야 하므로 중국과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중간 기지였습니다. 아주 오래 일만년전 구석기문화도 이런 해로를 타고 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화 문명이 한반도 육지보다 빠르게 전달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탐라왕국은 첫 번째로 한반도에 직결되는 항로가 있었고, 중국의 북부에서 남중국까지 연결되어 탐라왕국에 이르는 항로가 발달되었습니다. 일본열도와 중국을 연결할 때도 탐라왕국이 중요하였고, 동해안 연해주를 통해 한반도를 거처 탐라왕국까지 오는 항로로 연결 되어 해양교통·문물교류의 인터체인지 역할을 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탐라왕국은 동아시아의 다양한 발달된 문화를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사회는 이런 해양교통로를 장악하는 세력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승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지와 바다를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고 통일적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 탐라왕국은 분명히 동아시아의 교역국들 사이에 해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국가간 교류를 이어가는 교류 센타 이었습니다.


이 증거로 일본의 오사카 사천왕사에서 매년 열리는 <왔소축제>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축제입니다. 여기서 축제를 시작하는 행렬에 일천여명의 외국 사신들이 줄을 잇는데 선두에 탐라(耽羅)와 가야(加耶)가 있고 뒤를 이어 신라·고구려·백제가 뒤따릅니다. 탐라의 깃발이 앞에 서는 것은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나라는 탐라왕국이라 생각되기에 축제 행렬 앞에 서는 것입니다.


 

탐라왕국는 한반도 남쪽 및 중부지방 일본열도 등과는 달리 아시아 등 모든 세계의 자연적 산물들이 모이는 물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탐라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물류 허브 역할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무역상 이로운 점을 얻었습니다.

하늘길이 열리지 않은 시기에 동아시아의 교역로상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한 탐라왕국은 모든 지역과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한 각국 간의 교역 창구역할을 탐라왕국이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탐라왕국은 단순한 육지의 영토로 한정된 나라가 아니라 매우 넓은 해상의 교통요지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이점으로 아시아 세계의 모든 나라와 소통하는 선을 장악한 나라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네트워크를 장악한 선의 해상왕국이었습니다.

말린 전복과 말린 사슴고기처럼 탐라사람들은 1차 산업에서 얻은 생산품을 가공하여 수출하는 자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탐라사람들의 가공기술은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는데 그 결과 탐라전복과 탐라방포는 중요한 임금의 진상품 중 하나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운반에 있었습니다. 무역 물품을 운송할 빠르고 튼튼한 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암초가 많은 탐라 주변의 해저지형 때문에 배들이 해안에 정박하고 운항하기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작은 배도 정박하지만 큰 배도 정박할 수 있는 석축을 축조할 수 있었습니다. 탐라사람들은 주변 바다지형에 유리한 배를 만들었고 그 배가 해상 탐라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탐라교역선 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증거로 영산강 유역 고분과 패총에서 탐라사람들의 흔적이 깃든 많은 유물의 발견은 이를 증명합니다. 전남 나주 복암리 유적 3차 발굴에서 출토된 탐라왕국의 목간뿐만 아니라 복암리 마을에서 발견된 커다란 항아리는 입이 넓게 벌어졌으며 바닥이 좁고 편평한 형태로 탐라왕국의 곽지리식 단계의 토기와 흡사합니다. 화산암으로 추정되는 굵은 알갱이가 다량 포함되는 것은 탐라왕국의 영향권임을 뒷받침합니다.

침미다례가 위치했던 전남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 한반도 최대 규모 패총에서는 구석기에서 철기 시대에 유물 1천여 점이 발굴되었습니다. 고대 탐라왕국과 교류의 흔적으로 고대 토기 제조 터의 발굴은 침미다례의 왕성한 시기였던 서기전 2세기부터 5세기까지 유리 구술과 용범 등의 유물들이 동시에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것은 탐라사람들의 해상세력을 통해서 철기문명을 받아들인 흔적입니다. 이는 군곡리 주변이 침미다례의 무역항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더불어 나주 수문 패총, 광주 신창동 유적, 사천 녹도 패총 등 서남해안 철기시대 거대 패총 63곳에서 출토된 고대 바닷길의 유물들이 탐라와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서기전 74년에 탐라왕국의 시조 양을나(良乙那) 후손인 75세 월점왕(月占王)의 동생 양지백(良之伯)이 진한(辰韓)으로 이주하여 육부(六部) 촌장의 딸과 혼인하여 살았습니다. 그 곳이 경상북도 경주시 양좌동(良佐洞 경주 양동마을)입니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서기전 57년에 신라를 개국할 당시 개국공신 족장 중의 한분으로 아산박씨(牙山朴氏) 수보(修譜서원문(序源文)에 활자화 되어 전해져 옵니다.

양지백의 벼슬은 장도부총(將刀副總)으로 탐라왕국에서 마필(馬匹)을 가져와 크게 헌상한 대공의 유공자로 신라개국공신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손들이 예성군파로 생각 됩니다.

이때 양지백(良之伯)의 안무사(按撫使)로 함께 진한(辰韓)으로 이주한 분은 양선태(良善泰) 장군이었습니다. 이분은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신라를 개국할 당시 개국공신 중의 한분으로 벼슬이 정남장군(正南將軍)이었습니다. 양선태장군은 서기전 37년에는 신라와 고구려 고주몽왕(高朱蒙王)과의 강화조약(講和條約) 체결에 있어서 대공을 세운 유공자로 신라 개국공신에 추대되었고 그 후손들이 용성군파와 대방군파로 추정됩니다.

그 곳이 경상북도 경주시 양좌동(良佐洞)에서 일천여년 동안 탐라왕국에서 가져온 불교를 숭상하고 영화를 누리며 개척영위(開拓營爲)하여 씨족의 세거지(世居地)를 이루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역성역명의 난세(易姓革命亂世)를 피하여 왕제 후손의 외손인 월성손씨(月城孫氏)들에게 모든 것을 미루고 양산·남원·마산·김해·부산 등지에 출향하여야만 하였습니다.

 

4세기부터 한반도는 탐라·가야·고구려·백제·신라까지 다섯의 왕국이 자웅을 겨루고 있었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백제와 신라는 크고 작은 전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 싸움과 화친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즉위하자 그 싸움이 최고에 달하였습니다. 하물며 서해 건너 중국의 광활한 지역까지 백제의 영토 일부로 둘만큼 강성한 국가이었던 백제는 한반도 남해안 지역의 고해진(古奚津 강진해남(沈溟縣고흥반도·무진주의 양과동과 그 앞 독산성(禿山城)까지 차지한 침미다례는 항상 눈엣가시였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침미다례를 남만(南蠻: 남쪽 오랑캐)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백제에 굉장히 성가신 존재이었습니다. 백제 근초고왕은 국력이 최고조에 달하였던 3693월에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신라·가야·탐라를 한꺼번에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제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도 군사를 보내 합세하였습니다.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이 수륙 양면으로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개국을 평정하였습니다. 목라근자(木羅斤資) 장군을 시켜 영산강 유역 남해안의 탐라 침미다례의 고해진(古奚津 강진)를 직접 공격하였습니다. 백제 근초고왕이 침미다례를 직접 정벌하여 도륙(屠戮)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륙>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무참히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때문에 주변의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개 읍이 스스로 알아서 항복하였습니다. 이것은 침미다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로서 탐라는 백제에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침미다례의 세력은 백제에 대하여 극심한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때가 탐라는 90세 위양을나(爲梁乙那)가 즉위하여 3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은 평양 전투에서 고구려를 40년이나 이끌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하였으나 건강의 악화로 환우에 시달립니다. 드디어 위양왕 7년 서기 373 신라와 백제의 관계를 냉각시키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침미다례의 육지 깊은 최전선이었던 독산성(禿山城: 지금의 광주시 광산구)에서는 백제군과 백제 사람들의 온갖 수탈과 만행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겨우 얻은 곡식들은 공물로 빼앗겨야 했습니다. 더구나 백제 사람들의 멸시뿐만 아니라 자주 자행되는 노략질과 만행에 견디지 못한 성주(城主) 양탕(良宕)이 부계양(夫繼良)을 안무사(按撫使)로 대동하여 백성 300여명을 이끌고 신라에 귀순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때는 신라 내물왕 18, 백제 근초고왕 27년이었습니다.

368년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필을 내물왕에 선물하여 신라는 백제와 화친을 유지하며 국력을 다져 나갔습니다. 당시 신라는 잦은 홍수로 크게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한 때는 홍수로 산이 열 군데나 무너져 민가의 피해가 대단하였습니다. 신라는 연이어 발생한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자가 늘어나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내물왕은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침미다례 백성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도록 하였습니다. 침미다례를 아군으로 믿었던 백제의 근초고왕이 이 일로 불같이 화를 내어 신라에 항의 서한을 보내왔습니다.

두 나라가 화목하게 형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나라에서 도망간 백성들을 받아들이니 이는 화친하자는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번 일은 대왕께 기대하는 바가 아니니 속이 우리 백성들을 돌려보내기 바라오.”

그러자 내물왕도 사신 편에 답신을 보냈습니다.

백성이란 항상 같은 마음을 갖는 게 아닙니다. 왕이 그들은 생각해 주면 오고, 힘들게 하면 가나니,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소. 대왕께서 백성들을 편하게 해 주지 않은 것은 반성하지 않고, 과인을 책망함이 어찌 이토록 심할 수 있소이까?”

이 사건으로 백제와 신라는 한동안 옥신각신하였고 관계도 소원해졌습니다. 371년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3만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자 고구려와 백제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침미다례의 성주 양탕(良宕)이 백성들을 이끌고 신라에 귀순한 사건은 이런 경황 중에 발생하였습니다. 침미다례가 귀속되었다고 믿었던 백제는 신라의 처신에 못마땅했지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당시 373년 백제는 근초고왕이 노환으로 병상에 누어있었습니다.

4년전 백제가 도륙하였을 적에 살아남은 탐라의 백성들은 얼마나 큰 원한에 쌓였겠습니까? 언젠가 다시 일어나 보복하리라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며, 생산품은 거의 조공으로 빼앗기며 온갖 수모와 시련을 이겨 내며 살아야 하였을 것입니다. 침미다례의 성주 양탕이 결단을 강행한 시기는 백제의 근초고왕 28년으로 노환으로 병상에 누워 있을 시기입니다. 그 이듬해 근초고왕의 죽고 근구수왕이 즉위하였으니 탐라의 백성들은 절호의 기회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는 이전까지만도 매번 백제가 승리하는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백제에 도륙 당하였던 침미다례의 주세력 300여명이 신라로 망명하였으니 신라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대대적 환영을 넘어 천군만마를 얻은 엄청난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라 조정에서는 귀순한 탐라의 성주 양탕을 광순사(廣巡使)로 환영하고, 큰 상()으로 성주왕자(星主王子)에 봉하여 작록의관(爵祿衣冠)을 내렸습니다. 신라 내물왕은 크게 환영하며 양()을 양()으로 개사성(改賜姓) 하도록 사성(賜姓: 왕이 성씨를 내림)하였습니다. 당시는 많은 부족이 성씨가 없어 중대한 포상을 할 때는 왕이 성씨를 내려주는 것이 최고상 이였습니. 그러나 침미다례 세력은 성씨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최고로 우대한 포상을 하기 위하여 성씨의 글자를 바꾸는 상을 내린 것입니다. 이 후 한때는 양()과 양()을 혼용하였으나, 결국은 양()씨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양()씨는 신라에서 우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여 많은 정승을 배출하는 대 족벌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양탕(良宕)은 양()씨의 중시조로 추대되었습니다.

신라로 이주한 양탕(良宕)의 후손으로는 태종무열왕조에서 법률을 정비한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梁首)와 최고의 관직인 일길찬(一吉湌)을 지낸 양신(梁臣)은 신라 통일의 많은 공을 세분 분들입니다. 특히 12대 후손으로 추정되는 신라 경덕왕 16년에 양우량(梁友諒)이 왕실에 공훈이 커 남원부백(南原府伯)을 받은 뒤부터 남원양씨로 분적하였으며, 둔암(遯菴) 양능양(梁能讓)이 동궁내시강학사(東宮內侍講學士)를 지내 병부공파(兵部公派)를 이루었습니.

신라의 내물왕은 어떠한 후한 상을 내려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대대적으로 환영하여 정치적 안정의 힘을 얻는 계기로 활용하였습니다. 실제로 이 후부터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며 우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라가 당과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까지 차지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해마다 백제에 조공을 바치던 탐라는 백제가 웅진 천도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되자 백제에 반발하여 공납을 거부하고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에 백제의 동성왕 20(498) 8, 동성왕(東城王)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습니다. 백제군은 웅진을 떠나 부여에서 금강을 건너 익산·전주를 거쳐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양교왕를 대신하여 침미다례 수장이 사신으로 나서 군사를 철병하면 더 많은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여 백제 군사가 물러갔습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합니다.

탐라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아 왕이 친정하여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하니 그쳤다. 탐라는 즉 탐모라이다.(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乃止 耽羅卽耽毛羅)

이 대목에서 탐라의 영토가 섬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남해안 영산강 유역, 즉 강진·완도·영암·진도·해남 등지까지 지배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탐라가 남쪽의 섬나라였다면 동성왕은 금강하류에서 전함을 띄웠을 것이지 육로로 해서 무진주로 출동했을 리는 없고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사죄하여 군사를 멈추게 한 것은 먼 섬나라에서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탐라왕국은 고려에 통합 될 때까지 하나의 국가로서 엄연히 존재하면서 탐라도(耽羅島) 뿐만 아니라 남해안 침미다례(浸彌多禮) 영토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후부터 백제의 간섭이 심하여 신라 및 고구려와 교역 중단하였고, 백제 내법좌평 고진노가 탐라의 산천지형을 시찰하고 갔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하기 이전에 신라는 탐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습니다. 99세 당교왕 96453월에 신라의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승(高僧) 양지(梁志)로 하여금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세우게 하였는데, 각 층은 신라가 물리칠 외적의 상징으로 탐라는 4층에 해당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탐라는 신라에게 대단히 위협적인 세력이었습니다.




당나라는 탐라를 백제의 일부로 여기지 않고 왜()와 더불어 하나의 나라로 대접했습니다. 탐라는 그때까지 영산강 유역 남해안 지역의 침미다례와 함께 위협적인 해상국가 이었습니다. 653년 탐라는 둘째왕자 양보원(梁寶瑗)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가 삼신인(三神人)의 고도지형(古都地形)을 당()의 오도독부(五都督府) 유인원(劉仁願)에게 바치고 당에 머물렀습니다.

6658월 유인원과 더불어 웅진도독(熊津都督)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의 연미산(鳶尾山)인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세를 하도록 하였는데 탐라 사신으로 양보원이 왜의 사신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회맹(會盟)이란 제후의 우두머리가 다른 제후들을 소집한 다음 제물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을 주재하는 것입니다. 취리산 회맹 때도 흰 말을 잡아 맹세했습니다.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강과 골짜기 신에게까지 제사를 지낸 뒤 그 피를 마셨습니다. 조약문은 당나라 유인궤가 작성했습니다. 삼국사기6 신라본기 문무왕 상()조에는 문무왕이 부여융과 회맹할 때 사용한 맹문이 실려 있습니다.

당나라는 한술 더 떠 철판에 황금 글씨로 조약문을 새겨 넣어 각 나라의 종묘에 대대로 보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을 금서철권(金書鐵券)’이라 합니다. 또 제물의 피를 마신 뒤 제단의 북쪽 땅에 희생(犧牲)과 예물을 묻도록 했습니다. 회맹을 마친 후에는 당 고종의 태산 봉선의식(封禪儀式)에 유인궤가 신라와 백제 사신은 물론 탐라(耽羅)와 왜()의 사신들을 대동하고 중국 본토로 건너가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탐라의 사신 양보원과 왜의 사신이 취리산 회맹의 증인을 서게 된 것입니다. 그 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당나라는 모든 전리를 독점하여 포로 12천명을 당나라 본토로 압송하는 동시에 당나라 병사 1만 명을 유인원(劉仁願)에게 주어 백제 땅에 주둔시키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백제지역을 지배하려 하였습니다. 백제 부흥군이 계속 맹위를 떨쳐 유인원과 그 군대를 포위하자 663년 당나라는 유인궤(劉仁軌)를 보내어 유인원을 돕게 하였습니다. 물론 신라군도 이들을 지원했습니다. 백제의 부흥군을 격퇴하고, 신라군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켰던 중국 당나라 고종 때의 장군 유인궤(劉仁軌)665813일에 신라·백제·탐라·왜 등의 사자를 바다에서 태워 서쪽으로 가자 탐라의 양보원도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경험하고 12년 만에 돌아온 둘째왕자 양보원에게 왕위에 오를 것은 태자 양보기(梁寶璣: 탐신왕)가 간곡히 권하였으나 양보원은 거절하고 동생 양보용(梁寶瑢)과 함께 영산강 유역의 양과동(良苽洞)의 씨족과 합류하여 신라 녹봉(祿俸)을 받고 관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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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나 | 작성시간 20.09.13 건강하시고 좋은 자료 계속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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